콜롬비아 여행 일주일째다. 카리브해 해안의 휴양도시 카르타헤나(Cartajena)를 거쳐 두 번째 방문 도시인 메데인에 왔다. 메데인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공항버스를 집어탔다. 산 안토니오(San Antonio)행 버스였고 다들 종점에서 내리길래 우리도 따라 내렸다. 다행히 내린 곳에서 숙소까지 전철을 갈아타고 갈 수 있었다.
메데인 숙소의 배신
숙소는 전철역에서 10분 걸으면 되는 거리였고 대로(Carrera 70)에서 조금 안쪽으로 꺾인 곳에 위치해 있어 오가기에 위험하지 않았다. 주변에 주택과 상가들이 적당히 있었다.
에어비앤비 숙소는 무려 방 3개에 화장실 2개인 넓은 곳이었고 쾌적했다. 5~6명도 충분히 지낼만한 공간을 둘이서 쓰게 되어 여행 와서 웬 횡재인가 했다.
메데인의 숙소
오후 서너 시가 되니 인근 바(Bar)에서 음악이 나오기 시작했다. 음악은 저녁 내내, 밤 내내, 새벽 내내 계속되었다. 밤이 되니 음악이 더 크게 들렸다. 아아~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이 들었나 싶었는데 새벽 2시도 안 되어 깼다. 다시 자려니 소음이 거슬렸다. 귀마개를 해도 소용이 없었다. 새벽 4시 반이 되어서야 음악이 그쳤다. 이틀을 내리 잠을 못 자니 고문이 따로 없었다.
이럴 수가! 숙소의 배신이다. 숙소 주변이 메데인의 유흥가였고 새벽까지 술 손님이 북적이는 동네였던 것이다. 열 받은 김에 폰의 소리 측정 앱을 깔아 조사해 보니 60데시벨쯤 되었다.(침실 소음이 35데시벨보다 크면 혈압이 상승한다고 한다.) 짐 싸들고 호텔로 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런데 고민도 무색하게, 내 청각이 둔해진 건지, 몸이 그새 소음에도 적응해서인지, 사흘째부터는 잠을 자기 시작했다.
산복마을의 도시, 메데인에서 만난 공공교통의 끝판왕
메데인은 고산에 위치한 분지 도시였다. 높고 가파른 산이 병풍처럼 도시를 삥 둘러싸고 있었다. 평지는 좁고 귀했다. 현대식 건물들과 주요 도로만이 평지에 있었고 집이며 아파트는 산자락에 층층이 붙어 있었다. 부산의 산복마을이 떠올랐다. 도시가 온 사방으로 산복마을에 둘러싸인 '거대한 스타디움' 같았다.
San Javier전철역에서 연계되는 케이블카
전철은 메데인 시민들의 자부심이다. 수도 보고타에도 없는 최신 전철이 메데인을 T자로 연결하며 사람들을 실어 날랐다. 전철보다 더 압권은 전철과 무료 환승되는 케이블카였다. 케이블카가 관광이 아닌 공공 교통수단으로 쓰이는 도시가 몇몇 있다고 들었지만 실제로 타보기는 처음이다.
전철역 San Javier역에 내리면 케이블카로 환승할 수 있다.
메데인의 케이블카는 '혁명'이었다.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이 밀집해 사는 산꼭대기까지 공공 인프라가 닿자 산동네의 범죄율도 크게 줄었다고 한다. 한 때 서울시도 대중교통 케이블카 도입을 검토해 전(前) 서울시장이 메데인을 방문한 적도 있다고 한다. 앞으로 세계의 언덕이 많은 도시들은 메데인을 모델로 삼을 것이다.
산동네 끝까지 사람을 실어나르는 공공교통수단 케이블카
부산 감천마을과 닮은꼴 관광지, 꼬무나(Comuna)13(도시 재생 마을)
메데인 사람,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페르난도 보테로
메데인 하면 반드시 언급되는 사람이 둘 있다.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와 콜롬비아의 국민 화가 페르난도 보테로. 둘 다 메데인 출신이다. 에스코바르가 메데인을 남미 마약 카르텔의 근거지로 삼으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피해를 입었다. 메데인 사람들에게는 그 트라우마가 아직 남아있어 함부로 '에스코바르'를 입에 올리면 안 된다고 한다.
전설적인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바르도 문화 아이콘으로 소비되는 중(?)
한편 거의 모든 피사체를 풍만한 볼륨으로 해석해 표현한 보테로는 자신의 작품과 소장 그림을 무료로 개방한다는 조건으로 메데인과 보고타에 기증했다고 한다. 보테로의 그림과 조각은 미술 문외한인 내가 봐도 그의 작품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다.
보테로의 모나리자. 보테로의 그림이 걸려진 가게
보테로 공원에서 현지인들이 조각상 앞에 서거나 기대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순간 깜짝 놀랐다.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작품과 쏙 빼닮은 게 아닌가. 보고만 있어도 입가에 웃음이 그려지는, 보테로의 작품 속의 풍만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메데인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메데인의 보테로 광장(Plaza Botero)
메데인, 딱 한 달만 살아보면 어떨까
메데인은 '마약의 도시, 위험한 도시' 이미지를 벗고 안전하고 세련된 도시로 거듭나고 있었다. 여행 일정에 묶어 닷새만에 떠나게 되어 아쉬웠다. 봄부터 시작된 여행에서 유럽과 미국, 멕시코, 과테말라의 수많은 도시를 거쳤지만 '한 달간 살아보고 싶은 도시'로는 메데인이 유일했다.
라 피에드라 엘 페놀(왼) & 엘 페놀 꼭대기에서 본 전망(오)
메데인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딱 내 몸에 맞는 공기를 가졌다. 인구 250만의 도시답게 교통과 편의시설의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라 피에드라 엘 페놀(La Piedra El Penol)이나 과타페(Guatape) 등 근교에도 갈 곳이 제법 있다.
'몬동고(Mondongo, 곱창국밥)' 하나만으로도 강렬한 입맛을 남긴 메데인의 음식은 또 어떤가. 메스티소(백인과 원주민의 혼혈계), 흑인계, 백인계 등 '인종의 멜팅 팟(Melting Pot) 도시'답게 문화도 뒤섞여 있다. 메데인의 다채로움의 끝은 어딘지 탐구해 볼 날이 올까. 탐구기간은 일단, 한 달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