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 와서 배낭 커버를 벗기는 순간 눈앞이 아찔했다. 배낭의 잠금고리가 열려있다. 내가 이걸 안 잠갔나?
'이럴 때 불길한 직감은 틀리면 좀 좋아?' 배낭을 열었더니 세 뭉치가 사라졌다. 배낭 맨 위에 있던 것부터 세 개가 없어졌다. 침낭, 슬리퍼, 노트북 충전기가 든 파우치였다. 놀라운 건 숙소에 도착해 배낭을 열기 전까지 전혀 눈치를 못 챘다는 것! 배낭 커버까지 원래대로 감쪽같이 씌워놓았다. 이런 섬세한 도둑을 봤나!
남미 여행을 떠나기 전 남미괴담을 수없이 들었다. 남미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네, 카드를 복제당했네, 지갑을 도둑맞았네, 심지어 환전소에서 나오다가 강도를 당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남미괴담이 내게로 왔다. 남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 일어나지 않으라는 법 없지만 막상 당하고 보니 진정이 안되었다.
그 바뇨스가 아니래
어떡하다가 도둑맞았을까. 바뇨스 가는 버스에서 정신없이 졸다가 차장이 "바뇨스! 바뇨스!" 하는 소리에 놀라서 깼다. 배낭을 챙겨 들고 황급히 내리려고 하자 '목적지 바뇨스(Baños)가 아니라 화장실 바뇨스(baños)'란다. 잠결에 정신이 덜 든 상태에서 배낭을 좌석 앞에 둔 채 남편과 내가 화장실을 다녀왔다.
그 사이에 승객 중 누군가가 배낭에 손을 댄 것이다. 작은 배낭은 몸에 메고 있었고 큰 배낭에는 옷가지와 잡동사니뿐 돈 될 게 없으니 누가 배낭을 건드릴까 여겼다. 그러나 그건 우리 기준일 뿐. 이제 와서 누구를 탓하랴! '방심(放心)'이 문제였다.
입은 손실이 '다 낡은 침낭, 슬리퍼, 노트북 충전기와 마우스' 정도라 그래도 다행이다. 기껏 배낭을 공들여 털어갔는데 막상 열고 보니 돈 안 되는 것뿐이라면 도둑의 표정은 어땠을까? 오히려 고소해해야 하나?
바뇨스 귀인이 내게로 왔다
에콰도르에서 도난을 당하고 나니 오히려 키토에서 만났던 친절한 사람들이 떠올랐다. 길을 알려준 사람, 차비 내는 것을 도와준 사람, 왓츠앱에 내 번호를 등록해 손녀랑 통화하게 한 버스 옆자리 할머니까지. 이 많은 고마운 기억을 도둑 한 사람이 상쇄시키려고 들다니!
보토 나시오날 대성당(Bacilica del Voto Nacional)에서 내려다본 키토 시내
키토 근교의, 백두산 천지를 쏙빼닮은 칼데라 호수 킬로토아(Quilotoa, 해발 3,914미터)
이 기분 나쁜 경험을 보상받으려면 에콰도르에서의 남은 여행을 더 재미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바뇨스에서 한국인 여행자 부부를 만났고 숙소에 초대를 받았다.
산깊고 물맑은 곳, 그래서 도시 이름도 '바뇨스'. 바뇨스의 '악마의 폭포'로 불리는 파일론 데 디아블로(Pailon del Diablo)
그분들은 우리 부부처럼 몇 달째 중남미 여행 중인 분들로 바뇨스에서 한달살이를 하고 있었다. 바뇨스 고산에서 자란 배추로 담근 김치를 포함해 양곱창 볶음, 해물전과 샐러드로 푸짐하게 대접받았다.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오로지 '같은 한국인'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이토록 정을 나누다니 놀라웠다.
적도의 나라에서 먹는 배추김치와 한식 한 상
곱창은 바뇨스 사람들도 즐겨 먹는다고 한다. 곱창 숯불구이하는 식당에서 샀고 양(羘)은 시장에서 구입해 같이 양념해 볶았다고 했다. 에콰도르 오지 바뇨스에서 흔치 않은 음식에 무려 '고추가루가 들어간 배추김치'까지 먹었다. 내게 벌어진 남미괴담의 불운이 몇 배로 보상되는 순간이었다.
바뇨스의 숯불곱창구이(Chinchulines) 식당. 에콰도르를 포함, 남미 사람들은 소내장 요리를 즐긴다.
우리가 바뇨스에서 초대받은 세 번째 한국 여행자팀이라고 했다. 본인들도 배낭여행하면서 낯선 여행자를 아무 조건 없이 대접하는 그분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여행의 8할은 사람이다. '현지인과 교류한 기억, 같은 여행자끼리 여행을 나눈 기억'이 '멋진 풍경과 이국적인 문화 경험'보다 훨씬 오래간다. 이렇게 받은 정과 고마움을, 나는 길에서 만난 누구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