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오랜만에 한가한 휴일 아침, 강남 교보문고를 들렀다.
지하 1층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책, 어반 스케치.
예전부터 여행 갈 때마다 인상 깊은 여행지의 모습을 사진으로 남기는 것보다 그림으로 그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왔었다. 사진을 찍게 되면 빠르고 쉬운 건 있지만 너무나 짧은 순간 스쳐 지나가고 수많은 사진 한 장 한 장에 대한 소중함이 덜하지만 그림을 그리게 되면 한 곳을 오랫동안 보고 관찰하고 처음에 보이지 않았던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머릿속에 마치 사진을 찍듯이 그 장면이 남아 더 오랫동안 그 공간의, 그 시간의 느낌을 간직할 수 있게 된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게 된다.
하지만 20~30분 만에 어느 정도 그릴 수 있는 실력이 되려면 시간과 노력이 많이 요할 것 같아 나중에 여유 생기면 해야지 하고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는데 오늘은 왠지 그 책이 눈에 딱 들어왔다. 이 책 저책 쭉 훑어보다 당장 한 권 사서 시작을 해야지 하는 생각에 책을 집어 들었다가 충동구매로 집안 책장을 차지하고 있는 장식책(?)들이 생각나 일단은 자제를 하고 집으로 왔다.
책장으로 가 스케치 관련 책을 찾아보니 몇 권이 있다. 안 사길 잘했지.
일단 연필로 이것저것 그려본다.
잘 안된다.
당연하지.
그림 보는 건 좋아하지만 미술 전공자도 아니고 제대로 그림을 그려본 것도 아니니 그럴 수밖에.
한때 취미로 백화점 수채화반에 다니기도 하고 동네 미술학원에서 유화도 배워보긴 했지만 잠깐 이었고 그것 조차 벌써 5년 전이니 손에 쥐어진 펜이 성글고 어색할 수밖에.
아무래도 혼자 하긴 힘들 것 같아 유튜브를 검색했다.
수없이 많은 컨텐츠가 있다. 진짜 세상 좋아졌다는 생각을 한다. 우리 때는....(꼰대 소리 들을까 봐 여기까지)
쓱쓱 넘기다 걸리는 콘텐츠를 하나 열었다. 성수동 가게라고 한다. 그냥 그려보기로 했다.
만년필을 찾았다. 만년필 촉이 다 말랐다. 다행히 잉크가 있다.
종이를 찾았다. 그 흔한 재활용 A4 용지도 안 보인다. 참으로 오랫동안 펜도 종이도 없이 잘 지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책장에서 먼지 쌓인 종이다발 뒷면에 일단 시작하기로 하고 마음 가는 대로 따라 그렸다.
잘 그리려는 마음이 없으니 편하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막 갈기듯이 그리니 재밌다. 내가 그림을 그리기로 한 건 잘 그리려고 하는 게 아니라 즐기려고 하는 거다 생각하니 더 좋다.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그냥 막 그림을 그리는 행위 자체에서 뭔가 편안함을 느꼈다고나 할까?
음~괜찮은 것 같다, 그림 그리는 것이.
앞으로 계속 그려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럴 수 있을까? 그려야 잘 그리려는 강박이 생기진 않을까?
아니야, 그냥 그리다 보면 익숙해지고 최소한 지금보다는 나아져 있을 거야. 차곡히 쌓인 종이가 책 한 권의 두께가 되는 날 즈음엔 지금보단 발전되어 있을 거라고 나를 위로해 본다.
습작한 종이를 버리지 말고 모아 보아야겠다.
뭔가 이뤘다는 모습에 흐뭇해할 날이 벌써 그려진다. 후훗~~
언젠간 여행지에서 담고 싶은 곳이 생기면 고민 없이 바로 그 모습을 담을 수 있을 날을 기대하며
2025년 2월 15일. 그냥 오늘 시작하는 것으로 했다.
이렇게 시작한다, 그림 그리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