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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by 유이

최근 고흐의 나무 그림을 찾다가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를 책으로 엮은 '반 고흐, 영혼의 편지'를 다시 읽게 되었다. 고흐를 좋아하는 일반 구독자로서 책을 읽을 때와, 그림을 그리려고 마음을 먹었으며 그림을 잘 그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고 혹시나 이렇게 10년만 더 그림을 그리다 보면 언젠가는 그림 그리는 게 두렵지 않게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읽을 때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그냥 그러려니 했을 구절들이 마치 마치 나도 그림을 그려야만 하는,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는 화가라도 된 듯 동병상련을 느끼게 되고 1cm 정도로 느꼈던 공감의 깊이가 30cm는 되듯 그의 고뇌가 고스란히 나에게도 전해졌다. 지금은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으로 칭송받는 고흐가 살아생전엔 단 한 점의 그림만 판매되었고 그 당시 그림을 그릴 때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지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는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닌 둘만의 이야기일 텐데, 그래서 과장하지 않고 솔직한 자신의 심정과 상황, 번뇌, 두려움 등이 편지에 너무 잘 녹아 있어 그의 그림 구석구석 그 흔적들이 겹겹이 쌓여 그의 그림이 평범하게 여겨지지 않은 듯도 하다.


화가로서의 고민한 흔적들도 많지만 또 한편 한 인간으로서 세상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때로는 삶을 초월한듯한 모습이 비취 지는가 하면 때로는 자신의 상황을 너무나 잘 인지를 하고 있어 마치 제삼자가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묘사한 듯 현실적이고 냉철한 판단이 너무나 그럴듯하여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안타깝게 다가온다.


경제적인 문제가 없었으면 고흐는 어떻게 되었을까?

다른 걱정 없이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할 수 있는 상황이었으면 그의 그림들이 달라졌을까?

그림이 몇 점이라도 더 팔렸다면 덜 힘들었을까?

그랬다면 현재의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일어나지 않을 가정을 하면서 살아생전 그의 고통이 너무 큰 것 같아 조금이라도 나은 상황에서 편안히 그림을 그리고 있을 그의 모습을 상상하며 편안하게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테오에게

의욕적으로 일하려면 실수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면 훌륭하게 될 거라고 하지. 그건 착각이다. 너도 그런 생각은 착각이라고 말했잖아. 그들은 그런 식으로 침체와 평범함을 숨기려고 한다.

사람을 바로처럼 노려보는 텅 빈 캔버스를 마주할 때면, 그 위에 아무것이든 그려야 한다. 너는 텅 빈 캔버스가 사람을 얼마나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를 것이다. 비어 있는 캔버스의 응시. 그것은 화가에게 "넌 아무것도 할 수 없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캔버스의 백치 같은 마법에 홀린 화가들은 결국 바보가 되어 버리지. 많은 화가들은 텅 빈 캔버스 앞에 서면 두려움을 느낀다. 반면에 텅 빈 캔버스는 "넌 할 수 없어"라는 마법을 깨부수는 열정적이고 진지한 화가를 두려워한다.

캔버스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무한하게 비어 있는 여백. 우리를 낙심케 하며 가슴을 찢어놓을 듯 텅 빈 여백을 우리 앞으로 돌려놓는다. 그것도 영원히! 텅 빈 캔버스 위에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삶이 우리 앞에 제시하는 여백에는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삶이 아무리 공허하고 보잘것없어 보이더라도. 아무리 무의미해 보이더라도. 확신과 힘과 열정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알고 있어서 쉽게 패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난관에 맞서고, 일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테오에게

삶은 이런 식으로 지나가버리고 흘러간 시간은 되돌아오지 않는다. 일할 수 있는 기회도 한번 가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맹렬히 작업하고 있다. 나의 경우 더 심한 발작이 일어난다면 그림 그리는 능력이 파괴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발작의 고통이 나를 덮칠 때 겁이 왈칵 난다. 그런 상황에서는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막상 겪게 되면 공포를 느끼게 된다. 전에는 회복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었는데, 이제 2인분을 먹어치우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다시 아프게 될까 봐 다른 환자들과의 접촉도 꺼리는 것은 바로 이 정신적인 공포 때문인지도 모른다. 한마디로 나는 회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자살을 시도했는데 물이 너무 차 걸 깨닫고 강둑으로 기어올라가는 사람처럼.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사람을 만나고 싶고,

우리가 용감하다면 고통과 죽음을 완벽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그리고 스스로의 의지와 자기애를 깨끗이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그런 건 나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다. 나는 그림을 그리고 싶고, 사람을 만나고 싶고, 그리고 우리 삶을 만드는 모든 것, 네가 원한다면 인공적인 것이라 불러도 좋은 그 모든 것을 접하고 싶다. 그래, 진정한 삶이란 다른 어떤 것일 테지. 그러나 나는 살아가고 고통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그런 사람은 못 되는 것 같다.


붓을 한 번 움직이는 것은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바람에, 태양에, 사람들의 호기심에 노출된 야외에서는 별다른 생각 없이 잔뜩 몰두해서 캔버스를 채운다. 그것이 진실된 것, 본질적인 것을 잡아내는 방법이다. 가장 어려운 일이지.

그러나 시간이 흐른 뒤 그림에 큰 변화를 주지 않으면서 손질을 하면 확실히 그림이 더 좋아진다



요즘은 온통 그림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 내가 미치도록 사랑하고 존경했던 화가들처럼 잘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고흐처럼 그림을 잘 그리고 열심히 그리는 사람도 다른 존경하는 화가들처럼 잘 그리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으니 정말 열심히 그리기 전에는 힘들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텅 빈 캔버스를 보며 무력함을 느꼈다가 붓을 한 번 움직이는 것에 신기해하며 잔뜩 몰두해서 그림을 그리며 진실된 것 본질적인 것을 잡아내려는 고흐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밤의 카페 테라스 그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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