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전라도에서
전라도로 여행을 갔다. 경상도에서 자란 내게는 전라도는 교과서에나 나오던 곳으로 곡창지대로 알려진 끝없이 펼쳐진 평야는 볼 때마다 이국적이다. 평평하게 쫙 뻗어있는 들판을 보면 우리나라도 이런 곳이 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저절로 내 맘도 한없이 커지고 넓어져 이런 곳에 살면 웬만한 건 다 품을 수 있는 대범함이 키워질 것 같다.
환경과 기후가 사람에게 끼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가는 유학을 간 딸을 보면서 더 실감했다. 영국은 전반적으로 계절과 상관없이 날씨가 좋지 않다. 대부분이 흐리거나 비가 오고 맑은 날이 많지 않은데 사춘기인 데다가 감수성이 예민한 편인 딸은 환경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유학생활이라는 고단함에 우중충한 날씨까지 덧대어 하루하루 지내는 게 쉬운 것 같지는 않다.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아이의 목소리는 날씨에 따라 확연히 달라지는데 날씨가 좋은 날이면 '오늘은 맑아서 너무 좋아 기분이 좋다'며 아이의 목소리로 영국의 날씨를 짐작할 수 있다. 모든 나라의 날씨가 우리나라와 비슷할 거라 생각했었는데 그렇지 않으며 한국의 사계절날씨가 얼마나 좋은지는 딸이 없었으면 몰랐을 것이다.
전라도는 넓은 평야로 산이 많이 없는 지형이니 바람도 많이 부는 것 같았다. 여행 간 날은 바람이 좀 거칠게 부는 것 같긴 했지만 따뜻한 봄바람이라 얼굴에 와닿는 느낌이 차갑지 않고 싫지 않았다. 단지 이렇게 바람이 많이 불면 평소에 옷차림이나 머리를 잘 손질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바람을 맞으며 풍경을 둘러보는데 눈에 딱 띄는 나무들이 있었다. 그 바람을 맞으며 엉클어진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며 아예 한쪽으로 쏠려버린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보는 순간 '앗~고흐의 나무다'. 고흐의 그림에서 보던 나무가 떡하니 있었다. 고흐의 화풍에 의한 것이고 상상으로 그의 심리상태가 반영되어 헝클어지고 복잡한 모습을 그렸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그런 나무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저렇게 생긴 나무를 보고 그의 그림에 영감을 받은 게 틀림없다.
10여 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밀라노에서 기차로 프랑스 남부 아비뇽에 도착을 한 적이 있었다. 아를과 30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고흐의 많은 작품들이 아를을 비롯한 프랑스 남부에서 그려졌다. 아비뇽의 기차역을 나서자마자 쏟아지는 햇살과 풍경을 보고 고흐의 그림이 떠 올랐는데 고흐의 그림들을 단숨에 이해할 수 있었다. 프랑스 남부의 모습, 풍경 자체가 고흐의 그림이었다. 그런 환경이니 그렇게 그림을 그리는 게 너무나 당연하고 고흐와 세잔, 샤갈을 비롯한 화가들만 아니라 피카소, 마티스, 모네, 르누아르 등 많은 화가들이 아름다운 풍경과 햇살을 찾아 프랑스 남부에서 그림을 그렸다는 건 널리 알려져 있다.
'실제와 똑같이 그리고 색칠하는 게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일이 아니다. 설령 현실을 거울로 비추는 것처럼 색이나 다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그리는 일이 가능할지라도, 그렇게 만들어 낸 것은 그림이 아니라 사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앞에 보이는 것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싶지는 않아. 색도 내 마음대로 칠하지. 난 단지 내 자신을 충분히 표현하길 원할 뿐이야'
라고 고흐는 말했고 실제로 그렇게 그렸지만 주변의 자연과 환경이 고흐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프랑스 남부를 떠나려 하지 않은 건 분명하다. 고흐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에 프랑스 남부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아름다운 자연과 좋은 날씨는 남 프랑스의 미덕이다.'
'이런 자연에서는 좋은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남부에서 시작한 이상 다른 곳으로 옮기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이 지역에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리고 싶다.'
전라도에서 본 나무가 고흐의 나무와 비슷하건 아니건 보는 순간 고흐를 떠올리고 놀란 건 사실이다. 그만큼 그림과 나무에 관심이 많고 최근 고흐의 편지를 다시 일고 그의 그림을 찾아보고 해서 그런 것 같다. 내가 관심 있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생각하게 되는 게 신기하다. 상상하고 생각한 대로 이뤄진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된다. 하고 싶은걸 더 간절히 바라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