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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이페이정윤 Nov 28. 2024

괜찮아, 괜찮아....괜찮지 않아.



첫째와 둘째는  고사리 손을 꼬옥 잡고 막내는 휴대용 유모차에 앉아 있다.


오늘도 어김없이 놀이터 행차중이신 세자매


매일 매일 학교 가는것보다 더 즐거운 시간이다.



여럿이 그네에 매달려 놀기도 하고 미끄럼틀에서 술래잡기를 하기도 한다.


학교에서 있었던 비밀이야기를 풀어내느라 친구를 만나자마자 구석으로 숨어 속닥거리기도 한다.


아직 안 나온 친구를 데리러 빠르게 앞집으로 달려간다.


어린 막내는 여기 저기 정신없이 오르락 내리락 하며 내 시야를 벗어나려 한다.


동네가 떠들썩하다.


엄마들도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한다.


곧 밥을 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다.



"오늘 시장갔더니 열무가 엄청 싸고 좋더라...조금 사왔지."



"우리는 애들 아빠 늦는대서 우리끼리 대충 먹으려고...남편 밥 안 챙기면 너무 편해."



"어제 학교 가서 상담했는데 선생님이 뭐라셔?"



매일 보는 엄마들이지만 볼때 마다 할 얘기들이 쌓인다.


본격적으로 수다를 떨고 싶지만 엄마를 가만 두지 않는다.


그네를 밀어줘, 손을 잡아줘 하면서 엄마를 부른다.


엄마 부르지 말고 너희들끼리 놀아~~~


우리도 얘기좀 하자~~~





"현희엄마, 다들 아저씨들 늦는다는데, 우리 저기 새로 생긴 중국집 가서 간단하게 짜장면 먹을까?"



아이들은 환호성을 지르고 난리다.


나도 이렇게 나온김에 저녁을 먹고 들어가면 좋은데...시부모님이랑 같이 사는게 이럴땐 참 쥐약이다.



"안돼, 오늘은...들어가야해. 국도 끓여야 하고 반찬도 먹을게 없어."



시어머니께 하루 정도는 먹고 들어간다고, 두분이 드세요 라고 말할 수도 있을 법한데


애들 어릴땐 그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찍 뭐라고 해놓고 나올걸...아쉽지만 오늘은 안된다.


다음에 같이 먹자.


세자매는 입이 잔뜩 나왔지만 어쩔수 없다.


나도 나온김에 먹고 들어가고 수다도 더 떨고 싶지만 매번 이렇게 어른들 식사를 거르면 안된다는


생각이 컸다.


다음에  같이 짜장면 먹으러 가자, 약속하고 도장도 찍고 헤어진다.



참으로 바른 며느리였다.













학교 엄마들과 본격적으로 친해지면서 저녁에는 맥주 한잔 하자는 약속도 생겼다.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어른들까지 함께 하는 삶에서 


맥주 한잔은 오아시스며 마른 논바닥에 단비 같은 존재였다.


맥주가 오아시스인가 수다가 단비였는가는  모르겠지만


세상에서 그렇게 달콤한 맥주는 처음이었다.



다들 9시쯤 만나지만 나는 9시반이나 되어야 밍기적 밍기적 일층으로 내려간다.



"어머니 요기 수퍼좀 다녀올게요."



그냥 엄마들 만나서 맥주 한잔 하고 온다고 말하면 될것을 


왜 그렇게 다른 핑계를 대로 나갔었는지 모르겠다.


아직 어린 막내가 자가다 깨면 어쩌나


그럼 또 할머니한테 가서 칭얼거릴텐데...


시어머니가 못마땅해할 것이 불 보듯 뻔하다.


나 또한 시어머니한테 자꾸 싫은 소리 듣는 것도 싫다.




"아니 너는 슈퍼를 다녀온다는 애가 이제 오냐? 너 기다리느라 잠도 못 잤다."



"수퍼 갔다가...준성이 엄마 만나서 잠깐 얘기하고 온다는게...."



"낮에 만나서 얘기하면 돼지....늦은 시간에 이렇게 다니냐?"



"죄송해요...."




호프집에서는 앉았다 일어났다를 수없이 반복하고


인생 왜 그렇게 살아? 하면서 언니들은 나를 타박한다.


나도 편하게 맥주 한잔 하고 늦기도 하고 그렇게 살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쉽지 어려웠다.


어른들께 조금이라도 흠이 잡히는게 싫었던 나는 


좋은 며느리로 인정받는 것이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서로 서로 좋은게 좋은거지.


삐그덕거리고 안좋게 할게 뭐가 있나.


내가 조금 희생하면 가정이 평화로운데... 이 정도 쯤이야 하면서


나를 스스로 어르고 달래고 다독이면서 살았다.










저녁밥을 슬슬 시작해야 하는 5시 반이 되면 


몸이 노곤노곤 하다.


한숨 자고 나면 정말 딱일 텐데...


오늘은 무엇을 해먹어야 하나...



말을 안들을것 같은 무거운 몸뚱아리는 시작하면 움직이게 된다.


냉장고를 열면 먹다 남은 재료들이 있어 또 반찬하나가 생긴다.


무 하나를 가지고 무생채도 만들고 냉동실에 쟁여둔 동태를 꺼내  동태탕도 끓인다.


무가 절반 남았네


내일은 무나물을 볶아야 겠다.


무가 맛있네. 내일은 깍두기를 해야 겠다.



식사시간이 소란스럽다


웃음꽃이 피는 날보다 잔소리와 타박이 오고 가는 날이 더 많다.


여자아이 셋이 있는데 조용히 먹는 것이 더 이상하다.


밥을 입으로 먹는지 코로 먹는지, 정신이 없다.



과일을 깎아  내놓고 설거지를 한다.


씻기고 재우고 숙제 봐주고 책도 읽어준다.


오늘도 하루가 다 갔다.


한끼 밥하는것도 이렇게 지치는구나.


아이들이 다 자면 맥주한잔 하고 자야겠다.



이렇게 사는 게 행복이지. 다들 이렇게 살지 않나?


괜찮아. 괜찮아....


조금씩 커가면서 나도 자유시간 오겠지.


괜찮아, 괜찮아....



바른  가정을 꾸려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와 


맥주한잔의 날카로운 무기를 가슴에 품고  괜찮지 않은 하루를 마감했다.


그렇게 꾸역꾸역 열심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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