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은 휴식의 공간이다. 바깥에서 일을 하고 돌아온 사람들은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해먹은 다음 소파에 앉아 쉬거나 다음날을 위해 일찌감치 씻고 잠에 든다. 집에 있으면 모든 긴장이 탁 풀리고 늘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집에서도 일을 한다면 어떨까? 그곳은 쉬는 곳도 일하는 곳도 아닌 어정쩡한 공간으로 변해버리고 말 것이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온 집안은 일하는 장소가 되었고 거실에서마저뭔가를 하려는 날이 계속됐다. 심지어 쉬러온 여행지의숙소에서조차 비슷한 행동이 반복되고 있었다. 사실, 아직도 어떤 방식이 더 좋은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정해진 시간에 규칙적으로 출퇴근을 반복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지 싶다. 일이라는 것은 좋고나쁨, 힘들고 쉬움보다는 자신에게 더 적합한 형식과 형태를 찾아야하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는 장단점이 있기 마련이므로.
나이 같은 건 의식하지 않은 채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나 역시 어쩔 수 없이 이 땅에 발 붙이고 살아가는 한국 여자였음을 깨닫고 있다. 30살은 결코 적지 않은 나이라고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다. 적어도 자기 한 몸은 책임질 줄 알아야한다는, 그리고 언젠가는 가족으로부터 떨어져 새로운 가정을 꾸려야한다는 은근한 부담감과 책임감이 엄습해왔다. 내게 변화는 항상 설렘보다는 공포와 스트레스에 가까웠다. 언젠가부터 잠을 자도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았고, 팔다리와 마디마디가 아파지면마음도곧잘 약화되었다. 이른바 노화의 징표였다. 세태를 의식할수록 마음은 쉽게 주저앉으려 했고 자꾸만 의존할 데를 찾아다녔다.종종 나도 모르게 주눅이 들고 위축되기도 했다. 조금 쉬었다 하자고,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해놓고서도 얼마가지 않아 불안을 못 이기고 핸드폰을 집어들었다. 그리 거창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이런 저런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글을 읽고 사진을 본다.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휴식이 아니라 나태함으로 느끼다보니 결국 별 의미없는 기계적인 기력 소진만이 반복되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내심 꺼리면서관심이 이런 저런 물건들로 기울고 꼭 필요하지 않은 옷을 사기도 했다. 일시적인 결제로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래보려고 해봤지만, 마음의 정동은 생각처럼 잘 통제되지 않았다.
일에 대한 고민은 수시로 정신을 할퀴고 지나간다. 이것은 나 자신의 존재 가치를 세상에 드러내고 증명해보이는 것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다. 하루에도 몇 번씩 전전긍긍과 심호흡의 양극단을 오갔다. 조바심을 내도 바뀌는 것은 없으니 집착과 욕심을 좀 내려놓자며 스스로를 계속 다독여왔지만 어쩐지 매사에 조급한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뭐가 그리 급할까. 30줄이 가까워져오는데 스스로 떳떳하고 자랑스럽게내세울만한그럴듯한 성과와 결과물이 변변치않아서일 것이다.시작부터 남들의 이목을 신경쓰다보니 마음 편히 진행될리가 만무했다. 중간중간 자괴감도 찾아오고 좌절하며 분노할 때도 많았지만 그 감정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편안하게 생각을 정리하고 기록하려고 시작한 글쓰기조차 언젠가부터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고치고 또 고치고 있었다. 그처럼 나의 자의식에는 파괴적이고 강박적인 데가 있었다. 문장의 토씨 하나하나를 다듬고 나서야 비로소 서투른 듯 투박한 첫 아이디어와 문장들도 원석처럼 충분히 매력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취업을 앞두고 진로를 고민하는 동안 나라는 존재의 수많은 부분이 깨지고 망가졌다. 거기엔 분명 깨지고 고쳐져야만 했던 오만함과 아집이라는 면도 있었다. 나이를 먹은 만큼 보수공사에도 시간이 걸렸다. 물이 언제 끓을까 조급해하는 마음이 멀쩡하게 있던 내용물을 자꾸 냄비 밖으로 넘치게 만들고 홀라당 태워버리기 일쑤였다. 그 물난리로 가족들도 적잖이 애를 먹어 미안하게 생각한다. 여기다 할 말은 아니지만. 하하.
대체 내 생각 속 그럴듯한 업적이라는 게 대체 무엇인가하니, 그것은 타인들의 놀라워하는 시선 혹은 부러움을 사고 끄덕임을 받을만한 어떤 번듯한 직장과 스펙과 커리어였다. 우습고 어처구니없고 한 인간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는, 지극히 세속적인 보여짐에 대한 얄팍한욕망이었다. 현실적으로 누군가의 입지나 능력은 그러한 명함을 통해 단번에 가시적으로 드러난다. '이런 일을 통해 밥값을 하고 있다'는, 세상 속 자기 가치와 능력에 대한 증명이자 인정욕구를 손쉽고 빠르게 충족해주는 수단. 허나 자기효능감은 분명 그것과는 다른 문제일 것이다. 내가 성과를 낸 것이지 성과가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들어간 울타리는 나라는 존재 자체가 아닐 뿐더러 그렇게 될 수도 없다. 잠시 빌려왔다, 혹은 기한을 두고 머문다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세상에 하찮은 일은 없지만 일의 가치와 의미는 각기 다를 것이며 저마다 생각하는 일상 속에서의 비중과 삶에서의 중요도 역시 다를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효능감은 조직이나 주변인들로부터 형성되어서는 안 되리라는 섣부른 판단을 내렸다.
자존감이란, 자아존중이란 그보다 더 내밀하고 본질적인 자기자신으로부터 오는 것이리라. 그것은 수상경력이나 입사 이력 따위로 입증되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중심과 심지가 연약하다면 어딘가의 일원이 되고 난 후에도 이런 저런 영향에 쉽게 흔들리고 울타리의 모양과 색이 나의 정체성인 양 착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개인주의자와 사회적 동물이라는 집합 사이에서 갈등중이다. 그리고 여전히 자기소개에 남겨질, 자본주의를 향한 한 줄 한 줄을 내심 간절히 원하고 또 바라고 있다. 회사는 나를 책임져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서도나를 소속시켜줄 어떤 집단을 찾아 헤매는 마음이 있다. 분명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이 아닌데,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시간들을 견디고 버텨왔는데. 마치 속에 구멍이 난 것처럼,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그 모든 것들이 끝없이 공허하게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느껴진다. 진정으로 내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만 같이. 그래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미식가가 되는 일에 몰두한다. 더 나은 끼니와 간식거리를 찾아섬세한 맛, 더 새로운 맛으로 온갖 상념을 덮어버리고 속을 채우는 행위를 끝없이 반복한다.문득 내가 작물 같은 존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구름이 지나가고 햇빛이 내리쬐려면 기다려야한다. 내가 하나의 씨앗이라면, 싹을 틔우기 위한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안락함과 재미없는 쾌락과 인고의 시간들을 참아내야 한다. 그게 성장통이라고 믿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순간을 견디고 즐기면서. 가끔은 스스로를 방치하다시피 그냥 놔둘 것이다. 대신 싹이 얼마나 올라왔는지 이파리는 싱싱한지 주기적으로 상태를 체크하고, 물을 주고 비료도 부어주어야 할 것이다. 불편한 간섭들에 과자로 마취를 놓으며 기꺼이 견뎌보기로 한다.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디까지 자랄 수 있는지 궁금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