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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13. 2016

'악'을 평가하는 사회

나의 수능 이야기



   인생에서 가장 악한 시절이었다. 고등학교 3학년. 악해져야 악을 쓸 수 있다. 굳은 결심을 하고 머리를 박박 깎았다. 친구도 멀리하고 핸드폰도 없앴다. 그런 몸과 마음으로, 지식을 씹어 삼키고 시험지에 토악질해내는 일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점점 똑똑해지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시험을 치른 지 5년이 되었다. 이제 기억나는 건 거의 없다. 그 시절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도움되는 사실을 배운 게 하나 있다면, 정말 기분이 더러운 상황은 어떤 것을 '아예 모르는 상황'이 아니라, '희미하게 아는 상황'이라는 것 정도. 덕분에 이제는 확실히 아는 게 아니라면 어떤 것도 함부로 안다고 하지 않는다.

   아쉽게도 공부에 큰 재능은 없었다. 그런데도  언제나 실력을 탓하기보다 실수를 탓했다. 시험은 참 버거운 노동이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그렇지만 내가 참 좋아했던,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과목이 있다. 지금은 국어라고 부르는 언어영역이었다.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그걸 읽은 걸까,
정답을 맞히기 위해 그걸 읽은 걸까?


   언어영역 시험은 문학 문제와 비문학 문제로 구성된다. 안타깝게도, 문학을 공부하면서 마음에 드는 시 한 편 읊기 힘들었다. 읽기 좋은 시가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음미할 시간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문학을 즐기는 게 '비효율적'이라면서, 열심히 노력하는, 문학을 음미하지 않는 친구들을 경멸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작품을 음미할 기분이 아니었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이 음식에 단백질은 몇 그램이고 불포화지방산은 몇 그램이 있어서, 건강에 좋으니 마니, ... 자, 이제 먹자. 잠깐, 먹기 전에 다 외웠니?" 하면 배가 고파도 인상을 찌푸리면서 먹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김소월의 '초혼'을 읽으면서 속으로 울었고, 최승호의 '북어'를 읽으며 소름이 끼치기도 했다. 단지, 그 느낌을 표현할 언어가 '내재율', '참여시' 따위밖에 떠오르지 않아서, 도저히 음미할 기분이 나지 않았던 것뿐이다.

   문학보다 더 좋아한 건 비문학이었다. 문학과는 다르게, 지문 하나하나 외우기를 바라는 선생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비문학 문제를 풀면 참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글이 나오는데, 주로 논문에서 발췌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유용한 정보도 많아서 지문을 읽다 보면 '오, 이런 것도 있구나, 알아뒀다 나중에 써먹어야지'하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그런데 문제를 다 풀고 며칠이 지나면 그 정보는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배움의 즐거움을 느끼기 위해 그걸 읽은 걸까, 정답을 맞히기 위해 그걸 읽은 걸까, 하고 한숨을 쉬었다.


경쟁은 아이들을 꼼꼼히 포위하고 악에 받치게 만든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시험을 잘 보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는데, 재능파와 노력파다. 재능파 친구들은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별로 하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유독 시험 점수만 나보다 높았다. 내가 보지 않은 곳에서 열심히 공부한 걸까? 그런 친구들을 볼 때면,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사방을 포위당한 군대는 죽기 살기로 싸운다. 그래서 적을 포위하는 군대는 일부러 약간의 퇴로를 열어둔다. 퇴로가 열린 채로 포위당한 군대는 하나 남은 퇴로 덕분에, 쉽게 사기가 꺾이고 도망칠 생각부터 한다. 재능은 그 친구들이 열어 준 유일한 내 변명거리였다. 애초에 그만큼 재능이 없어 전세를 역전할 수 없으니 이만 물러간다, 하고 나는 내 길을 갔다.

   노력파 친구들은 조금씩 나를 파괴했다. '조금만 더 하면 꺾을 수 있다'는 생각은 나를 더 용감하게, 악하게 만들었다. 포위당한 군인은 물러서지 않고, 자신을 더 부추긴다. 재능과 다르게 노력은 모두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재능이 낮을수록 노력의 단위 가치는 높아진다. 노력은 불공평한 환경을 극적으로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 자유로운 경쟁은 모든 아이들을 꼼꼼히 포위하고 악에 받치게 만든다. 개중에 포위를 뚫고 승리감에 도취되는 아이가 있다. 포위공격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아이도 있다.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수능시험은 모든 수험생에게 선포하는,
"네 미래를 걸고 싸워라"라는 명령이다.


   시험이 끝났다. 하늘이 도왔다. 좋아하는 언어영역에서 만점을 받았다. 다른 과목 점수가 아쉬워서 재수를 고민했지만 도저히 다시 공부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점수에 맞춰 학교를 검색했다. 학과를 소개하는 글은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기 바빴다. 시장에서 새로 나온 물건을 사듯이, 겉모습만 보고 마음에 드는 학과를 고른다. 돈을 내고 입학원서를 얻는다. 번듯한 학과 이름과 몇 페이지의 입학안내 글, 소정의 장학금으로 4년의 미래를 약속했다.

   수능 언어영역의 평가목표 중에 비판적 사고능력이 있다.

"비판적 사고 능력: ‘비판적 사고 능력’이란 언어 표현과 이해의 과정에서 여러 가지 준거에 의하여 분석한 것을 바탕으로 그 정당성이나 적절성 또는 가치 및 우열에 대하여 평가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박종훈, 대학수학능력시험 언어 영역과 국어 능력, 2010)

수능시험도 일종의 언어 표현이다. 모든 수험생에게 선포하는, "네 미래를 걸고 싸워라"라는 명령이기 때문이다. 내 비판적 능력은 시험으로 검증되었으리라 믿는다. 이제, 시험을 비판해보고 싶다. 시험이 선포한 명령은 정당한가? 적절한가? 어떤 가치를 지니는가? 다른 가치보다 우월한가?


이제 결과는 노력을 규정하고,
노력은 인간됨을 규정한다.


   "결과는 노력을 배신하지 않는다." 시험은 어린 열아홉 소년을 전사로 만든다. 다에시(IS)에 가담한 소년병들이 이런 마음일까?

"믿음을 갖고 이주하여 알라의 길에서 그들의 재산과 생명으로 지하드(성전, 성스러운 전쟁)하는 자들은 알라로부터 가장 큰 보상을 받으니 그들이 승리하는 자들이라." (꾸란 9:20)

노력하라,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수능 시험의 명령은 성전을 대하는 이슬람의 명령과 소름 끼치게 비슷하다. 그러니까 이 땅의 모든 수험생은 잔혹한 전쟁에 내몰린 소년병과 다름없다. 피와 살점만 튀지 않을 뿐이다.

   그 명령이 정당하냐, 하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노력이 좋으면 결과가 좋다는데, 뒤집어 말하면, 결과가 나쁘면 노력이 나빴다는 거다. 그런데 그 결과마저도 다른 사람들을 밟고 넘어야만 만족할 수 있는 결과다. 입신양명이라는 숭고한 뜻은 이 처절한 싸움을 성으로 변모시킨다. 성적이 낮은 아이는 입신양명에 실패한 거고, 노력을 안 한 거다. 애초에 천국의 보상을 받을 가치가 없었던 인간이 된다. 이제 결과는 노력을 규정하고, 노력은 인간됨을 규정한다. 더 나은 인간이 되기 위해 경쟁의 링 위에 내던져지는 나이는 점점 낮아지고 있다.

   '적자생존'과 '승자독식'이라는 말은 낭만적으로 잔인하다. 참 부끄러운 일이지만, 수험생이던 시절에는 그 말이 그렇게 멋지게 보였다. 지하철을 타러 가면 종종 대학생들이 입고 있는, 유명한 '브랜드 가치'를 가진 대학의 '과잠바'를 보면서, 내가 그 '적자'였으면, 제발 그 '승자'였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비웃었다. 유명하지 않은 대학교 과잠바를 보면서, 쪽팔리지도 않냐는 식으로 흘겨보면서, 저 대학 사람들은 어떤 행동을 할까 신기하게 쳐다보면서, 저런 사람들도 자랑스럽게 입고 다니는구나, 하고 경멸과 조소와 동정을 보냈다. 나만 그랬을까? 시험에 녹아있는 가치는 승리에 대한 낭만과 동경뿐만이 아니다. 패배에 대한 경멸과 조소와 동정이 함께 있다.

   모든 인간은 자유롭다. 불가침의 권리를 가진다. 훼손되어서는 안 될 인격을 가지고 있다. 어떤 인격도 다른 인격보다 우월하지 않다. 자유는 평등이라는 토양에서 싹트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다른 인격을 훼손할 자유를 갖고 있지 않다. 수험생은 시험을 통해 '불평등은 자연스럽다'는 가치를 체득한다. 경멸과 조소와 동정을 던지면서, 어떤 도덕적 수치도 느끼지 않도록 교육받는다. 이런 가치가, 사랑과 공감보다 우월한가? 시험의 명령은 정당하고, 적절하고, 우월한 가치를 지니는가?


대학은 결코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악해지지 않아도 된다.


   시험 자체가 지닌 문제는 아니다. 평가 없는 교육은 '지식의 전달'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시험은 교육에 임하는 피교육자의 의지를 고취시키는 효과도 있다. 시험이 문제가 아니라 시험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그것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여기는 문화가 문제다. 더 큰 문제는 시장의 논리에 휩쓸린 사회다.

   한 번의 시험으로 전부를 줄 세우는 제도는 '효율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잉태됐다. 대학에는 자리가 없고, 대학에 가려는 사람은 많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소한 자원을 공정하게 분배하는 일이 정의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각자에게 각자의 것을 주는 일'이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분류된 개인이다. 각자의 것은 효용에 따라 분류된 자원이다. 능력에 비례하도록 각기 다른 효용을 지닌 자원을 분배한다. 우리 사회를 구성하는 대부분이 납득하는 논리다. 이 원칙에 입각하면 우리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앞으로 공부를 계속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으로서, 납득할 수 없는 논리다. 대학교육을 '희소한 자원'으로 분류하는 것부터 눈에 걸린다. 고통스러운 연구자의 길을 감수하고 학문의 발전에 진심으로 기여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연구자는 다다익선이다. 학문적 네트워크는 연구자가 많을수록, 그리고 그 연결망이 촘촘할수록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튼튼한 학계에서는 더 많은 가설이 제시되고 검증된다. 교과서나 전공 서적에 우리나라 사람의 이름이 많이 나오면 더 반갑지 않을까? 예를 들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이 '철학'을 이야기하면서 자연스레 한국을 떠올리게 되면 얼마나 좋을까? 따라서 연구자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시각으로 보면 대학은 결코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문제는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관심이 학문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는 사실이다. 대학 졸업장이 학문 외적으로 개인의 영달을 위한 자원, 예를 들면 취업을 위한 수단으로 쓰여서는 안 된다. 연구직이 아니라면 어떤 학위도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학위가 취업에 결정적인 요소라면, 외국어 시험은 왜 보고, 적성검사는 왜 따로 하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학위를 취득하느라 들인 시간과 등록금, 그리고 추가적인 선발과정에 들인 노력을 생각하면, 차라리 중세 유럽의 '도제교육'처럼, 회사에서 직무능력이나 사내 문화를 일찍부터 알려주는 게 그들이 말하는 '효율성'에 더 부합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악해지지 않아도 된다. 윈윈(win-win)이다.




   악한 시절을 보내면서 힘들었던 건 앉아서 공부하는 일이 아니었다. 정말 힘든 일은, 그 무렵이 본격적으로 자아가 형성되던 시기였다는 사실이다. 내가 무얼 하고 싶은지, 무얼 좋아하는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알고 싶었다. "대학 가면 알게 돼, 일단 공부해"라며 잠자코 있으라는 목소리가 너무 싫었다. 정말 그들의 말대로 대학에 오니 알게 되었다. "이런 시험만 없었다면 좀 더 빨리 알았을 거야." 시험을 치르면서 는 건 '악'뿐이다. 어쩌면 시험은, 우리가 얼마나 악해졌는지를 평가하는 게 아닐까?

   경쟁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다. 동물복지를 주장하면서 육식을 하는 게 인간이다. 경쟁이 없는 사회를 꿈꾸면서 경쟁을 할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이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에서 경쟁만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는 거다. 사회는 경쟁을 기초로 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경쟁을 배워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경쟁을 사회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은 것은 어떤 이유일까? 더욱 중요한 또 다른 가치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사회는 단번에 변하지 않는다. 설탕이 물에 풀리듯이, 조금씩 변한다. 물 분자 하나하나가 설탕 분자를 받아들여가면서 물은 설탕물로 변한다. 경쟁에 취한 개인이 모여 경쟁을 신격화하는 사회로 진화했다. 경쟁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이가 늘면 사회는 언젠가 변한다, 변하지 않는 듯이 보여도. 문학작품을 '감상'하라고 교육하면서 '암기'해야 하는 현실이 속상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런 사회는 분명히 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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