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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01. 2016

돈 버는 글 쓰기

그런 거 없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다.
그러나 빵이 없으면 죽는다.


   돈이 전부는 아니다.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니까. 계속 공부를 하며 살겠다고 결심한 것도, 돈을 그렇게까지는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자세히 찾아보면 있으리라, 막연하게 믿으며 살아왔다. "나는 돈을 좋아합니다, 돈 되는 일을 하세요"라던 '능력 있는' 사람의 강연을 경멸하기도 했다. 더 나아가, 돈을 필요 이상으로 많이 버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세상은 제로섬이라던 말에 따르면, 결국 나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이고, 나의 돈은 누군가의 빚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중에야 깨닫게 된 건, 내가 정말 싫어하는 것이 '돈' 그 자체가 아니라, '돈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태도'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돈은 아주 유용하다. 돈은 모든 사물과 행위의 잠재태다. 사람마다 다른 행복의 기준을 하나로 통일한 유일한 도량형이기도 하다. 돈이 전부는 아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보다 훨씬 위대한 존재는 밥 없이도 살 사람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게 아니라던 말은, 돈이 삶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말일뿐, 필요조건마저 아니라는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결심했다, '돈보다 소중한 어떤 것이 있으리라'는 가치관을 유지하는 한, 아주 열심히 돈을 벌어야겠다고.



사람들이 원하는 재주를 부리면,
곰이든 사람이든 돈을 번다.


   경제학을 배우는 친구를 만났다. 투자 전문가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벌써부터 열심이었다. 친구는 돈 버는 방법을 공부하는 학자였다. 지구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시장을 분석하고, 모의 주식투자 대회에도 참가했다. 치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물어보듯이, 돈 버는 방법은 돈 버는 방법을 공부하는 사람에게 물어야 한다. "글을 쓰면서 살고 싶은데, 글로 돈을 벌 수 있을까?" 애초에 글을 쓰는 삶은 돈을 벌 수 없으리라는 믿음이 짙은 물음이었다. 내 편협한 의식 속에 글쟁이는 돈과 거리가 멀다. 글은 물건처럼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지 않는다. 글을 쓰는 일은 물건을 만드는 일만큼 고되지도 않다. 애초에 글쟁이가 글을 통해 돈을 벌 수 있는 자격이 있는지도 궁금하다. 특히나 그 글쟁이가 나라면 더욱 그렇다.


   "돈 버는 방법은 간단해."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바둑의 화점정석처럼 당연한 대답을, 미소와 함께 내놓았다. "사람들이 원하는 걸 해. 그러면 모두가 돈을 줄 거야." 돈은 거래를 통해서만 움직인다. 거래는 수요와 공급이 만나 이루어진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을 하면 돈을 번다. "글을 쓴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글을 쓰면 되겠지." 글은 상품이다. 글을 쓰는 일은 상품을 공급하는 일이다. 글이라고 별다를 것 없이 수요와 공급의 법칙 아래 놓이게 된다. 내용이 어떻든 돈을 버는 형식은 같다. 일단 사람들이 원하는 재주를 부리면, 곰이든 사람이든 돈을 번다. 노래를 부른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노래를 불러야 하고, 그림을 그린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간단한 방법이다.


내가 글이고
글이 나다.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라." 고등학생 시절 풀던 수학의 정석 같다.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하고 싶지가 않다. 왜일까? 일주일 내내 머리에 맴돌았다. 고민 끝에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을 수 있었다. 첫째 이유는,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일을 하라는 명령은, 사람들이 원하는 일과 내가 원하는 일이 갈등을 일으킬 때에도 유효하다. 흔히 들어보았던 말처럼,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는 일이다. 부모님이 내게 주시던 보상은 칭찬이고, 사람들이 내게 주는 보상은 돈이다. 보상을 받으려면 타인의 욕망을 이뤄주어야 한다. 다만, 그곳에 나는 없다. 타인이 주인으로 있는 삶의 결말은 언제나 착한 아이 증후군이다.


   다음 이유는, 내가 남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라는 명령을 따르더라도, 타인의 욕망이 무엇인지부터 모른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하라는 정석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돈에 허덕이는 건, 그 수요가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무인도에서 먼 바다로 구조신호를 보내듯이 재화나 용역을 생산한다. 지나가던 큰 배가 우연히 구조신호를 보듯이, 수요가 공급을 발견한다. 대부분의 공급은 오이디푸스 왕처럼 시장을 떠돌다 굶어 죽는다. 수요가 있는 곳은 결코 알 수 없다. 그저 여기 있겠거니 하고 믿을 수만 있을 뿐이다.


   마지막 이유는, 욕망을 드러내는 일이 흥미롭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욕망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저급하다고 하지만, 그렇게까지 경멸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 마음이 그저 욕망을 드러내는 일을 원치 않을 뿐이다. "네가 원하는 것을 해 줄게"라고 말하는 것은 재미없다.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해, 너도 이게 좋니?"라고 하는 게 훨씬 흥미롭다. 다시 말해, 내가 타인이라면, 내 욕망에 관심 없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게 더 좋다. 좋은 느낌은 타인의 욕망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좇는 사람에게서 더 짙게 풍긴다. 비주류가 주류가 되고, 또 다른 비주류가 다시 주류가 되는 순환구조는 이 이유에서 비롯된다.



돈 버는 일은 노력이 아니라 행운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쓴다.


   "돈이 필요한 공급자는 수요를 찾아 나서야 한다." 자본주의의 대원칙이다. 글을 쓰면서 돈을 벌고 싶다면 사람들이 원하는 글을 써야 한다. 몇몇 언론사는 이 원칙을 충실히 지킨다. '지금을 역사로 남기는 일'을 한다는 점에서, 언론은 '지금의 역사가'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혼합된 언론은 돈, 성, 권력에 편중된 '지금'만을 역사로 남긴다. 가끔은 진짜 '지금'을 왜곡하기도 하면서. 몇몇 책도 이 원칙을 준수한다. 사회 구조의 문제를 두고 개인의 문제라고 말하면서,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듣기 좋은 꾸중과 격려를 보내는 글을 담는다. 이런 언론에, 이런 책에 사람들은 열광하며 돈을 던졌다. 새로운 시장을 개척한 길을 따라, 후발주자는 꾸준히 아류작을 생산해내며 기대수익을 달성한다. 산업이라면 산업이다.


   수요를 만나느냐 만나지 못하느냐는 순전히 우연에 달린 일이다.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실이다. 어차피 우연인데 내가 굳이 좇아다닐 필요는 없으니까. 친구의 명쾌한 경제학 강의를 들으면서, 글로 돈을 벌고 싶은 마음이 강렬해졌다. 사람들이 원하는 글을 쓸 생각은 없다. 나는 내 글을 쓴다. 다만, 마치 잭팟처럼 사람들의 입맛에도 내 글이 맞기를 바랄 뿐이다. 돈 버는 일은 노력이 아니라 행운이다. 내 글에 사람들이 시큰둥하다면? 그럼 어쩔 수 없다. 글로 돈 벌기는 틀려먹은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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