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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Sep 26. 2016

꽃이 아니어도 괜찮아

실존이 본질을 앞설 때, 인권은 빛난다

   수업이 끝났다. 학교가 어둑어둑하다. 아침 여덟 시부터 수업이 있어서, 여섯 시 반에 일어났다. 저녁 일곱 시 반이 되어서야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간다. 집에 가서 얼른 씻고 누워야지, 하고 버스를 타는데 몸에 힘이 없다. 맞다, 저녁밥을 안 먹었구나. 집 가는 길에 편의점 도시락을 사 가서 먹어야겠다, 하고 버스를 내리는데 가득 찬 빨래통이 생각난다. 골목을 걸으면서, 오늘은 정말 힘든 하루네, 하고 한숨 쉬었다.

   가방은 정말 무겁다. 두꺼운 전공책 몇 권이 들어있다. 부모님께서, 귀한 아들 공부에 도움되라고 사주신 보물 1호 노트북도 들어있다. 한 손에는 편의점 도시락이 들려있다. 그렇게 삶의 무게를 느끼면서 자취방이 있는 건물로 들어가려는데, 건물 현관 앞에 나이 드신 아주머니, 혹은 젊으신 할머니 한 분이 자기 몸보다 큰 여행가방을 세워두고 발을 동동 구르며 서 계셨다.

   “도와드릴까요?”

   “아이고, 학생! 여기 살아요?”

   “예.”

   “아유, 다행이다. 우리 아들이 여기 살아서, 짐 좀 전해주려고 왔는데, 비밀번호를 눌러도 문이 안 열려. 아무래도 우리 아들이 틀린 번호를 알려준 것 같은데, 혹시 학생, 문 좀 열어줄 수 있을까?”

   현관을 통과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해야 한다. 그냥 입력해서는 들어갈 수 없다. 열쇠 그림이 그려진 ‘PASSWORD’ 버튼을 누른 뒤에 비밀번호 숫자를 입력하고 ‘#’(우물정) 버튼을 눌러야 문이 열린다. 아드님이 알려주었다는 번호를 보니 틀린 번호는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조금만 더 친절했으면 아주머니께서 이렇게 기다리지는 않았을 터였다. 아드님도 억울하겠다. 맞는 번호를 알려줬는데 그 약간의 친절이 모자라 아주머니께 죄송할 테니까.

   버튼을 누르면서, 문 여는 법까지 알려드려야 하나, 하고 잠깐 고민했다. 아주머니께서는 문만 열어 달라고 하셨지만, 문 여는 방법까지 자세히 알려드리기로 했다. 비밀번호를 알려 드린 아드님이 못 다 이룬 친절을 이뤄주고 싶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자취방까지는 꽤나 경사가 있다.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멘 채로 걸어올 때면, 약간 숨이 찰 정도로 멀고 높다. 그런 집까지, 자기 몸보다 더 큰 여행가방을 밀고 끌면서 오셨을 아주머니가 그려졌다. 처음 오셨으니 당연히 중간중간 서서, 어느 건물이려나, 하고 숨도 돌리셨겠지. 우리 어머니도 그러셨겠지, 하면서 문 여는 방법을 자세히 알려드렸다.


   “… 이렇게 하시면 열려요.”

   “아유, 학생, 진짜 고마워. 학생 아니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몰라. 학생은 몇 층 살아?”

   “저는 1층 끝 방에 살아요. 아드님은요?”

   “그래요? 우리 아들은 3층 살아. 덕분에 고마워요, 학생.”

   3층? 다시 한번, 잠깐 고민했다. 오늘은 너무 힘든 날이어서 빨리 쉬고 싶다. 그런데 나보다 더 힘들게 오신 아주머니를 두고 갈 수는 없다. 게다가 4층짜리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다. 계단이 살짝 높기도 해서, 무거운 짐까지 들고 있다면 올라가기 쉽지 않을 것이다. 안 도와드릴 수 없다. 아예 못 쉬는 것도 아니고, 조금 늦게 쉬는 건데 뭐. 아주머니를 보고 우리 어머니 생각까지 했으면서 집으로 들어가 버리다니, 하고 입을 열었다.

   “아주머니, 3층까지 들어드릴게요. 여기 생각보다 높아요.”

   “에? 아냐, 학생. 괜찮아!”

   “저도 괜찮아요.”

   보기보다 짐은 가벼웠다. 초등학생 아이 한 명 안아 올리는 정도의 느낌이었다. 그런데 부피가 커서 벽이나 난간에 걸릴뻔했다. 내가 안 도와드렸으면 힘에 부치셨을 게 분명하다. 계단 하나하나, 뿌듯하게 올라갔다. 그것 조금 운동했다고 이마에 땀이 맺혔다. 활짝 웃으며 인사를 드렸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때, 우리 만남은 빠르게 끝났어야 했다.


   “아유, 학생, 정말 고마워! 서울대 다니지?”


   나는 혼자 산다. 2호선 서울대입구역 근처에 산다. 6번 출구로 나와서 한 5분쯤 골목골목 걸어가다 보면 우리 집이 나온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숭실대학교 학생이다. 7호선 숭실대입구역 근처에서 살았다면 참 좋았을 텐데, 어쩌다 보니 이렇게 산다. ‘서울대입구역’에 사는 사람답지 않게, 내 자취방에서 서울대학교를 가는 길보다 숭실대학교를 가는 길이 더 짧다. 버스로는 다섯 정거장, 걸어가면 여유 있게 30분이다. 서울대학교는 버스로 네 정거장이지만 높은 관악산 고개가 있어 걸어가면 너무 힘들다.

   아주머니께서는 별 생각 없이 물어보셨을 게다. 내가 ‘서울대입구역’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가까운—사실 그렇게 가깝지는 않지만— 서울대학교에 다니겠거니, 하셨을 게 분명하다. 단지, 낯선 이에게 베풀어준 호의가 고마워서, 우리의 만남이 옷깃만 스친 인연처럼 아무 표정 없는 만남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가볍게 꺼낸 말씀일 게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생선구이를 먹다가, 생선구이를 삼키고 다시 밥 한 숟갈을 뜨려 하는데, 얇은 가시가 목에 걸렸구나, 하는 것처럼, 불편하다.

   공부도 잘하는데 예절도 바르기까지…! 아주머니의 눈빛을, 기대를, 도저히 외면할 수가 없다. ‘어느 학교 다녀?’가 아니라 ‘서울대 다니지?’ 하고 물으시는 말투에서 느껴졌다. 다시 수능 시험을 치르고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야 하나. 내가 서울대학교 학생이 아니어서 죄송했다. 그냥 서울대학교에 다닌다고 해야 할까? 방금 받은 호의가 숭실대학교 학생의 호의가 아니라, 서울대학교 학생의 호의라면 서로 민망하지 않고 더없이 완벽했을 게다. 그런데 아쉽게도, 나는 숭실대학교 학생이다. 아주머니의 생각에 취소선 두 줄을 긋고, 무언가 다른 말로 고쳐드려야 한다. 나는 아직 미소를 잃어서는 안 된다.


   “저는 숭실대학교 다녀요.”

   “아,…,”

   잘못 고쳤다. ‘아’ 뒤의 ‘…’ 하는 잠깐의 시간에서 모든 것을 깨달아버렸다. 공부도 잘하는데 예절도 바르기까지, 에서, 공부는 조금 못하지만 예절은 바르네, 로 고쳐졌다는 사실이, 갈 곳 잃은 시선과 주저하는 입술에서 드러났기 때문이다. 나까지 당황해서는 안 된다. 좋은 의도에서 시작해 좋은 행동으로 꽃 피운 우리의 대화는 어떻게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좋은 기분으로. 아직 입꼬리는 활짝 핀 채 떨리고 있다.


   “우리 아들이 서울대 다녀서, 학생도 서울대 다니는 줄 알았지—,”

   아하, 여기서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죄송합니다만 아주머니 아들이 아니어서요, 이건 싸우자는 말이다. 집이 같다고 학교까지 같으라는 법은 없죠, 너무 냉소적이다. 숭실대도 좋은 학교예요, 이건 좀 비굴한 느낌이 든다. 숭실대 학생도 도와드릴 줄 알아요, 이렇게 설명해 드린 들 소용이 있을까?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그런데 지금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어야 할까?


   “숭실대는,”

   설마,


   “어디에 있어?”

   맙소사.


   “가까워요.”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말 뿐이다. 꼬리를 자른 도마뱀처럼 말을 남기고, 1층으로 황급히 내려갔다. 입꼬리는 힘겹게 귀를 부여잡고 있었다. 불편한 이 마음은 어디서부터 왔을까? 학벌주의에 대한 과민반응일까? 원래부터 내 마음 안에 자리하던 패배감일까? 서울대 다니는 아드님이 부러운 걸까?

   쫓기듯 집에 들어와 가방을 내렸다. 가방에, 아들을 위해 부모님께서 사 주신 노트북이 들어있다. 문 밖에, 아들을 위해 짐을 옮기시는 다른 이의 어머니가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이름을 붙인다. 이름이 없는 존재는 부를 수 없으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내게 와서 꽃이 되듯이, 이름이 있어야 아이는 세상에 나타난다. 이름을 부르는 일을 ‘본질’이라고 부른다. 본질이 있어야 존재를 알 수 있다.

   반면, 실존은 ‘나,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름이 없어도 나는 있다. 출신을 몰라도 사람을 사귈 수 있다. 어느 학교 학생인지 알지 못해도 호의를 베풀어준 사람에게 감사할 수 있다. 본질은 그 사람을 기억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름을 불러주어야만 내게 와서 꽃이 되는 건 아니다. 아니, 정말 그 존재가 좋다면, 굳이 그 존재가 꽃이 되어야 할 이유는 없다. 그의 몸짓만으로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진짜 사랑꾼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실존철학자 사르트르는 이렇게 말한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사랑을 ‘아가페’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가페는 신만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도 ‘아가페’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아가페는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때에만 가능하다. 사랑 앞에서 본질은 조건이 된다. 조건 없는 사랑은 사랑받는 존재를 ‘너, 그 자체’로서 이해할 때에만 가능하다. 이름을 불러야만 겨우 꽃이 되는 관계에서는 아가페가 있을 수 없다. 몸짓만으로도 기쁨에 겨워 안아줄 수 있는 관계에서만, 이 아가페가 뿜고 솟는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특히 가족들은, 내가 무엇이 되든 나를 사랑하리라고, 나는 믿는다.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나에 대한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떠어떠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이어서’ 좋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질문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라고 묻는 질문이다. 실존에 대한 사랑을 설명하려 들면 본질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본질을 통해 사랑을 설명하고 나면 본질은 실존을 삼키고 사랑의 의미를 퇴색시킨다.

   “너는 그 사람을 왜 사랑하니?”

   “음…글쎄, (한참 생각하다가) 되게 좋은 사람이야. 나한테도 잘 해주고.”

   “그럼 너한테 잘 안 해주면 안 사랑할 거라는 말이네?”

   “…?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실존은 보편적이고, 본질은 특수적이다. 나는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 하지만 ‘화장실에 들어가는 나’도 나고 ‘화장실에서 나오는 나’도 나다. 한 경우만 보고 너는 항상 급하다고 나무라거나, 너는 항상 느긋하다고 나무라면, 나는 억울하다. 존재에 대한 본질은 밤하늘의 별처럼 무수히 많다. 만약 ‘나’의 본질이 하나뿐이라면, 그 넓은 자기소개서 빈 칸에 쓸 수 있는 말은 한 단어밖에 없을 게다.

   아주머니 앞에서 ‘저는 숭실대학교 다녀요’라고 했을 때, 방점은 ‘숭실대학교’가 아니라 ‘저’에 찍혀있었다. 아주머니의 말에서 불쾌감을 느낀 이유는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아니었다. 내가 ‘숭실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나를 ‘그저 숭실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으로밖에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보였기 때문에 속이 상했다. 나는 ‘숭실대학교에만 다니는, 그것 아니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고, 늦바람이 불어 공부를 좀 더 깊이 하고 싶어 한다. 어느 대학교 학생이라는 말이 이런 내 모습을 설명할 수 있을까? 내가 도와드린 아주머니께서 학교를 물어보시니 대답할 게 학교밖에 없었지만, 할 수 있는 말이,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았다.

   본질은 실존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종종, 아니 자주, 눈에 보이는 것은 본질뿐이라 실존을 깜빡하기 쉽다. 실존은 달이고 본질은 손가락이다. 다른 사람에게 달을 알려주려면 손가락으로 가리켜야 한다. 그러나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게 손가락이라서 조금만 주의를 잃으면 손가락만 바라보게 된다. 물건을 대할 때에는 손가락만 보아도 별 문제가 없다. 의자의 본질은 ‘앉기 위한 도구’다. 의자를 다른 용도로 쓰면, 우연히 아주 좋은 방법을 발견한 게 아닌 이상, 불편할 수밖에 없다.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의자는 앉는 데 쓰는 게 가장 좋다. 의자의 본질은 의자의 존재 이유, 다시 말해 의자가 탄생한 목적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은 의자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본질은 존재를 규정한다. 존재가 본질에 매몰되면, 본질은 존재의 정답이 된다. 누구든지 의자를 보면 그 위에 ‘앉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존재가 본질대로 행동하기를, 본질대로 대우 받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은 태어난 이유가 없다. 목적이 없는 존재다. 내가 글쓰기를 한다고 해서, 넌 글쓰기를 위해 태어난 사람이야, 라고 하는 건 너무 가슴이 아픈 말이다. 그럼, 내가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면 버려져도 괜찮은 존재인가? 나는 이렇게 태어났으니까 글쓰기만 해야 하는가? 모두 틀렸다. 존재의 이유를 찾지 않아도 아끼고 사랑해야 하는 모든 것은 ‘존엄하다’고 표현한다. 누구에게도 그가 가진 본질에 따라 사랑받을 가치를 판단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은 그 존재 자체로 사랑받아야 마땅하다. 그래서 사람은 존엄하다.


   그러나, 우리의 존엄은 우리의 일상에서, 우리를 규정하는 본질에 가려, 아주 손쉽게 무시당한다.

   “그것은 의자니까 그 위에 앉아야지.”

   “너는 여자니까 이렇게 행동해야 해.”

   “너는 장애인이니까 이런 대우도 참아야 한다.”

   “너는 소수성애자니까 그 행동은 하면 안 돼.”

   “너는 이 학교 학생이니까 이 정도는 해 주어야지.”

   “너는 저 학교 학생이니까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할 거야.”

   존엄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인정하는 것이다. 내가 존엄하다고 아무리 주장해봐야 아무도 인정하지 않으면 존엄할 수 없다. 의자와 십자가 모두 나무로 만든다. 하지만 교회에서 의자는 신성하지 않고, 십자가는 신성하다. 십자가를 매고, 들고, 걸고, 의지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교회에 있는 모두가 십자가를 그저 물건이 아니라, 좀 더 높은 의미를 갖는 무언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십자가는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이라는 ‘본질’을 이기고, 교회 사람들 앞에 ‘실존’한다.

   사람은, 적어도 십자가보다는 더욱, 신성하고 존엄하게 인정받아야 한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 살고 있다. 그들의 본질은 여자, 장애인, 소수성애자, 서울대 학생, 숭실대 학생, …, 그리고 또 셀 수 없이 많은 어떤 것들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본질은 세상에 나와 그가 기거하는 존재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 눈 앞에 그들의 본질이 보이니까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하고 항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람은—심지어 나무로 만든 십자가도 그러한데…!— 본질을 이기고 다른 사람들 앞에 실존해야 한다. 모든 사람들이 본질 저 너머에 가려진 실존을 보아야 한다.

   존재를 파악하는데 본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 ‘나’다. 나에게 내 존재는 본질에 가릴 일이 없다. 본질을 들어가며 설명하지 않아도, 나는 있는 그대로 내 존재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받아들이듯이,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인다면 어떤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본질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나 아닌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도 힘들다. 하지만 본질의 도움을 받아 존재를 이해하는 일이 문제가 아니라, 본질에 매몰되어 존재를 옥죄는 일이 문제다. 인권을 둘러싼 여러 문제는 실존이 본질을 앞서지 못해 발생한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때, 모든 사람의 행복추구권은 침해받을 일이 없다.


   시작은 가벼울수록 좋다. 내가 겪은 이 작은 이야기에서, ‘인권을 침해당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아주머니를 ‘인권침해자’라고 나무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저 나 혼자 부러웠고, 부끄러웠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부러움과 부끄러움은 여성 인권, 장애인 인권, 소수성애자 인권 등 여러 묵직한 인권 문제들과 맥을 같이한다. 본질이 실존을 삼켜버려서, 내가 부러워했고 부끄러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여성도, 장애인도, 소수성애자도, 그 밖에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거나 스스로를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본질이 어떻든 사람은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학벌에 관한 문제는, 인권문제라고까지 확대 해석할 의도는 없지만, 모두가 공감하는 문제다. 학벌에 따라 고용 기회나 임금에 차별을 두는 일처럼 눈에 보이는 문제로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경쟁에 대한 피로감을 느끼는 일 같이 눈에 보이지 않는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누군가는 노력이 부족해서 그렇다고 하고, 누군가는 사회가 잘못되어서 그렇다고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괴로움을 부족한 개인의 노력이나 잘못된 사회의 구조에 탓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를 조건 없이 사랑하면 된다. 모든 사람이 실존할 수 있게 도와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를 사랑하듯이 너를 사랑해야 한다. 꽃이 아니어도, 몸짓만으로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꽃이 아니어도 괜찮은 모든 이들에게,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로우며 그 존엄과 권리에 있어 동등하다.* 그리고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 세계 인권선언 제1조

** 대한민국 헌법 제11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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