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려도 좋으니
나는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아는 체를 참 좋아했다. 덕분에 어느 질문이든 막힘없이 대답했고, 그 애가 참 똑똑하다더라, 하는 소문이 동네에 퍼졌다. 원래 어린 아이에게는 지금 그 아이가 대답한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 대답이 맞는지 틀린지는 관심 밖에 있는 법이다. 그래서 동네 아주머니들이 우리 집에 놀러오실 때면, 미취학 교수의 강연이 종종 열리곤 했다.
아직도 기억나는 강연 주제는 ‘아기는 어떻게 생기는가’였다. 아기를 낳아보기까지 한 수강생들에게 어린 교수는 이렇게 선언했다. “천둥번개가 치는 날 밤, 여자랑 남자가 손을 잡아야 아기가 생겨요. 그래야 난자와 정자가 만나거든요.” 아기가 생기려면 난자와 정자가 만나야 한다는 지식은 있었으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그 난자와 정자가 어떤 과정으로 만나게 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아주머니들은 깔깔 뒤집어졌고, 나는 그 반응을 경탄과 존경으로 받아들였다.
중학교에 들어갔다. 나의 아는 체는 위기를 맞았다. 꽤나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회 선생님이 던진, 틀린 개수대로 맞는 거야, 라는 짖궂은 제안을 덥썩 물었다. 나는 몇 문제를 틀렸고, 정신이 번쩍 들게 빠따를 맞았다. 아는 체도 지식이 있어야 좀 할텐데, 오랜 기간 경탄과 존경에 취한 탓에 지식을 게을리 쌓아 발생한 불상사였다. 그 때 이후로, 아는 체는 때때로 고통을 부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아는 체를 그만두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는 체에 경탄과 존경을 던질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요즘은 아는 체가 그립다. 머리는 지식으로 가득찼는데 생각이 없다. 어느새 외우는 공부에 젖어버린 걸까? 조금이라도 ‘문제’다 싶으면 컴퓨터가 된다. 하드디스크를 뒤져 파일을 찾아내듯이, 지식 속에서 ‘답’을 찾으려고만 한다. 진짜 큰 문제는, 이제 문제 나간다, 풀어봐, 하는 말이 없으면 그게 ‘문제’라는 생각도 못한다는 사실이다. 섣불리 손 들기를 주저한다. 논쟁이 사라진다. 수업은 교수의 원맨쇼가 된다. 가슴이 먹먹하게 고요하다.
지식이 쌓였으면 이제는 써먹자. 10년도 넘게 해온 암기, 이제는 질릴 때도 됐다. 지식을 써먹는 일은, 지식을 토해내 시험지에 옮겨 만점을 받아내는 일이 아니다. “아이가 생기려면 난자와 정자가 만나야 한다”는 사실에 “천둥번개가 치는 날 밤에 손을 잡아야 한다”를 덧붙이는 게 지식을 써먹는 일이다. 맞든 틀리든 일단 한 번 던져보는 거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에게 맞는지 틀린지는 관심 밖이다. 대답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법이다. 아는 체는 생각의 원동력이고, 지식에 생각을 붙여 숨결을 불어넣는다.
그러니까 인문학은 아는 체에서 시작한다. 특히나 철학(Philosophy)은 지혜(Sophia)에 대한 사랑(Philia)이다. 아기를 사랑하는 어머니는 아기가 보이면, 안아주랴 입맞추랴, 좀처럼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지혜를 사랑하는 모든 이는, 자기가 아는 말이 나오면, 생각하랴 말하랴, 좀처럼 조용히 있을 수 없다. 아는 것에 생각을 붙여 말하는 일, 그게 바로 철학이다. 철학을 하기 위해 모두가 철학을 전공할 필요는 없다. 자기모순만 피한다면, 아는 체 하는 수준으로도 충분하다.
철학하고 싶다면, 당신은 읽고 생각하라. 그리고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든지 말하라. 그게 바로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