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음과 함께 인간은 부품이 된다
나는 버스를 애용한다. 지하철보다 느려도 버스가 좋다. 지상으로 나와 철교를 건너는 경로가 아니라면 굳이 버스를 탄다. 버스를 타면 눈과 마음이 시원하다. 버스가 다가온다. 먼 발치에서부터 버스가 보이면, 나는 기대감에 부풀어 지갑을 꺼내든다. 구르듯이, 투박하게 버스가 멈춘다.
‘삐-’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열린다. ‘삡’ 기계음이 들리고 나는 승객이 된다.
나는 앞자리를 좋아한다. 가장 좋아하는 자리는 오른쪽 앞 바퀴에 있는 자리. 그 다음은 운전석 바로 뒷자리다. 그 두 자리가 아니라면 다른 자리들은 도토리 키재기다. 정말 무릎이나 어깨가 으스러질 것 같은 날이 아니라면 노약자가 없어도 노약자석은 비워둔다. 거긴 내 자리가 아니라는 느낌이 있어서, 사람이 없더라도 빼앗아 앉는 느낌이 든다. 오늘은 다행히 내 자리가 비어있다.
오른쪽 앞자리에 앉으면 기분이 참 좋다. 눈 앞에 풍경이 영화처럼 흐른다. 나도 스마트폰을 잠시 놓고, 감사히, 풍경을 감상한다. 조교모자처럼 빨갛게 빛나는 신호등 앞에 자동차들이 3열 종대로 줄 서있다. 납작 엎드려 배기음을 자랑하는 오토바이 조종사가 그들 사이를 가른다. 저 앞에는 자그마한 강아지가 기쁨에 겨워 횡단보도를 질주한다. 주인도 웃으며 강아지를 좇는다. 가을날이 참 시원하다.
“이번 정류소는…” 이제 곧 내린다. 앞자리에서 뒷문은 멀다. 정류소에 도착하기 전에 넉넉히 일어난다. 조금 흔들리지만 지금쯤 일어나야 한다. 어릴 적 놀던 정글짐 같은 플라스틱 봉을 붙잡고 몸을 가눈다. 한 손으로는 아직 봉을 잡고 있다. 반대 손을 뻗어 버튼을 누른다. ‘삐-’ 기계음이 들리고 정차를 요구한다. ‘삡’ 기계음이 들리고 버스가 멈추기를 기다린다. 풍경이 아쉬워 다시 한 번 앞을 본다.
어라? 내가 앉은 의자 뒤에 경고문이 있었다. 노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정류소에 정차하기 전에 절대 일어서지 마십시오.”
라고 쓰여있다. ‘절대’라는 단어만 빨간 색이다. 정말로 절대 일어서면 안 될 것 같은 경고문이다. 그런데 이것 참, 아직 버스는 멈추지 않았고, 나는 벌써 일어서 버렸다.
법과 도덕은 강제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둘 다 명령이라는 점에서 형식은 똑같다. 강제성이 없으니 버스에 붙은 경고문은 도덕의 수준에서 끝나려나. 도덕적인 사람을 보고 선량하다고 한다. 그게 아니라면 불량하다. 그렇게 나는 불량한 인간이 되었다.
작년 봄쯤이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탔다. 그때도 내가 좋아하는 오른쪽 앞바퀴 자리였다. 퇴근시간이라 도로는 꽉 막혔고, 버스는 가다서다를 반복했다. 한 노선만 3년째 이용하다 보니 그 버스 회사 기사님들이 대체로 눈에 익었다. 그 버스에는 내가 꽤나 좋아하는 기사님이 운행하고 계셨다.
버스에 오를 때면 나는 공손하게 인사한다. 기사님들은 대체로 심드렁하게 받아주신다. 심지어 어떤 기사님은 눈을 움직이는 것도 귀찮다는 듯이, 전방에 눈동자를 두시고는, 예-, 하고 건성으로 대답하시기도 한다. 그런데 그 기사님은 참 반갑게 맞아주신다. 탑승하는 승객마다 인사를 받아주시고 건네시기도 한다. 운전도 어찌나 부드럽게 하시는지 앉아있다 보면 잠이 절로 온다. 이번 하굣길도 편안하겠네, 하는 생각으로 편하게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운전이 험악했다. 출발할 때마다 버스가 화를 낸다. 신호가 바뀌어도 빨리 출발하지 않는 앞차를 보시고는 경적을 때리신다. 끼어드는 차를 보시고는 급하게 핸들을 꺾고 급브레이크를 밟으면서 혼잣말을 뱉어내신다. 오른쪽 앞자리에서는 기사님의 모든 것이 보이고 들린다. 핸들은 어떻게 트는지, 발은 어떻게 움직이는지, 시선은 어디에 가있는지, 혼잣말로 무슨 말을 하는지까지, 말 그대로 일거수 일투족이 드러난다. 그날은 그의 분노가 그대로 드러났다.
드디어 회사에서 한 소리 들으셨구나. 이 기사님에게 유일한 문제가 있다면 ‘간격’이다. 운전석에는 내 버스가 어디쯤 있는지 나타내는 기계가 설치되어 있다. 지도까지는 아니고, 앞버스까지 몇 분, 뒷버스로부터 몇 분 거리에 있다는 정도만 나타낸다. 이 기사님은 너무 인간적인 나머지 매번 정류소를 늦게 떠난다. 언젠가는 문제가 되겠구나 싶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오늘 아주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나셨다.
불편한 하굣길에서 내 시선은 길을 잃었다. 그날 이후로, 이제 그 버스 노선에는 인간적인 기사님이 한 분도 없다. 이제 그 노선의 모든 버스는 사람이 없어 보이는 정류소를 빠르게 지나친다. 정류소를 향해 필사적으로 뛰어가는 내 면전에서 사정없이 문을 닫고 출발하기도 한다. 내가 서둘러 하차를 준비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이때부터다. 조금이라도 늦게 정차버튼을 누르면 꼼짝없이 다음 정류소에 내려야 한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미리 내릴 준비를 한다.
그런데 이렇게 선량한 내 습관이 불량하다니. 그 경고문은 아마 회사에서 만들었을 게다. 붙인 사람은 기사님이었겠지. 경고문을 붙이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작년 이 계절이었다. 전라도 광주에서부터 기차를 타고 다녀와 피곤에 절어 있었다. 서울역에서 택시를 잡았다. 포근한 재즈 음악이 흘렀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 앉아있는 기분이었다. 얼마쯤 갔을까 택시는 강변북로를 달리고 있었다. 살짝 눈꺼풀이 무거워지려던 찰나, 기사님이 먼저 말씀을 꺼내셨다.
“옷이 멋지시네요.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하하, 예. 감사합니다. 일이 있어서 지방에 다녀왔습니다.—”
택시를 타면 가끔 일장 연설을 듣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때마다 나는 나름대로 성실히 대화를 받아드리는 편이다. 정말 흥미로운 이야기인 경우도 아----주 가끔 있다. 그러나 경험 상 기사님께서 살아오신 이야기—에서 거의 매번, 너도 이렇게 살아라, 혹은 살지 말아라, 하는 명령으로 넘어간다—이거나 자기가 싫어하는 정치인 이야기가 대부분이다. 그래도 온종일 차 안에 갇혀 있으면 얼마나 심심하실까. 나는 성실한 말동무가 되어 드린다.
연설가 기질이 다분하신 기사님들은 대체로, “(거의 출발하자마자) 대학생이에요?”라거나, “(라디오에서 어떤 말이 나오자마자) 요즘 사람들은 말이야, …”로 대화를 시작하신다. 그런데 이번 기사님은 무언가 다르다. 말머리가 독특하다. 피곤하긴 해도 흥미롭다. 노래도 너무 좋다.
“— 노래가 참 좋아요. 재즈 좋아하세요?”
“하하, 좋아하는 것까진 아니고요. 그냥 하나씩 들어보는 중이에요. 노래 틀어 놓으니까 손님들도 좋아하시고 해서, 하하. 손님, 백미러로 뒤에 잠깐만 보실래요?”
“오와….”
저녁노을이 타고 있었다. 붉다고 해야 하나. 분홍색 같기도 한데 보라색도 있다. 마땅한 형용사를 찾지 못했지만 아무튼 감동적인 하늘이었다. 감각에 압도된 존재는 언어를 잊기 마련이다. “오와…”처럼 아무런 의미도 담지 않은 소리 말고는 낼 수 있는 소리가 없었다.
“저는 제 직업이 참 좋아요. 날마다 이렇게 좋은 음악 들으면서 이렇게 좋은 손님들과 드라이브하잖아요. 오늘은 하늘까지 완벽하네요.”
그 순간, 나는 완벽한 날, 완벽한 음악과 함께, 완벽한 사람이 모는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하는 완벽한 사람이었다. 아쉬운 목적지에 이르기 전까지 많은 이야기를 했다. 조금 먼 길로 돌아가도 기사님을 탓하지 않을 만한, 더없이 인간적인 드라이브였다.
기계는 수많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의 부품에는 규격이 있다. 정해진 크기에 꼭 맞아야만 한다. 규격에 맞지 않는 부품을 ‘불량’이라 부른다. 버스 시스템은 일종의 기계다.
버스 기사에게 인간적인 드라이브는 과분한 걸까?
글쎄.
‘삐-’ 기계음이 들리고 문이 열린다. 땅에 발을 내딛으며, 나는 인간이 된다.
‘삐-’ 기계음을 남기고 버스는 오늘도 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