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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재영 Oct 22. 2016

너를 갖고 싶다

다시 만난 솜덩이

   가로등이 검은 골목을 주황빛으로 물들였다.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면서 동네를 걷고 있었다. 솜덩이와 재회했다. 부쩍 자랐다. 이제는 제법 턱도 발달해 사냥꾼 같다. 귀여운 아기 고양이는 희미해졌다.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거울을 볼 때 느끼던 기분이 떠올랐다. 아이 티를 벗었지만 어른은 아니다. 그런데 날개 같이 큰 귀가 여전하다. 솜 같이 흰 털도 그대로다. 애처로워 보이는 것 또한 변함없다. 누군가 먹다 버린 치킨 상자를 뒤졌나보다. 흰 봉지를 앞에 두고 닭뼈를 씹고 있었다. 배가 고파 보였다.


   “잡지에 글까지 썼는데, 한 턱 내야 하지 않겠어?”


   여자친구를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가던 길에 솜덩이를 다시 만났다. 가여운 사냥꾼은 아직도 뼈다귀를 씹고 있었다. 집에서 먹다 남긴 치킨을 줘도 될까? 검색해보니 닭뼈를 삼켜서 토했다는 글이 있었다. 게다가 사람이 먹는 음식에는 소금기가 많아 고양이가 붓는단다. 염지 처리를 거친 치킨은 안 된다. 집으로 가지 않고 곧장 편의점으로 향했다. 걸음을 재촉했다. 천구백원 짜리 통조림 먹이를 샀다. 참치와 연어가 섞여 있다. 치킨은 만 구천원이다. 가격은 인간의 시각이다. 고양이 먹이는 치킨보다 열 배나 하찮다. 그러나 솜덩이에게는 열 배도 넘게 귀하다.


나는 좀 더
이기적이기로 했다.


   예전처럼 어리고 여린 솜덩이가 아니었다. 입을 다칠까 종이컵을 따로 구하지는 않았다. 캔에 그대로 주되 먹기 힘들어 보이면 검은 봉지 위에 털어 놓기로 했다. 솜덩이가 있던 곳으로 돌아왔다. 방금 전까지 씹고 있던 닭뼈만 흩어져 있다. 무언가에 놀라 달아났구나. 자세를 낮춰 근처에 서있는 자동차 밑부터 살폈다. 첫 번째 차는 허탕이었다. 그 뒤에 서있는 차 밑을 살폈다.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았지만, 검은 덩어리가 웅크리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가로등에 비쳐 눈이 빛났다. 아, 솜덩이다.

   솜덩이는 앞 바퀴와 범퍼 사이에 엎드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캔 뚜껑부터 땄다. 솜덩이가 은신한 자동차 앞에 먹이를 뒀다. 먹이를 두려고 몸을 숙이면서 솜덩이가 내는 소리를 들었다. 낮게 그르렁 대면서 나를 경계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기억했고, 솜덩이는 나를 잊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쉽게 잊는 법이다. 뇌가 자라면서 뇌세포가 분열해 기억이 사라진다는 설명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정체성은 가치관 기억으로 이루어진다. 어린 존재는 성장하면서 가치관이 바뀐다. 몇몇 기억도 잃는다. 그래서 성장은 다른 존재가 되는 일이다. 솜덩이가 성장할 수 있다면, 나를 잊어도 좋다.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면서 차 아래로 캔을 밀어 두었다.

   두고 나서 보니 여긴 썩 좋은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썩 좋은 자리이기도 하다. 어두운 차 아래에 먹이를 두면 나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 좋지 않다. 그러나 어두운 차 아래이기 때문에 솜덩이의 경계심을 늦추기에는 좋다. 아직 솜덩이는 숨어있다. 호기심과 경계심 사이에서 나는 좀 더 이기적이기로 했다. 캔을 옮겨 맞은 편 가로등 아래에 두었다. 나는 다섯 걸음 쯤 옆에 앉았다. 좀처럼 오지 않았다. 열 걸음 옆에 앉기로 했다. 마음과 마음이 줄다리기를 하는 모양이었다. 뒷 바퀴쪽에서 흰 몸에 검은 얼룩이 난 솜덩이 어미가 슬그머니 기어나왔다. 솜덩이도 그 뒤에 숨었다. 세 걸음 쯤 나오더니 머뭇거린다.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너를 갖고 싶다.
네게 행복을 주고 싶다.


   결심했는지 어미가 먼저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화들짝 어미의 꼬리가 곤두선다. 고개를 돌린다. 어미의 눈이 밝게 타오른다. 적막한 골목에 굉음이 울린다. 멀리서 차가 달려온다. 위험해. 화가 난 자동차는 눈에 불을 켜고 골목을 질주한다. 골목이 밝아진다. 골목은 밝아지기도 하고 어두워지기도 한다. 전조등은 모두가 바라는 곳을 비추지 못한다. 사람의 욕망은 전조등으로 나타나 그가 보려는 곳만 비춘다. 전조등에 적응해버린 내 망막은 차 밑을 식별하지 못한다. 찰나의 순간에, 솜덩이의 생사는 불확실성 아래 놓인다. 슈뢰딩거의 자동차가 골목을 휩쓴다. 솜덩이는 지금 살아있기도 하고 죽어있기도 하다.

   어두운 가로등에 눈이 적응할 때쯤이었다. 차 아래에서 어미가 뛰쳐나왔다. 살아있구나. 반가웠다. 허겁지겁 캔을 삼킬듯이 먹이를 씹고 삼킨다. 솜덩이도 안달이 나서 뛰어 나온다. 몸만큼 긴 꼬리를 세우며 뛰어오다가, 먹이를 마주하고는 요염하게 감아 내린다. 기계체조 선수가 리본을 다루듯이 흰 꼬리를 다룬다. 나는 관객이 된다. 관객 앞에서 두 선수는 매력을 뽐낸다. 예쁘다. 뒷골목을 헤매며 굶주리다 입가에 고기를 묻혀가며 허기를 채우는 모습이, 나는 전혀 추잡스럽지 않았다. 입으로는 먹이를 삼키고 눈으로는 나의 눈치를 보는 모습이, 애처롭게 빈곤했다.

   갖고 싶다. 동물이어서 그런 것일까? 아름다운 인간에게는 차마 가질 수 없는 감정이 깊은 곳에서 끓고 있음을 자각했다. 목덜미를 잡아서 집에 데려가고 싶다. 향기로운 샴푸로 먼저 씻기고, 따뜻한 잠자리에서 포근하게 재우고 싶다. 다시는 닭 뼈다귀를 씹지 않게 문과 창문을 잠그고 싶다. 날마다 원하는 밥을 주고싶다. 캣타워처럼 재미난 놀이기구도 선물하고 싶다. 털 알레르기가 있지만 괜찮다. 다른 존재에게 행복을 준다는 사실에서 행복을 느끼고 싶다. 그래서 지금도 이렇게 돈을 들여 밥을 준다. 단발성의 호의는 행복이 되지 않을 게다. 더 크고 오래 가는 행복을 주고 싶다. 그래서 솜덩이는 나와 함께 해야 한다. 솜덩이는 더 행복해야 한다. 나와 함께 하는 솜덩이는 행복해야 한다.

   넋을 놓고 바라보는데, ‘웨엥-!’ 왼쪽 귀로부터 소름이 돋는다. 모기를 쫓기 위해 반사적으로 왼 팔을 휘둘렀다. 내 몸짓에 고양이들도 움찔 놀란다. 먹이를 포기하고 은신처로 내달린다. 모기 한 마리도 버티지 못하면서 행복은. 솜덩이도 나도 조소를 흘린다. 어미와 솜덩이는 아직 배가 고프다. 바퀴 옆에서 먹이에 눈을 떼지 못한다. 나는 포기하기로 했다.


소유는 파괴를
내포하고 있다.


   호기심과 경계심의 사이에서 나는 내 마음을 접었다. 캔을 집어들고, 솜덩이와 그 어미가 좀 더 편하게 느낄 만한 곳을 찾았다. 주차된 차 사이는 좀 그렇고, 의류함 옆이 좋아보인다. 가로등도 어둡게나마 비춘다. 하수구 옆이라 더러워 보이지만, 나름대로 앉을 곳도 있다. 솜덩이에게는 여기가 좀 더 편할 테다. 굳이 어두운 곳에 앉았다. 될 수 있으면 나를 의식하지 않기를 바랐다. 어두운 곳에서 나는 솜덩이를 훔쳐보았다. 먹이를 다 먹을 때까지 오래 오래 관음했다.

   시각은 공간을 관통하는 빛을 받아들인다. 청각은 공기를 울리는 파동을 받아들인다. 후각은 공기에 섞인 분자를 받아들인다. 촉각은 피부를 울리는 파동을 받아들인다. 미각은 혀에 닿은 분자를 받아들인다. 이처럼 감각은 각각 층위를 달리한다. 가장 바깥의 감각은 시각이고, 가장 쪽의 감각은 미각이다. 시각은 드러난 감각이지만, 미각은 가장 비밀스런 감각이다. 나와 어떤 존재 사이의 친밀감은 그의 감각을 얼마나 안쪽에서 느끼느냐에 따라 구분할 수 있다. 깊은 사이는 깊은 감각으로 서로를 느낀다.

   미각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닿아야 하고 분해해야 한다. 입에 넣고 침으로 적시고 이로 부수면 그제서야 미각은 발동한다. 그러니까, 미각은 접촉과 변형과 파괴를 내포하고 있다. 어떤 존재를 나의 영향력 아래 두고 싶어하는 욕구는 미각에서 출발하는 게 아닐까? 미각의 완성은 축축하게 으깨진 존재를 삼키는 일이다. 삼키는 일은 가지는 일이다. 접촉과 변형과 파괴는 소유로 완성된다. 다른 존재의 생명을 만지고, 그 생명을 가두고, 그 생명을 죽여 음식을 만든다. 그리고는 그 음식을 삼켜 내 몸을 구성한다. 소유의 기원은 이와 혀와 목구멍에 있다.


나는 솜덩이를
삼키고 싶었다.


   그림의 떡. 관계에 허락된 가장 외부의 감각은 시각이다. 삼키지 못하는 것은 그저 볼 따름이다. 시각은 소유욕을 달랜다. 관음하는 일은 소유하지 못한 아쉬운 마음을 다독인다. 그래서 우리는 짝사랑하는 이를 관음하고, 연예인을 관음하고, 연락할 수 없는 먼 친구를 관음한다. 관음도 소유욕에서 출발한다. 그런데 차라리 관음이 소유보다 낫다. 소유는 파괴를 전제하지만 관음은 그 어떤 것도 전제하지 않는다. 소유의 대상은 이미 소유되기 이전의 상태가 아니지만, 관음의 대상은 관음이 시작되든 말든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그림의 떡이 이미 삼킨 떡보다 언제나 더 나은 법이다.

   나는 솜덩이를 삼키고 싶었다. 그의 행복을 삼켜 나의 행복으로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솜덩이를 갖는 일은, 결국 그를 파괴하는 일이다. 나는 아직 그런 사람은 아니다. 나는 아직 동물을 버리는 사람들을 경멸하면서, 네 욕심만 채우면 다냐, 하고 소리 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하지만 언젠가는 성장이라는 변명으로 가치관이 변하는 일을 덮을 지도 모른다. 내 욕망의 이빨에 부서지고 갈려, 솜덩이의 생명은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솜덩이는 이미 밥을 다 먹었다. 은신처에 들어가 기분 좋게 앞 발을 핥는다. 아직 배가 덜 찬 어미는 캔 구석에 낀 커다란 고깃조각을 보며 앞 발로 어쩔 줄을 모른다. 고기를 꺼내 주려고 다가가자 어미와 솜덩이는 차 안 깊숙한 곳으로 숨는다. 아스팔트 바닥에 캔을 쳐 고기를 꺼낸다. 깡 깡 깡. 날카로운 소리에 놀라 더 멀리 달아났을 지도 모른다.


   차 한 대가 더 지나간다. 굉음이 다시 한 번 골목을 덮는다. 나는 여전히 전조등이 비춘 곳만 바라본다.


   나는 관음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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