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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철수 Feb 06. 2022

결혼은 미친 짓일까

오이, 깻잎 그리고 고수와 같은 것

매달 회사에서 뭔 독서토론이라고 책을 정해주는데 이번에는 아주 요상한 책을 던져줬다. 보통은 리더십, 경제, 철학 관련한 책들이었는데 이번엔 보라색 표지에 요즘 유행하는 페미니즘적인, 그쪽으로 아주 유명하신 작가와 번역가의 콜라보레이션 책.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17905098


결론적으로는 재미 없다. 작가 개인적인 얘기, 미국 사례 중심으로 얘기를 하다보니 집중도 안되고 이해도 안되고. 처음엔 21세기 인터넷에 관한 이야기를 줄줄 하다가 고등학교 때 방송 출연한 얘기는 왜그렇게 길게 하는지. 아마 그게 내가 아는 한국 프로그램이었으면 재미있게 봤을지도?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바(?)라는 운동 얘기도 또 한참 신나게 떠드는데 우리나라에서 유행은 커녕 찾아보기도 힘든 운동이라 역시나 공감하기 힘들었다.


그러다 마지막에 아주 흥미로운 주제가 등장한다. 바로 결혼. 역시나 결혼에 대한 아주 신랄한 비판이 이어진다. 흰 웨딩 드레스의 기원부터 결혼식에 환상을 가지게 만든 배후, 결혼 자체의 불공평함과 여자에게 주는 실제적 의의까지. 이 주제 만큼은 나도 잘 아는 주제라 아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작가는 특히나 결혼'식'에 관한 강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 부분은 나와 아주 비슷했다.


원래 결혼식에서 입는 드레스는 평소 가지고 있는 옷, 그리고 앞으로도 입을 수 있는 어두운 계열의 소박한 스타일이 아주 오랜 전통이었으나 19세기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흰 드레스를 입으면서부터 지금의 흰 드레스 문화가 시작되었단다. 그때부터 여성들이 결혼식에 대한 환상을 본격적으로 가지기 시작하는데 여기에 미디어, 패션 시장의 상업적인 의도가 더해지며 지금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이란 결국 상류계급, 귀족 계층에 대한 평민 계급의 환상인데 결혼식에서라도 영끌해 본인의 허영을 한껏 과시하고 결혼이라는 기울어진 운동장의 삶을 시작하는 여성들의 인생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원래는 걍 이런 옷 입구 했다고.

나의 결혼식은 어땠는가. 난 남자라 상대적으로 아니 절대적으로 결혼식에 대한 환상은 없었고 나와는 반대로 결혼식에 대한 환상을 가득 품은 평범한 여자였던 지금의 와이프의 의견을 거의 윽박 지르다시피 묵살해 내 식대로 치렀다. 원래 정장이 없었던 난 유니클로에서 세일하는 바지랑 자켓을 대충 사서 그 이후에도 종종 입고 다녔고 와이프도 뭐 어디 개인 쇼핑몰에서 밝은색 원피스를 한벌 사서 여의도에 있는 식당을 잡아 가족 친척들 위주로 초대해 정말 조촐하게 식을 가졌다. 각자 친구는 5명 이내로 불렀고 이 친구들과 식장이었던 식당에서 질펀하게 마시고 집에 가서 2차로 또 퍼마시고 뻗었던 기억. 이 마저도 삼청동의 한정식집에서 부모끼리만 치르자는 원래의 의견에서 많이 양보한 수준이었다.


지금 와 생각해도 결혼식에 대한 아쉬움 미련은 없다. 그때 재밌었으니 다시 돌아가도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식이 아닌 결혼 자체는 어떠한가. 작가는 역사적으로 여자들에게 지나치게 불공정했던 전통, 법률, 문화를 꼬집으며 결혼이 가지고 있는 거의 모든 문제점을 끄집어내며 본인이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끔찍한', '멍청한' 등등의 표현도 심심찮게 나오는데 읽다보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렇다면 이 '끔찍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과연 행복의 지름길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따지면 결혼, 출산, 육아는 안하는 것이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허나 인생의 모든 것이 이처럼 이성, 합리의 영역에서 굴러가진 않는다. 수학 문제지에서는 1+1이 언제나 2이지만 인생에서는 1+1의 답이 2로 나오지 않을 때가 많다. 같은 행위를 해도 어떤 때에는 즐겁고 어떤 때에는 짜증나고, 같은 사람을 만나도 어떤 때에는 너무 사랑스럽고 어떤 때에는 아주 꼴도 보기 싫고. 뭐 그런 것만 봐도 사람의 인생은 아주 변덕스럽고 예측불가하고 뭐라 정의 내리기 어렵다 볼 수 있다. 수년간 고민해 완성한 이상형 리스트에 완전 부합한 사람이 눈 앞에 나타나면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아닌 경우도 분명 꽤나 많을 것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하고 까다로운 화학작용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불편을 줄이는 합리적인 도구와 제도, 방식들이 인간을 자유롭게는 할 지언정 행복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


당연히 누군가를 괴롭히고, 누군가에게 현저하게 유리/불리한 제도, 전통은 사라지거나 바뀌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은 어떠한가. 평생 한 사람에 메여 사는 게 평생 내가 사랑하는 누군가를 바꿔가며 갈아치우는 인생보다 지루하고 불행해보이는 건 자명하다. 이런 감정젹인 영역은 차치하고 여성 입장에서의 경력 단절, 사회적 지위 격하, 잠재적 일상의 제약들을 생각하면 이런 멍청한 짓을 대체 왜 하나 생각이 들 수 밖에 없다. 점점 뚱뚱하고 머리 벗겨져 가는 꼰대 마초와 사는 것보다 멋지고 잘나가는 젊은 이성을 계속해서 바꿔가며 즐겁게 해외여행 다니는 인생이 더욱 멋져 보이는 건 너무도 자명하다.


허나 결혼이야말로 인간과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가장 찐한 관계이다. 그렇게 그 무슨 관계보다 미묘하고 변덕스럽고 까다로울 수 밖에 없다. 아인슈타인 같은 천재 100명이 와도 뭐라 설명하고 결론 내리기 어렵다는 말이다. 살찌고 뚱뚱한, 머리 벗겨진 누군가와 오래 사는 데에서 오는 안정감, 신뢰감, 애정이 그 반대편에 있는 싱글에서 오는 개인적 수준 사회적 수준의 자유를 압도하는 경우가 분명히 존재한다. 이성의 영역에선 그려질 수 없는 부등호가 인생의 영역에선 그려질 수 있다는 말이다.


결혼 해서는 안되는 이유. 그리고 애를 낳아서는 안되는 이유. 나 역시 들라 하면 100가지 1000가지도 들 수 있다.결혼과 출산 육아는 여자 뿐 아니라 남자에게도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작가는 남자에게만 유리한 게임이라 하지만 요즘 남자들 역시도 결혼을 기피하는 걸 보면 결혼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남녀 모두에게 불리한 게임으로 진화하고 있다. 실제 해보니 그렇다. 싱글 친구들이 부러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결혼 이전의 인생이 그리울 때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그렇다면 이런 미친 짓을 왜 해야할까. 왜 그만두지 않을까. 그건 수천가지 싫은 이유보다 몇가지 설명할 수 없는 이유들이 더 강력하기 때문 아닐까. 이건 감정적인, 개인적인 영역인데 설명할 수 없으니 무효. 이렇게 공격하면 할 말 없지만 아무튼 그렇다. 원래 인생이 그렇다니까... 본인이 결혼에 대한 결론을 정말 내릴 수 있고 그게 정답이라면 당신은 소크라테스 위에 올라 설 수 있다. 당신이 올라서지 못하는 이유는 그 합리적인 이유들이 정답이 아니기 때문이다.


원래 좋아하는 덴 이유 없지만 싫어하는 덴 이유가 많다. 내가 오이와 깻잎은 못먹어도 고수는 먹을 줄 아는데 그 이유와 차이를 매번 장황하게 주변 지인들에게 설명한다. 그 미묘한 차이에 많은 이들이 동의하지만 그들은 오이와 깻잎을 아주 즐겨 먹는다. 난 그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데에서 우월감을 느끼고 먹지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들에 비해 행복한가? 많이 알고 아는대로 행동한다고 인간은 행복한가? 그럼 행복 먹이사슬의 최상단은 인류 석학들이 차지해야만 하는데 과연 그럴까?


결혼이 싫은 사람들은 일주일 밤낮으로 그 이유를 들 수 있지만 결혼에 만족하는 이들은 그 이유를 한두가지 들면 더 들 수 없다. 그렇다고 그들을 비합리적, 비이성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비난은 할 수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니. 하지만 부정적 이유에 집착하는 인생, 남에게 우월감과 왜곡된 계몽에 대한 강박이 본인의 인생을 행복하게 만들어줄 순 없다. 옳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의견이 생존하는 것보단 다양한 스펙트럼을 인정하고 공존하는 사회가 건강하다.


결론은 각자 걍 알아서 좀 삽시다. 잘 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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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은 이미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장기 기관이 되었다. 34p


"모든 상호관계 속 인간은 관객 앞에서 연기하는 연극배우처럼 공연을 하고 인상을 남기려고 한다." 35p


의견이나 주장은 무언가를 향하는 첫번째 단계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자 결론이 되어버렸다. 43p


인터넷은 무언가를 아는 능력은 극적으로 증가시켰지만 무언가를 바꾸는 능력은 그 상태 그대로이다. 61p


'이 모든 것(결혼식 관련 준비)이 재미있고 신나는 일이라는 가정 아래 또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진다. 416p


"평범한 여성의 대관식" 417p


결혼식은 더는 미혼에서 기혼으로의 변화만이 아니라 평범한 여성이 그보다 높은 위치인 신부이자 아내가 되는 일종의 신분상승을 의미했다. 420p


섹스와 내가 차린 저녁으로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또 다시 두려웠다. 4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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