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컴 투 샌프란시스코공화국
31. 낯선 곳을 여행할 때에는 내가 이방인이라는 데서 오는 희열과 영감이 있다. 도시를 계속 여행하는 사람들은 이 느낌에 중독된 걸 지도 모른다. 눈 감고도 반복할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일상에서 벗어나 내가 조금 특별한 사람이 된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떠날 사람’이라는 전제가 현지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과 나를 분리시킨다. 그들의 일상에 침범하기도 했다가 다시 이방인의 자세로 돌아와 도시를 관찰하는 것, 내가 여행하는 방법이다.
32. 그런데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이것이 먹히지 않는다. 누군가 오고 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 도시에서는 모두가 이방인이고 이방인이 아니기도 하다. 인종도, 국적도, 성별도 아무것도 구분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존재만으로 이 도시의 일부가 된다. 동유럽 여행이 지금처럼 흔하지 않았을 때 헝가리에서 지하철을 타면 모든 사람들이 우리를 한 번씩 쳐다봤다. 동양인 여자애 둘. ‘이방인’ 취급은 긴장되고 불편하면서도 약간의 희열이 느껴지는 것이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는? 여기에 살고 있는 아시안 중에 한 명이겠지 정도도 아니다. 노숙자는 아니구나 정도의 취급을 받는다.
33. 아일랜드에서 워홀을 했을 때 백인을 보면 따로 생각해볼 것도 없이 열에 아홉은 아이리쉬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백인을 아메리칸이라고 생각하는 건 의미가 없다. 애초에 백인보다 다른 인종이 더 많다. 크게 봤을 때 (2010년 기준)백인이 48%, 아시안 33%, 남미 6% 라고 하니 이 곳은 내가 양놈이라고 부르는 백인들의 미국이 아니다. 근교에 살면서 이 곳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까지 생각하면 더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아니 이쯤 되니 누가 이방인이고 누가 아닌지도 모르겠네..
34. 이제는 시대가 많이 변해서 서양은 개인주의, 동양은 집단주의라고 말하는 것이 큰 의미가 없지만 미대륙의 이 도시는 정말 제대로 된 개인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다. 시민들은 이미 먼 미래의 선진화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정부에서도 그에 맞는 정책들을 내놓는다. 그만큼 개개인은 그 어느 도시에서보다 강력한 자유와 권리를 누리게 된다. 샌프란시스코 공화국으로 독립해도 될 정도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걸어 나가면 온 세상 사람들이 샌프란시스코에 모일지도 모른다.
35. 일단 노숙자는 많이 모인 것 같다. 정말 많이도 모였다. 축복받은 날씨와 대마초가 합법이라는 것, 그리고 부자동네인 만큼 지원도 빵빵하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것이고 (작년 기준으로 샌프란시스코의 노숙자 비율은 0.8%인데 시 예산의 4%가 노숙자에게 쓰였다고 한다) 노숙자조차 자유와 권리를 누릴 수 있다는 것도 분명히 이 곳으로 모여드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추위에 떨고 있는 노숙자한테 커피를 사다 줬더니 디카페인 아니면 안 마신다고 했다는 얘기도 있고 채식주의자가 있다고도 한다. 이 곳에서는 노숙자들도 자기 나름의 존재 이유를 가지고 당당하게 자유롭게 살아가는 것이다.
36. 또 개인주의라고 해서 우리가 으레 함께 떠올리는 이기적이고 삭막한 분위기가 아니다. 주차장 줄이 길어서 기다리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옆에 주차창에는 자리가 있다고 얘기해주고 간다거나 쇼핑하는데 옆에 와서 내 옷을 보고 이거 너무 예쁜데 어디서 샀니 물어보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버스 옆자리에 앉아있거나 어딘가에 줄을 서서 기다릴 때도 수많은 오지랖들이 오고 간다. 인사도 생략하고 원래 알던 사람인 것처럼 하나의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호탕하게 한 번 웃고 쿨하게 헤어진다. 이 개인주의의 포인트는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안 하느니만 못한 지적이나 충고가 아니다. 개인과 개인으로서 서로 존중할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한 문화다.
37. 샌프란시스코가 전 세계 게이들의 수도라고 불리는 것도 절대 그냥 만들어진 말이 아니다. 게이가 정말 많다. 레즈비언도 많지만 게이 커플은 남녀 커플의 비율만큼 흔하게 보인다. 모든 사람들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거기에 팀 쿡 같은 세계적인 기업의 우두머리도 커밍아웃을 하고 국가적으로 지원을 해주기도 하고 프라이드 기간에는 온 거리가 무지개로 가득 찰 만큼 명품 브랜드들의 지지도 받고 있으니 단순히 동성애자가 아니라 그 어떤 유형의 소수자도 이 곳에서는 평등해질 수 있지 않을까. 이번 주 주말에는 미국에서 가장 성대하게 열린다는 프라이드 페스티벌이 열리기도 하고 이 얘기는 나중에 좀 더 해봐야겠다.
38. 샌프란시스코 인구가 80만이라고 하니 80만 개의 다른 세계가 모여있다고 봐도 되겠다. 이방인도, 노숙자도, 성소수자도 각자의 세계로 존재한다. 이런 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이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될까.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그 아이에겐 처음부터 당연한 것이 된다는 건 어떤 느낌일까. 내가 정말 희한한 동네에 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