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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Fabre Aug 04. 2019

샌프란시스코에 언니가 산다 #6

픽사(PIXAR), 제가 한 번 다녀와봤습니다

<Pixar Animation Studios> 1200 Park Ave, Emeryville, CA


39. 픽사는 한 때 꿈의 직장이었다. 아일랜드 워홀을 다녀와서 영어에 조금 자신감이 붙고 난 뒤에는 인턴십을 알아보기도 했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도 잘 몰랐지만 똑같은 영화를 몇 번이나 봤고 어떤 장면까지 세세하게 기억하는지가 자부심이었을 정도로 나의 픽사 사랑은 대단했기 때문에 화장실 청소부를 시켜줘도 행복할 것 같았다. 내가 그때의 몸과 마음으로 픽사 스튜디오가 있는 샌프란시스코에 오게 됐었다면 이 곳에 취업하기 위해 온갖 용을 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음식도 노래도 익숙한 것만 찾게 되는 쫄보 서른이 되어버려 기회의 땅도 그저 여행지에 불과하다. 그래도 이렇게 픽사 스튜디오에 초대를 받아 다녀왔으니 반은 이뤘다고 볼 수 있다.

2014년에 혼자 궁금해서 만들어봤던 표, 열정이 대단했다.


40. 구글과 달리 픽사는 초청이 없으면 출입 자체가 불가하다. (구글은 돈을 내고 사전예약을 하면 누구나 관람이 가능하다.) 게다가 최근에는 일반인 출입을 좀 더 자제시키기 위해 직원의 초청 횟수가 많아지면 경고를 주는 상황이었어서 날짜를 잡아놓고도 가기 직전까지 확신할 수 없었다. 다행히 초대해주시는 분의 배려로 출입뿐만 아니라 룩소 카페에서 점심도 먹고 업무공간을 직접 둘러볼 수도 있었다. 재밌는 이야기도 많이 들려주신 숀킴님께 다시 한번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41. 실리콘밸리도 아닌 샌프란 근처의 작은 동네로 들어와 여기에 픽사가 있다고? 하며 골목 몇 개를 돌다 보면 왠지 코스트코가 있을 것 같은 위치에 사진에서만 보던 벽돌 기둥과 PIXAR 로고타입이 보인다. 너무 뜬금없어서 놀랄 새도 없이 도착하면 입구에서 친절한 직원분이 방문자 리스트를 확인하고 우리 이름이 적힌 일회용 방문권을 발급해주신다. 인크레더블 표지판이 붙어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메인빌딩인 스티브 잡스 빌딩을 향해 가다 보면 또 사진에서만 보던 커다란 룩소와 룩소공 모형이 나타난다. 꿈이냐 생시냐 하며 온갖 호들갑을 떨며 빌딩을 구경하고 있으니 숀킴님이 내려오셨다.


42. 일부러 점심시간에 맞춰 불러주신 덕에 룩소 카페에서 식사를 먼저 했다. 모든 게 공짜였던 구글과는 달리 여기는 학식 같은 시스템이었고 가격도 그렇게 싸진 않았다. 음식도 그저 그랬다. 하지만 식당 이름에 룩소가 들어갔으니까 합격이었다. 게다가 주문받으시는 분은 코코가 그려진 남방에 코코 귀걸이를 하고 계셨다. 내가 픽사에서 할 일은 이것인가 순간 혹했다. 그리고 주문한 것들을 나눠 먹으면서 이런저런 재미난 픽사 내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43. 그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최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픽사에는 흑인 직원이 단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몇 명 있긴 하지만 여전히 소수에 불과하고 동양인도 초창기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한참 앞서간 컴퓨터 기술과 스토리텔링으로 대표되는 픽사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종차별이었다. 그러고 보면 정말 픽사는 주인공이 장난감, 괴물, 물고기, 자동차 같은 것이니 애초에 인종 논란이 있을 수가 없었고 그 이외에 함께 등장하는 인간 캐릭터들이나 인크레더블, 인사이드 아웃, 업에는 모두 백인이 등장한다. 인어공주를 흑인으로 캐스팅해버리는 디즈니의 노골적 평등주의에 비하면 차라리 이렇게 인간이 아닌 것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논란거리를 만들지 않는 게 낫다고 느껴질 정도로 쿨한 행보다. 이제는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가장 미래에 가까운 것을 만들어내고 있는 곳에서 인종차별이라니 조금 충격이긴 했다.


44. 메인빌딩인 스티브잡스 빌딩은 입구에서 들어와 바라보는 것을 기준으로 크게 1층 로비와 왼쪽, 오른쪽 사무실로 나뉘는데 논리를 담당하는 좌뇌와 창조를 담당하는 우뇌의 구조를 본 따 왼쪽에는 컴퓨터그래픽 작업 부서가 있고 오른쪽에는 스토리와 애니메이션 부서가 있다. 그리고 통유리창으로 된 거대한 로비에 룩소카페, 우편함, 휴게공간, 기념품샵 등이 모여 있어 모든 직원들이 이 곳에서 만나 소통할 수 있는 구조다. 설계 당시 스티브잡스가 낸 아이디어라고 하는데 정말 잡스가 잡스했다.


45. 사무실은 1인실, 2인실, 3-4인실로 구성되어 있다. 업무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직급에 따라 1인실을 사용하기도 한다. 이 곳도 역시나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이 자율근무를 하는데 어떤 직원이 영화가 개봉하고 난 뒤에 할 일이 거의 없어 휴가를 따로 내지 않고 고향집에 일주일 넘게 다녀왔는데 같은 사무실을 쓰는 직원들이 아무도 몰랐을 정도라고 한다. 자율근무도 결국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의 월급루팡이 가능하다니 미국이라서 그런 걸까 픽사라서 그런 걸까. (사무실 내부는 촬영 금지어서 사진이 없다.)


46. 픽사 스튜디오 안에는 픽사 유니버시티가 있다. 실제 대학교였다면 정말 환상의 학교였겠지만 직원들에게 복지 차원으로 운영되는 곳이다. 수영이나 요가, 축구 같은 운동뿐만 아니라 가구를 만들거나 그림 그리는 걸 배울 수도 있다. 일종의 교양수업 같은 느낌이다. 전문 마사지사에게 마사지도 받을 수 있는데 사무실에 있으면 직접 방문해서 해주기도 한다. 스튜디오 곳곳에 있는 화단을 직원들이 직접 가드닝 할 수 있어서 온갖 나무와 꽃들이 직원의 이름 팻말과 함께 제각각 심어져있기도 하다. 이런 귀여운 아이디어는 누가 내고 누가 승인을 해주는 건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직원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방법은 참 다양하다는 걸 보여준다.


47. 건물 안에는 픽사 캐릭터들이 여기저기 숨어있다. 내가 갔을 때는 ‘토이스토리4’가 개봉한 직후여서 메인로비에는 온통 토이스토리 모형이 가득했고 화장실 표지판에는 남자는 우디, 여자는 보핍이 그려져 있었다. ‘도리를 찾아서’의 문어 행크가 벽 여기저기에 보호색을 띄고 숨어있기도 하고 ‘인크레더블’ 엄마가 2층에서 몸을 쭈욱 늘려서 달려가고도 있다. 건물 천장에서 빛이 조금 새어 나오는 공간에 ‘코코’ 모형을 세워놔서 진짜 영화 속 장면을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인사이드아웃’ 빙봉 로켓을 타면 바로 무지개를 타고 날아오를 것 같다.


48. 가장 기억에 남는 곳을 고르라면 스토리보드 제작실과 극장이다. 스토리보드 제작실에는 온 벽면과 책상, 바닥까지 스토리보드를 쭈욱 늘어놓고 어떤 사람은 서서, 어떤 사람은 바닥에 엎드려서 작업을 하고 있다. 극장에서는 제작하는 중간중간 영상을 보며 피드백을 하기도 하고 영화가 개봉하는 날 전 직원이 모여서 전체 관람을 하기도 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불이 꺼지면 천장에서 별이 빛나고 별똥별도 떨어진다고 한다. 그 앞에 앉아 스크린을 보고 있으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 속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지만 수백 명의 직원이 온 마음과 애정을 다해 생명을 불어넣고 그렇게 살아 움직이게 된 캐릭터들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뭉클할까. 이 곳에 오래 있다 보면 픽사의 이야기가 전부 진짜라고 믿게 되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사진촬영이 가능한 구역에서 스토리보드 제작실이 조금 보였다

49. 픽사의 모든 영화는 다 연결돼있다는 세계관만큼이나 이 곳은 구석구석이 다 연결되어있는 것 같다. 모든 것에 존재 이유가 있고 생동감이 넘친다. 소위 말하는 ‘만화영화’를 만드는 곳이어서 조금 더 환상적이게 보이는 것도 있겠지만 픽사의 기술이 인류의 문화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믿는 나로서는 이 모든 것이 존경스럽게 느껴진다. 또 픽사 역사의 시작에는 아이폰을 시작으로 21세기 인류의 모습을 완전히 바꿔놓은 스티브 잡스가 있으니 이 사람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역시 잡스는 계획이 다 있구나..


50. 나오기 직전에는 기념품샵에 들러 스튜디오를 투어 하는 동안 맞은 픽사뽕에 취해 이것저것 사제꼈다. 물론 후회 없는 쇼핑이었다. 여기가 아니면 살 수 없는 것들이고 무엇보다 장난감이 디즈니에서 보급형으로 제작된 게 아닌 픽사 제작이라 퀄리티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들은 에피소드를 덧붙이자면 ‘토이스토리4’의 포키를 직접 만들어보는 키트 장난감은 현재 전량 환수 중이라고 했다. 포키의 팔이 되는 빨간 끈이 질식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됐기 때문이라고 한다.


51. 세계적인 기업들이 나올 수 있는 도시환경은 절대 공무원들의 야심 찬 계획만으로는 이뤄질 수 없다. 스티브잡스도 샌프란시스코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에 지금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구글이 있고 픽사가 있고 온갖 세계적인 기업들이 있는 도시라니 가끔은 이 도시가 21세기 문명을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면서 내가 이 도시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는다. 픽사를 다녀온 직후의 들뜬 마음으로 이 도시를 더 즐겨봐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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