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세 살, 나는 처음으로 10시간 넘는 장거리 비행을 하여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땅을 밟아볼 수 있게 되었다. 내 인생 처음으로 부모님을 떠나 먼 여행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모네 식구가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감사하게도 나에게 한 달이라는 시간 동안 이모네 집에서 편하게 지내면서 뉴질랜드 현지 학교생활도 경험해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어릴 적부터 어학 분야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자연스럽게 팝송이나 영화를 통해 영어권 나라의 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터라 모든 것이 신기하고 설렜다. 이모의 역할은 내가 한 달간 알차게 영어를 공부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고, 그래서 나에게 매일 50개씩 영어 단어를 외우도록 했다. 학습해야 할 단어가 적지 않은 개수였지만 공부해야 하는 그 상황마저도 나에겐 행복이었다.
현지 학교에서의 첫날은 순탄하게 흘러갔다. 같이 간 한국 친구들 몇몇이 있었는데 아직 영어가 부족한 터라 현지 아이들이 있는 교실에서 함께 수업을 받지 못했고, 노란 곱슬머리에 파란 눈을 가진 키위(뉴질랜드인을 'kiwi'라 부른다.) 여자 선생님의 지도 아래 하루 종일 재미난 활동을 하며 영어를 배웠다. 그 당시에는 지금보다도 영어의 중요성이 훨씬 컸기 때문이었는지 우리 모두는 영어를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같이 수업을 들었던 나를 포함한 한국 아이들은 선생님이 영어로 말씀하실 때마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것 마냥 위축되어 있었다. 나는 길쭉하게 생겼고, 친구는 통통하게 생겼듯 서로의 생김새가 다른 것처럼 말하는 언어 또한 다를 수 있는 것인데도 우리는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고, 일상생활에서 영어가 전혀 쓰이지 않는 우리나라와 같은 EFL(English as a Foreign Language) 환경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우리 중 그 누구도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당당하게 수업에 임했더라면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얻어 갈 수 있었을 텐데, 위축되고 소극적인 모습으로 수업에 임하다 보니 선생님께서도 우리와의 소통을 되도록이면 최소화하려고 하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일주일을 다양한 활동을 하며 영어 공부를 한 후, 우리는 현지 키위 학생들과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여러 수업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신선한 충격이었던 수업이 있었다. 그날은 수업이 시작하는 종이 울리고 자리에 안착했는데도 모든 아이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영문을 모르고 멀뚱멀뚱 앉아 있던 중, 내 앞에 앉아 있던 키위 남자아이가 나를 힐끔 쳐다보더니 자신의 사물함으로 가서는 축구공을 꺼냈다. 그러고는 갑자기 교실 문을 박차고 나가는 것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떤 친구는 책을 읽고 있었고, 또 어떤 친구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 한 시간 동안은 온전히 각자가 하고 싶은 활동을 선택해서 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나에게는 그 상황 속 친구들이 너무나도 자유롭고 멋있게 보였다. 각자가 하고 싶은 것을 존중받는 느낌이었다. 그럼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을 해 보았지만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지?'
하고 싶은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나는 이제껏 선생님이 무엇을 하라고 지시를 내려주면 누구보다 열심히, 잘할 수 있는 아이였는데 나에게 주어진 것이 없어서 오히려 불안했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지만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난 그렇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면서 멀뚱히 앉아서 한 시간을 그냥 보냈다. 그렇게 한 달간의 현지 학교생활을 경험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후 열세 살이라는 나이에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그것은 바로 유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