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발바닥 공동주택
드넓은 공간, 한 지점에 이름을 붙이고 그곳을 나무라 부른다.
가장 가까운 위층을 '정신', 아래층을 '몸'이라 칭하며 ‘내가 존재한다’ 고 말한다.
우리는 자연과 인간이 만들어 놓은 수많은 물질과 풍요로움 속에 살고 있지만,
모든 것은 하늘 아래, 땅 위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여기에 너와 나, 우리라는 경계의 언어를 지워버린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까?
이 글은 실재와 그림자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한다.
“나, 내가 있다!”라는 관념에 사로잡힌 상태를 불교에서는 “아상”(我相)이라 부른다
삶 속에서 상(想)에 집착하는 순간, 갈등과 고통이 모습을 드러낸다.
대승불교 핵심 경전 중의 하나인 “금강경”은
총 32분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중 17분은 네 가지 상(相)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 삶 속 상(想)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何以故(하이고) 須菩提(수보리) 若菩薩有我相(약보살유아상),
人相(인상), 衆生相(중생상), 壽者相(수자상), 卽非菩薩(즉 비보살).
-금강경 17분-
“수보리야,
만약 보살이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다면
참 보살이 아니니라.”
아상- ‘나’라는 울타리
아상(我相)이란 몸과 마음이 곧 나이며, 내가 실재한다는 집착이다.
이것은 팔과 다리, 몸과 같은 신체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나’라는 관념이 스며든 모든 것에 포함된다.
내 자식, 내 부모
내 집, 내 물건
“나”라는 말이 붙는 순간 애증이 생기고 집착이 따라붙는다.
떨어져 있는 공간, 타인의 팔다리, 물건에는 무관심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만
‘나’라는 단어가 번쩍이는 순간, 예리한 칼날처럼 하나의 공간을 나누고 재단해 버린다.
자동차에 난 흠집,
자식에 대한 작은 비난이라도 들릴 때면 불 같이 일어나 전체에서 분리된다.
하나의 작은 섬광이지만 나는 무한히 작은 공간으로도, 큰 공간으로도 확장될 수 있다.
나의 어머니뿐 아니라 타인의 어머니, 내 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에도 이 단어를 쓸 수 있다.
작게 쓰면 쓸수록 좁은 공간에 국한되지만
크게 쓰면 존재의 범위는 무한히 넓어지는 것이다.
인상- 같은 종(種)에 대한 집착
아상이 개인의 세포막이라면
인상(人相)은 종족의 울타리와 같다.
나와 같이 서있는 존재, 직립보행으로 움직이는 존재와 그렇지 못한 대상에 대한 나눔이자 애착이다.
‘사람이 먼저다’
‘서로 사랑하라’! 는 문구는 아름답지만,
사람만을 우선시하고 그 공간에만 눈길을 돌린다면 이 역시 집착일 것이다.
인간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딛고 설 수 있는 땅과 나무, 곡식이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눈에 잘 띄는 인간만을 소중히 하고
땅이 꽃피어낸 물건, 그것을 유통시키는 화폐를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내가 딛고 선 땅을 무시하는 일이다.
물질을 품고 있는 땅과, 돈 만을 사랑하는 것은 집착이다.
하지만, 고개를 빳빳이 들고 서있는 사람만을 가치 있게 여긴다면
그것은 종(種)에 대한 집착일 것이다.
나는 어느 한쪽에 집착하며 살고 있는가?
중생상- ‘보통’ ‘일반적’이라는 집단의식
중생상(衆生相) 은 대중, 그룹에 대한 관념이다.
아상과 인상을 넘어 정신적인 가치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보통사람, 중산층이라는 말이 있다.
최상과 최하를 제외한 중간계층처럼
대중의 일반적이며 상식적인 관념에 사로잡힌 의식을 말한다.
사회에는 우리가 만들어낸 보편적 가치들이 있다.
예의, 도리, 상식, 양심.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사람들은 불편해하고 비난하며
때로는 스스로를 자책에 빠뜨리기도 한다.
“남자는 이래야 한다” “여자는 저래야 한다” 는 말을 들으며 자랐고,
커서는 “남자인 내가...” “나는 여자이니까 ”에 사로잡힌 수많은 관념들이 있다.
남자와 여자라는 집착!
분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 관념에 들러붙어 놓지 않으려는 태도
그 안에 함몰되는 상태.
그것은 중생상일 것이다.
수자상- 높고 낮음, 위계에 대한 집착
중생상이 중간에 걸친 마음이라면
수자상은 극단에 빠진 높고 낮음에 대한 집착이다
나이가 많고 적음
지위가 높고 낮음
사장과 직원
깨달은 자와 범부.
“사장인 내가 하는데.. 네가!” 하며
비난하거나 속상해하는 마음이다.
젊은 시절 윗사람을 존중하고 아랫사람을 챙겨주는 미덕과 가르침이 있었다.
Mz 세대는 인터넷의 정보를 존중하며 눈을 마주친 대화가 사라진 개인주의적 삶으로 변해 버렸다.
한 살 더 먹은 지금, 현세대를 보니 괘씸하고 서운한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시간의 흐름 속, '나는 상사이고 나이도 많은데..' 하며 위에 있다는 마음에
나는 흔들린다.
인간은 타인 보다 위에 서려하고 그 자리를 누리다가, 잃어버리면 상실과 좌절을 겪는다
높이 솟은 고층 빌딩처럼, 허공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려 애쓰는 모습이다.
사람들이 만든 위계, 그것은 수자상이다,
개인적이며 물질적인 아상과 인상
내면에서 파생된 정신적인 상(想)인 중생상과 수자상.
모든 상의 공통점은 집착이고 이는 고통 속을 헤매이기에 경계하는 것이다.
집착의 본질 -막대자석-
집착은 ‘상’에 대한 의존이고 끌려 다님이며, 동시에 반대편을 밀어내는 힘이다.
어린 시절 과학시간에 배운 막대자석을 떠올리게 한다.
N극과 S극으로 이어진 청색과 붉은색의 막대자석.
같은 극은 밀어내고 다른 극은 끌어당긴다.
애착을 가지면 철석같이 붙어버리고
그와 반대되는 가치는 자동적으로 밀어낸다
집착의 본질은 극단적이다.
과연 막대자석의 정중앙은 어떤 성질을 띌까?
그것은 찾을 수도 없을 것이다
아무리 나누어 보았자 그것은 어떤 형태로든 한쪽의 성질을 띤다.
-붓다와 중도-
‘금강경은’ 붓다와 그의 제자인 수보리의 문답이다.
붓다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말했다.
만약 이것이 자신을 높이는 말이었다면 그 역시 수자상에 빠졌을 것이다.
이 말의 뜻은
어떤 상에도 의존하지 않고, 또한 밀어내지도 않으며 홀로 존재한다는 ‘중도’의 표현일 것이다.
위대한 수행자 싯다르타는 막대자석처럼 N극과 S극으로 나뉜 존재가 아니다.
싫어하며 밀어내지도 않고, 좋아하며 찰싹 들러붙지도 않는 '온전한 자석'
모든 존재와 간극과 틈을 유지한 채
홀로 존재하는
원형의 "둥근 자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