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12:1-3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장면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창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만들어가신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을 세계평화와 민족복음화를 위해서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즉, 여러분은 목적이지 도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실 여기가 우리가 자주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물론 평화도 중요하고 복음전도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여러분을 어떤 명분을 위한 도구로 부르시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시기 위해, 이 세상과 이 시대와 이 나라와 또 여러분이 속한 교회와 그리고 여러분이 만나는 모든 사람과 여러분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을 도구로 사용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에게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너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너무 잘 알지만, 창조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대개 상황을 바꾸어달라는 기도입니다. 하는 일이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지금 겪고 있는 고난이 하루 빨리 끝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러한 기도의 목적은 한마디로 고민할 것도 없고, 염려할 것도 없고,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이 없어도 되는, 평탄하고 평온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결코 기독교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구원의 하나님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는, 다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만나게 된 것은 인생이 그만큼 힘들고 만만치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살다보면 막막하고 답답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세상에 절망하고 사람에게 실망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항상 점잖고 훌륭한 기도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거, 저도 압니다. 신앙생활 한다고 해서 어려운 일들이 우리를 피해가거나, 세상의 생존경쟁에서 면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힘이 들면 숨이 턱턱 막힙니다. 기도도 안 나오고 한숨과 탄식만으로 기도를 대신해야할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땐 그냥 무조건 살려달라고 기도하셔도 됩니다. 누가 우리 마음을 다 알고 이해하겠습니까? 누구한테 매달리겠습니까?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를 붙잡고 토로하겠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살려달라는 기도가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울면서도 달려야하고, 눈물을 흘리면서도 씨앗을 뿌려야합니다. 체념하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앞으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능력이고 가치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꺼내기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꺼낸 것이 전부가 아니라, 광야를 통과하여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이 목적입니다. 애굽에서 꺼낸 것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해 꺼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도 잘 보시면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다시 한 번 봉독합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가 보여줄 땅으로 가라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여기까지가 아브라함의 부르심이고, 우리 모두를 향한 하나님의 동일한 부르심인 것입니다.
그러나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장소를 바꾸면, 이 곳에서 저 곳으로 이사를 하면 해결된다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의 환경과 상황을 바꾸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환경과 상황은 단지 여러분의 배경일 뿐이고, 우리를 만들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게 하실 때 광야를 통과하게 하십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그냥 광야를 거쳐가게 하는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사실상 거리로 따지면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었고, 빨리 가려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헤매며 고생한 세월이 무려 40년입니다. 그냥 몇 년이 아니라 무려 40년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인도하신 것입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가 애굽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고, 의욕이 넘쳤고, 혈기왕성했던 나이가 저와 같은 40대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뛰어난 인재가 미디안 광야에서 무려 40년을 흘려보냅니다. 하나님은 40년 동안 아무 말씀도 없으시다가 모세가 80살이 되자 느닷없이 호렙산 떨기나무에 타지 않는 불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라는 굉장히 무리한 요구를 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겁니다. 왜 하나님은 이런 시간을 거치게 하시냐는 겁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속 시원하게 해결되지 않는 부분이 이겁니다. “내가 하나님도 만났고 구원도 받았는데, 왜 여전히 내 인생은 고단한가?” “내가 잘 해보려고 하는 데 왜 안 도와주시나?”그건 여러분이 뭘 잘못해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여러분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창조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마땅히 물어야할 것은, 하나님이 만들고자 하시는 그 믿음의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입니다. 믿음을 나의 신앙적 선택과 결단으로 이해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에 대한 부분적인 이해입니다.
사실 믿음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통해 우리 안에 만들어져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예를 들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음 구절인 4절에 보시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부르시자마자 바로 결단하고 순종합니다. 자, 그럼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결단하고, 순종했으니 믿음의 사람으로 완성된 것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 두말없이 순종했지만, 그 이후의 일을 보면 잘못된 선택을 반복합니다. 하나님은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조상들이 하늘을 향해 바벨탑을 쌓았듯이 스스로의 힘으로 안전해지려고 하는 자리에서 떠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서 자신의 생존과 안전을 스스로 확보하려고 합니다.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갈이라는 종의 자식을 잉태합니다. 하나님이 자식을 안 만들어주시니, 내가 알아서 만들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같은 인간으로서 바라보면 다 이해가 되는 일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을 못났다고 비난하겠습니까? 우리도 과거에 또 지금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잘못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것들이 그냥 의미없이 공전하는 반복이 아니라, 의미없이 흘러가는 시간이 아니라. 우리 안에 믿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놀랍게도 우리의 수없는 실패 속에서도 우리와 믿음이라는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끝없이 믿어주시고, 또 우리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아브라함도 수없이 실패했지만, 결국 어느 자리까지 갑니까? 그토록 갈망했던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요구에 순종하는 자리까지 나아갑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그런 믿음의 수준까지 요구하시고, 또 이끌어가신다는 것입니다.
제가 “민들레교회”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교회 이름이 참 특이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인터넷 창에 민들레를 검색해보았습니다. 민들레의 특징 가운데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뿌리가 깊이 내리기 때문에 짓밟아도 잘 죽지 않는다”
그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들어져간다는 것은, 민들레처럼 하나님께로 뿌리를 더욱 깊게 내려가는 과정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니까 민들레라는 꽃이 의외로 교회 이름과 잘 어울리고, 참 아름답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리 신앙생활에 아름다움이라는 요소가 좀 추가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하면 너무 숭고하고 처절해서 덜컥 겁부터 납니다. 물론 믿음은 어려운 결단도 있고, 고난도 감수해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는 아닙니다.
저는 믿음의 사람은 조금 여유를 가지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요즘같이 바쁜 세상에 여유를 느끼기는 참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를 내서 과거의 아름다움을 돌아보고 미래의 아름다움을 그려보는 일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적어도 일주일에 한번 모여서 예배드리는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이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현재의 현상과 현실에만 매몰되어 매어있는 우리에게, 숨을 틔워주고 눈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이러한 믿음의 여유 속에서 삶의 품격이 아름답게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아까 주 음성 외에는 이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 찬송은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라는 후렴이 반복됩니다. 이 후렴은 늘 기뻐할 일만 있어서 기쁘다고 하는 게 아니라, 현실은 막막하지만 하나님이 이미 만드신 과거의 아름다움과 또 앞으로 만드실 미래의 아름다움을 기뻐하는 찬양인 것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가요 중에 “오르막길”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이 노래 가사 중에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 “가끔 바람이 불 때만 저 먼 풍경을 바라봐 올라온 만큼 아름다운 우리 길”입니다. 저는 우리 신앙생활에 좀 이러한 여유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믿음의 여유와 함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믿음의 배짱입니다. 배짱은 처절하고는 다릅니다. 배짱하면 막무가내로 무책임하게 구는 느낌이 있습니다. 비유가 좀 그렇지만, 조폭이 배짱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뒤를 봐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우리 뒤는 누가 봐줍니까? 하나님이 봐주십니다.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한마디로 뭡니까? 쫄지 마라. 내가 네 편이다. 배짱을 가져라. 이겁니다.
오늘 제 아들이 같이 왔는데, 제 아들이 겁이 좀 많은 편입니다. 돌다리를 한 스무번은 두드려보고 건너는 스타일입니다. 그래서 저와 제 아내가 자주하는 이야기가 “괜찮아! 해봐!”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을 이기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제가 아이를 키워보니 하나님도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약속을 하셨을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차하면 개입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이 늘 우리가 기대한대로 개입하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과거를 돌이켜보십시오. 하나님이 얼마나 놀랍게 여러분의 인생에 개입하여 여기까지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하면 놀라실 것입니다. 그렇게 또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여러분의 미래를 만들어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의 여유와 배짱을 가지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뒤를 봐주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옆에서 함께 동행하시고, 여러분의 앞에서 길을 만들고 계십니다. 이번 한 주간도 믿음으로 하나님께 깊게 뿌리박은 아름다운 민들레 꽃과 같은 인생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