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싸움

창세기 32:24-31

by 김영훈



오늘 본문은 인간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자주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인간이 뭐길래” “대체 인간이 뭐길래 하나님은 이렇게까지 하실까” 오늘 본문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야곱에게 싸움을 걸어오십니다. 물론 본문에는 “어떤 사람”이라고 되어있지만, 대부분 이 어떤 사람을 하나님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이 싸움은 좀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싸움에도 기본적인 룰이란게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끔 UFC를 봅니다. 물론 어느 종목이나 마찬가지겠지만, UFC도 내가 싸우고 싶은 상대와 싸울 수는 없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들이 맞아야하겠지만, 기본적으로 체급이 맞아야합니다. 체급이 맞지 않으면 공정한 싸움이 될 수 없을뿐더러, 재미도 없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몸무게가 30kg인 꼬마와 100kg인 아저씨가 싸운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그게 싸움이 되겠습니까? 저는 초등학교 시절에 태권도 노란띠까지 따고 그만뒀습니다. 더 이상의 배움이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제가 요즘 잘나가는 “토푸리아”나 “페레이라”같은 파이터들과 싸울 수 있을까요? 당연히 상대가 안 될 것입니다.

싸움에서 승리만큼 중요한 것은 어떤 상대와 싸우느냐입니다. 어떤 상대와 싸우느냐에 따라 이기고도 자신의 가치가 내려갈 수도 있고, 지고도 오히려 자신의 가치가 올라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저씨와 꼬마가 싸우면 당연히 아저씨가 이기겠지만, 꼬마와 싸웠다는 거 자체가 창피한 일이고, 손해나는 일일 것입니다. 아저씨는 싸움에서 이겼는데도 불구하고 가치가 내려갈 것이고, 꼬마는 싸움에 졌음에도 불구하고 가치가 올라갈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싸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싸움은 인간에게 무조건 불리한 싸움이지만, 따지고 보면 사실 손해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여기가 생각해볼만한 부분입니다. 하나님 입장에서 인간과 싸워서 득 될게 뭐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그런 손해를 감수하시면서 인간에게 싸움을 걸어오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창피함을 무릅쓰면서 야곱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셨을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생각해보려는 문제입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먼저 야곱이란 인물에 대해 탐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은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야곱은 쌍둥이 형 에서와 함께 태어났는데, 재미있는 것은 그가 태어날 때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이 “발뒤꿈치 잡은 자”입니다. 이것은 야곱이 어떤 인물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야곱과 관련된 사건을 몇 가지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팥죽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산 일이고, 두 번째는 아버지 이삭을 속여 형 에서가 받아야할 축복을 가로챈 일입니다. 이런 사건들로 미루어보면, 야곱이 어떤 인물인지 대략 감이 잡히실 것입니다. 야곱은 도덕적으로 보면, 얄미운 사기꾼이자 파렴치한 도둑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야곱은 자신의 한일에 대한 대가를 치룹니다. 그는 자신이 벌인 일 때문에 도망자로 살아야했고, 도망쳤던 곳에서도 쫓겨나와야 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형 에서와의 피할 수 없는 만남속에서 죽음의 공포를 느껴야했습니다.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야곱은 잘못을 했고, 그 일에 대한 대가를 치뤘다”가 성경이 말하고 싶은 전부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실 때 잘잘못의 시각으로만 보시면, 성경이 말하고자하는 바를 놓치기 쉽습니다. “누구는 잘해서 상 받았고, 누구는 못해서 벌 받았다” 그러니 “누구처럼해서 상 받고, 누구는 반면교사로 삼아서 벌 받지말자”가 결론이 되면 곤란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보다 더 크고 깊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인물은 여러분의 일부입니다. 여러분 안에 아담이 있고, 아브라함이 있고, 야곱이 있고, 욥이 있고, 다윗이 있는 것입니다. 나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그 인물의 인생을 그렇게 쉽게 판단하거나 간단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 야곱은 자신의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자신의 인생을 주도적으로 개척하고 만들어나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입니다. 이것은 그가 특별한 위인이나 악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야곱은 인간이라면 다 가지고 있을법한 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의 것을 탐했듯이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보다 아직 가지고 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그 결핍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며 자신의 인생을 꾸려갑니다.

우리는 누구나 “왜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가난한가?” “왜 내 외모는 친구보다 못났을까?” “왜 난 그 많은 나라들 중에 대한민국에 태어났을까?” 같은 생각을 합니다. 인간에게는 모두 그러한 욕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가면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고 없는 것에 욕심내지 말자는 신앙적인 권면을 나눕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한다고 그러한 욕망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마치 나는 그런 욕망이 없는 것처럼, 제거해버릴 수 있는 것처럼,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욕망 자체를 죄악시하는 게 아니라 욕망을 인정하고 들어갑니다. 모든 것에는 양면성이 있습니다. 과도한 욕망은 우리 인생을 나락으로 몰아넣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욕망은 단순히 좋다나쁘다 할 수 있는게 아니라,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조건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놀라운 점은 인간의 욕망을 제거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인간의 욕망을 제거하여 인간을 신처럼 만들려는 종교가 아닙니다. 오히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인간이 되셔서 욕망과 불안으로 점철된 혼란스러운 인생 속으로 들어오셨다고 말합니다. 우리와 같이 인생을 사시며, 어쩔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심지어는 죽음까지 따라 들어오셔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합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욕망을 제거하거나 완벽히 통제하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을 신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게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구원은 인간의 욕망과 몸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셔서 우리를 만들어가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하나님의 창조와 부활과 은혜에 의해서만 구원 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지 않은 결핍에 대한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면에서, 우리는 모두 야곱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러한 결핍과 욕망을 충족시킬 수 없다는 면에서도 우리는 모두 야곱인 것입니다.

여러분! 가만히 세상의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모두 여러분의 결핍과 욕망을 부추기는 소리들뿐입니다. 세상의 질서는 생존경쟁입니다. 약육강식이며, 각자도생입니다. “뺏기지 않으려면 먼저 빼앗아야한다. 가지기 위해서는 빼앗아야한다. 나약하면 빼앗긴다. 뺏기지 않으려면 강해져야한다.” 이러한 목소리들로 가득 찬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싸움을 걸며 이렇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저는 발 뒷꿈치 잡는자입니다” “저는 저의 욕망으로 인해 괴로운 사람입니다” “저는 세상의 도전 앞에 무력한 자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뭐라고 하십니까? “아니다 너는 야곱이 아니다 너는 이스라엘이다” “너는 나와 겨루어 이긴자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체급도 안 되고 실력도 안 되는 상대의 손을 들어주며, 승리를 선언하는 이 이상한 하나님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어떤 목사님이 이 부분을 기가 막히게 표현했습니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 이렇게 보면, 우리의 궁금증이 풀립니다. 왜 하나님은 창피함을 무릅쓰고 싸움을 걸어 야곱의 가치를 높이려고 하셨을까? 그것은 야곱이 내 자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는 이제 고아처럼 굴지마라. 다른 사람 것을 빼앗아올 필요 없다. 너는 내 자식이다. 내가 너의 보호자다. 너와 약속한 것을 이루기까지 나는 너를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탕자의 비유를 생각해보십시오. 둘째 아들은 부모의 재산을 들고 나가 전부 탕진하고 돌아옵니다. 아버지는 그런 둘째 아들을 환대하며 잔치를 베풉니다. 그런데 첫째 아들은 그런 후레자식에게 잘해주는 아버지가 못마땅합니다. 그런 첫째 아들을 향해 아버지가 뭐라고 하십니까?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 아니냐”

부모는 단지 자녀의 잘잘못을 판단하는 심사위원이 아니라, 사람을 키우고 기르는 보호자라는 겁니다. 잘못하면 따끔하게 혼을 내도, 때가 되면 밥을 먹이는 게 부모입니다. 야곱은 세상적인 축복과 보상을 구했지만, 하나님은 자녀라는 정체성을 주신 것입니다. “너는 네가 생각하는 그 정도의 존재가 아니다. 너는 나를 이긴 자다. 너는 내 자녀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정말 이상한 부분은 여깁니다. 야곱에게 “너는 나를 이긴 자다, 너는 내 자녀다”라고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셔서 절름발이를 만드십니다. 그러니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나서 평생 다리를 절어야하는 불구자가 된 것입니다. 여기가 참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자꾸 걸려 넘어지는 게 바로 여기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도 있고, 그렇게 살고 싶은 의욕도 있는 데 인생이 내가 원하는 대로 풀리지가 않습니다. 나 하나 좋자고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 좋자고 하는 건데도, 도와주시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러분! 절름발이가 된 야곱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시려는 겁니까? 하나님의 싸움은 우리의 싸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힘을 가지거나, 세상이 존경할만한 무언가 그럴듯한 일을 해서 세상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이 제거 되면, 내가 처한 조건이 개선되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거라는 우리의 생각을 깨트리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우리를 완벽한 존재, 혹은 완벽한 공동체를 통해 자신의 뜻을 이루시는 게 아니라, 놀랍게도 “절름발이 야곱”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사도 바울이 이런 고백을 합니다.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7-10)

세상은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이라는 질서 속에 있지만, 우리는 은혜의 질서 안에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나라는 세상보다 힘을 가져서, 세상의 인정을 받아서, 세상보다 우월해져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보호자가 없는 고아처럼 싸워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믿음의 싸움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닙니다. 믿음의 싸움, 그것이 우리의 싸움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아 오는 싸움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무책임하게 살아도 된다”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이 다 해결해주신다”가 아닙니다. 여러분이 처한 상황과 조건 안에서,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하십시오. 그러나 여러분이 계획한대로, 여러분의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고 좌절하거나 체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육체의 가시”를 통해서도 “절름발이”를 통해서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끝까지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붙들고 의지하는 싸움, 그것이 여러분이 해야할 일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답게 당당하게 살아가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여러분의 인생이 하나님의 손안에 있음을 기억하여, 믿음으로 승리하시는 여러분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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