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aehwa Lee Oct 11. 2017

[한 잠] 문 밖의 고양이

내가 그 꿈을 꾼 이유


더위가 가실 무렵 찾아온 손님은 한 뼘 반만 한 새끼 고양이었다. 날씬하고 긴 다리, 어두운 황색 털에 암갈색 줄무늬를 가진 녀석은 삵같기도, 표범 같기도 했고, 가족들은 아가, 호랑이 등 저마다의 호칭을 부르며, 밥을 챙겨주기 시작했다. 늦은 밤 무심코 대문을 열었을 때 녀석과 내가 동시에 놀라 우왕좌왕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녀석은 아마 작은 몸집으로 우리 집 옥탑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 잡동사니에 사는 모양이었다.


녀석, 이라고 적고 있지만 내가 주로 그 고양이를 부르는 호칭은 ‘꼬맹이’다. 꼬맹이가 우리 집으로 매일 출근한 지 어느덧 한 달 반이 되었는데, 그 사이 꼬맹이라는 호칭이 무색하게 자라 이제는 제법 청소년 티가 난다.(사람으로 치면 중학생?) 가족들은 빈 그릇을 보고 배를 곯았을까 싶어 재차 사료를 부어주는데, 녀석은 항상 단번에 사료그릇을 비우기 때문에, 가족끼리 서로 체크하지 않으면 녀석이 얼마나 먹어치우는지 알 길이 없다.

 


사실 밥과 잠자리는 부차적인 이유고, 녀석이 우리 집을 찾아오는 아주 큰 이유가 있다. ‘코인’ 우리 집에 산지 4년 차 된 수컷 고양이다. 어찌 된 일인지 꼬맹이는 첫눈에 코인이를 아주 마음에 들어했고, 이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당에 앉아 유리로 된 미닫이창 너머로 애타게 코인이를 부른다. 가끔 측은지심에 둘을 만나게 해주면 꼬맹이의 일방적인 애정공세에 코인이는 맥을 못 춘다.(한걸음을 떼려 하면 달려와서 머리를 비비고, 잠시 뒤면 놀고 싶어 안달이나 코인이의 목을 뒤에서 덮친다.) 처음에는 어미와 일찍 떨어져서 단순히 큰 고양이를 좋아하는 건가, 했지만 두 마리 모두 수컷이라 그 이유는 석연찮고, 코인이는 더더욱 꼬맹이가 성가신 눈치다. 타고난 순함으로 꼬맹이의 격한 표현을 다 받아주고 있지만, 꼬맹이가 어려서 꾸욱 참는 눈치랄까. 더군다나 내가 꼬맹이에게 관심이라도 보일라 치면 배신감 어린 눈으로 내 눈을 똑바로 보며 우는 소리를 낸다. 이 두 고양이들의 애타는 일편단심이 안타까우면서도 희한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내게 이들의 의미가 커질까 두렵다. 무언가를 책임진다는 게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코인이는 사 년 전 내가 시장바닥에서 두 눈이 고름으로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하여 덥석 집으로 데려온 아이다. 당시 식구들에게는 임시보호 뒤 분양을 보낼 거라 양해를 구했지만 정이 들어 쭉 데리고 있게 됐다. 지금은 고양이를 무서워하던 엄마까지 가방에 길냥이 간식을 담아 다니는 수준이 되었지만, 여전히 코인이는 ‘모두의 애정’을 받고, 온전히 ‘나의 책임’ 아래 있다. 그것은 내가 동의 없이 녀석을 데려왔기 때문에 감수해야 할 지점이기도 하나, 가끔은 속이 타들어간다.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는데 드는 사료비, 용품비, 병원비는 결코 적지 않다. 하얀 몸통에 주홍빛 얼룩이 도는 이 고양이의 털 덕분에 나는 검은 옷은 더 이상 입지 않는다. 고양이는 밥을 먹고 뛰어다니다가 이불 위에 울컥 토를 하기도 하고, 조금만 게으르게 스크레쳐를 교환해줘도 집의 벽지를 시멘트가 드러나도록 긁어놓는다. 이러한 모든 일이 생길 경우 뒷수습은 나의 몫이다. 가족들은 당연하게 나를 부르고, 피치 못한 일이 생겼을 경우에만 움직인다. 그들은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지 함께 키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물론 너무도 이뻐하지만 키우는 것은 이뻐하는 것만은 아닐 테다.)


코인이와 함께하는 일상은 매일같이 나를 웃음 짓게 해서 이 모든 일을 감수하는 데에 불만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또 한 마리의 고양이가 찾아오지 않는가. 문 밖의 고양이를 생각하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한 마리는 안에서, 한 마리는 밖에서 자는 게 아무래도 나를 불편하게 하지만 더 이상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나를 붙잡는다.



가을비가 내려 날이 쌀쌀하다. 그럼 나는 마당 한 켠에 마련한 스티로폼 박스에서 떨고 있을 꼬맹이를 생각한다. 문을 열어주는 일은 내게 너무 무겁다. 집에 들어오고 싶어, 애타는 목소리로 나와 나의 고양이를 찾을 그 모습이 나는 미리 안타깝다. 나는 핫팩을 전자레인지에 돌려 스티로폼 집안에 넣어주고, 밥그릇과 물그릇을 채워주며 괜히 꼬맹이 근처를 기웃거린다.


‘꼬맹이는 코인이를 좋아하지 사람을 좋아하는 건 아니잖아’

‘그런데 코인이는? 꼬맹이를 받아주며 스트레스를 받고 있잖아’

‘꼬맹이는 코인이를 좋아하고, 코인이는 나를 좋아하고, 나는 꼬맹이가 눈에 밟히는데 어쩌지?’


가을밤이 깊을수록, 나는 쉬이 잠이 오지 않는다.


한 번은 이런 꿈을 꾸었다.

꿈에서, 나는 황량한 돌길을 따라 걷다가 지면과 비슷한 높이의 우물을 발견한다. 가장자리에 거친 돌 몇 개가 쌓인 '웅덩이'에 가까운 우물.(우물이라 생각하는 것은 입구가 좁고 물이 청색으로 아주 깊어 보였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속싸개에 쌓인 아기가 동동 떠있다. 가까이서 보니 아기는 물이 찰랑 일 때마다 얼굴이 잠겨 들고 있어서 아주 위태로워 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곳이 원래 있을 곳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위태로운 건 아기가 아니라 아기를 보는 나 일지도 모른다.'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그것도 잠시,  아기의 얼굴이 다시 잠겨 드는 순간 나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 아일 수면 위로 건져 올린다. 손에 닿는 물은 이상하게도 따듯했고, 점액질 같이 끈끈했다. 그 촉감을 느끼며 나는 슬퍼져 잠에서 깼다.


캄캄한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자니, 속절없이 꿈이 마음으로 쏟아진다.


문밖의 고양이는 자라나고, 겨울은 다가온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술] 너와 먹지 못한 밥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