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만큼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또 있을까? 돌이켜보면 나의 '맛'에 대한 동경은 그림책을 읽던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어릴적, 계몽사에서 출판한 디즈니 전집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지도 모른다. 단추 하나로 기가막힌 수프가 탄생하는 《단추로 끓인 수프》이야기를.
단추 하나로 수프를 끓일 수 있어요.
지독한 짠돌이인 스쿠루지 에게 데이지가 이렇게 말을한다. 귀가 솔깃해진 스쿠루지 영감이 군침을 꿀꺽 삼키며 수프를 끓여보라하자, 데이지의 술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여기에 뼈다귀만 넣으면 맛이 더 좋을텐데... 소금과 후추를 넣었더니 더 맛있었어요! 스크루지는 겨우 그걸로 맛있는 수프를 맛볼수 있다면야, 라는 심정으로 식재료를 하나씩 내어주고, 결국 맛있는 수프가 완성되어 모두가 둘러 앉아 따듯한 식사를 했다는 이야기.
1990년대 초반, 오뚜기 크림스프가 수프인생의 전부였던 내게, 단추수프를 끓이기 위해 스쿠루지가 가져온 식재료는 정말이지 이채롭고 흥미진진했다. 동그랗고 빨간 순무, 창고 가득 걸려있는 델리미트, 선반가득한 향신료까지. 다같이 둘러앉아 단추수프를 먹는 장면에서는 정말이지 그 맛이 궁금해져서 침을 연신 삼켜댔더랬다.
그리고 책속의 맛 하면 또 하나 빠질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 바로 국어 교과서에 실려있던《이해의 선물》이다. '버찌씨로 사탕 값 내는 이야기', 혹은 '위그든씨의 사탕가게 이야기'라 하면 더 친숙할 테다.
이쪽엔 박하 향기가 나는 납작한 박하 사탕이 있었다. 저쪽엔 아주 커다란 검드롭스가 있었는데, 깨물기 좋게 말랑말랑하면서 수정 같은 설탕 알갱이로 오돌도톨하게 뒤덮혀 있었다. 공단 쿠션, 그 셔벳으로 속을 채운 작고 단단한 사각형 사탕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리고 쟁반에는 조그만 젤리베이비, 그 뒤에 있는 상자에는 굵직굵직한 곱스토퍼가 있었다. 이 사탕은 입에 넣으면 흐뭇하게 뺨이 불룩해지는데다, 입 안에서 너무 많이 굴리거나 색이 어떻게 변했는지 보려고 입 밖으로 너무 자주 내지만 않으면 적어도 한 시간 넘게 빨아먹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단단하고 반들반들하게 짙은 암갈색 설탕 옷을 입힌 땅콩을 위그든 씨는 조그마한 주걱으로 떠서 팔았는데, 두 주걱에 1센트였다. 물론 감초 과자도 있었다. 그것 역시 베어문 채로 입 안에서 녹여 먹으면, 꽤 오래 우물거리며 먹을 수 있었다. - 본문 중-
버찌씨를 돈 대신 받고 2센트를 거슬러 주었다는 따듯한 일화보다 어째 더 머릿속에 남는 것은 위그든씨 가게의 사탕들이었다. 세상에, 감초로도 사탕을 만들어 먹구나! 꽤 오래 우물거리며 먹을 수 있다는 묘사로 봐서 어쩐지 갈색에 질깃질깃하면서 은은한 단맛이 감도는 그런 요상한 사탕일것 같다는 상상을 멋대로 하며 나는 책장을 읽어내려갔다. 아, 동화책에도, 교과서에도 이렇게 처음보는 음식이 많다니!
그렇다. 이런 책들을 읽고 자란 나는 어느새 도전 정신 투철한 어른이 되어, 사정이 닿는 선에서나마 열심히 맛들을 탐 하는 중이다. 까짓 것, 직접 먹지 못해도 어떤가? 책만 있다면 나는 여전히 미지의 맛을 상상할 수있고, 친숙해서 오히려 침을 삼키게 하는 맛깔 스러운 조합에 한번 더 감탄 할 수 있는 것이다.!
도서관을 기웃거리던 나는 감탄하며 이책을 집어들 수 밖에 없었다. 고독한 미식가의 원작자가 쓴 에세이라는 것을 알아서 였냐고? 전혀.(도서관의 책들은 보통 띠지가 제거되어 있다.) '낮의 목욕탕과 술' 이라는 환상적인 조합과, 저 대충그린듯한 일러스트 때문이었다. 아, 어쩐지 한량 같으면서도 내공있는 유유자적 일기를 기대하며 나는 책장을 펼쳤고, 역시나 책은 기대에 부응했다. 열개의 에피소드는 모두 작가가 목욕탕을 들른 후 술을 마시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있다. 이를테면 기치조지에 있는 벤덴탕에 들러 한차례 목욕을 한 후, 근처 비어홀에서 맥주를 마시는 이야기가 한 챕터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벌건 민낯으로 목욕용품을 품에 안고 돌아오는 목욕길은 언제나 집과 가까워야 안심이지만 책으로 나마 작가의 목욕순례기(?)를 읽고 있으면, 어쩐지 당장 샤워라도 하고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은 심정이 되어버린다. 봄밤엔 정종, 여름밤엔 맥주, 가을에는 와인, 겨울에는 위스키!
백곰, 판다, 펭귄 등 귀여운 동물들을 실컷 볼 수 있지만 말장난과 드립이 난무하는 만화책. 슬로우 & 개그 동물라이프가 궁금한 사람들이 읽으면 분명 취향 저격일 듯하다. 표지는 마냥 귀엽지만 내용은 살짝 병맛의 기운이 있다. (그 와중에 귀여워서 더 웃기다는 게 함정.) 백곰이 운영하는 카페에서 일어나는 소소하지만 웃긴 에피소드를 볼 수 있고, 중간중간 홍차 우리는 팁, 쿠키 만들기 같은 레시피들이 등장한다. 백곰카페를 중심으로 한 소소한 음식레시피와 유머가 궁금하다면 한번쯤 읽어보시기를 추천한다.
누구나 한가지 씩 입에 대지 않는 식재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연히 한 두 번 가까이 하다보면 '어라, 꽤 괜찮잖아?'하고 슬며시 좋아지는 식재료도 있는법. (나의 경우에는 멍게와 가지) 이 책에는 작가가 사랑하는 '식재료'에 대한 이야기가 계절별로 담겨있다. 채소가게에 고개를 내민 죽순을 보며 봄이 왔음을 실감하고, 음식점의 시즌 한정 갯장어 메뉴를 보고 여름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런 계절별 에피소드 중에는 영 낯설거나 입에 맞지 않던 식재료들이 우연한 기회로 마음에 훌쩍 들어와버린 이야기도 더러 있는데, 무엇이든 잘 먹는 사람의 화려한 한 끼 보다, 편식쟁이 작가의 마음을 월담한 식재료들의 소박한 이야기가 더 정겹고 공감이 가 즐겁게 읽었다. 일본의 식재료와 간단한 가정식 레시피를 기대한다면 추천!
마스다 미리, 그녀는 유독 여성 팬이 많은 작가이다. 그녀의 대표작으로는 가장 인기 있는 '수짱 시리즈' 및 영화화까지 된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등이 있다. 나 역시 이 작품들 모두 재미있게 읽었지만, 그래도 내가 가장 낄낄대며 봤던 책을 하나 꼽으라면, 이 책을 추천하겠다. 남동생의 입장에서 쓴 누나 관찰기 같은 느낌이랄까, 나 역시 남동생이 있는지라 공감의 마음을 담뿍 담아 읽었다. (물론 가끔씩 뜨끔하는 포인트가 아주 많다)음식에 얽힌 에피소드라든지, 마음가짐이나 태도가 여자의 입장에서 공감되는 면이 많다. sns보듯 마켓컬리를 들여다보고, 매번 실패하면서도 새로운 식이요법과 요리법을 실천하는 사람이 나뿐만이 아니란거, 다 안다.
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일러스트레이터 안자이 미즈마루의 '조합'을 애정한다. 나는 단순하지만 한방이 있는, 그러니까 대강 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핵심과 농담이 있는 투를 좋아하는데 (글이건 그림이건) 그런 면에서 하루키의 에세이와 안자이미즈마루의 그림의 콜라보는 정말이지 피식 웃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밸런타인데이의 무말랭이 에는 <두부에 관하여>라는 글이 세 꼭지에 걸쳐 나오는데, 첫 꼭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 칼럼에는 안자이미즈마루씨가 쭉 삽화를 그려주고있는데, 나는 딱 한번이라도 좋으니 안자이씨가 그림때문에 고심하는 꼴을 보고싶어 그리기 어려운 주제를 꽤나 여러번 시도했다. 그러나 완성된 그림을 보면 고심한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아무리 고심한 흔적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프로라지만, 가끔은 잘 안된다, 어렵다 하는 곤경에 빠뜨려놓고 즐겨보고픈게 인지상정이다...(중략)... 그러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떻게 하면 안자이미즈마루를 당황하게 만들 수 있을까? 대답은 한가지 밖에 없다. 단순성이다. 예를 들면 두부처럼 말이다.
나는 사실 고소한 맛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 두부를 거의 먹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부를 떠올리면 묘한 애정이 샘솟는다. 네모 반듯하고 따듯한 모양이 어쩐지 소박하고 단정한 느낌을 주는데다, 깨지기 쉬운 연약함마저 섬세함을 자아내는 구석이 있어 자체만으로도 소중해 보인달까. 어쨋든, 이런 두부를 가운데 두고 벌어지는 무라카미하루키와 안자이미즈마루의 밀당을 읽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아, 그리고 이미 눈치 챘겠지만 하루키의 심술에도 불구하고 안자이 미즈마루의 두부 그림은 결국 표지까지 차지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