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치, 달콤한 독약

키치는 선인가, 구토인가.

by 초이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나에게 키치를 남겼다. 키치에 대한 궁금증은 나를 <키치, 달콤한 중독>이라는 조중걸 교수의 책으로 안내했다. 이 책은 생각 이상으로 더 많이 어려웠다. 그리고 내 생각 회로를 키치로 가득하게 만들었다.




키치는 무언가 나쁘고 속악한 것이라 말한다. 많은 철학자들이 키치를 자기기만, 똥, 구토 등으로 표현한다. 키치의 특징은 남을 속이고 자기 자신도 속인다는 점이다. 키치는 대상의 본연의 의미나 감정은 중요하지 않다. 자기 자신의 허구적인 모습에 취해 살아간다. 그래서 이차적 감정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을 자기 자신의 존재의 이유로 활용한다. 예를 들면 어려운 사람에게 기부를 하게 되는 행위에서 어려운 사람에게 안타까움을 느껴서 기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기부를 하는 자기 자신의 사회적인 위상이 높아지는 것에 취하게 되는 행위를 키치라고 볼 수 있다.



<사피엔스>에서는 “상상의 산물”이라 표현하기도 하는데, 인간은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 보이지 않는 것들을 존재한다고 상상한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을 오랫동안 유지해 왔다. 우리가 아는 모든 신념은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실재한다고 믿는 것일 뿐이다. 그런 것들은 주로 지식인 내지는 지배 계층이 세운 기준이다. 그래서 그 기준이 마치 보편타당하고 수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인간들이 세운 기준일 뿐이다. 즉, 의미 없는 것에 거짓으로 의미를 붙여 의미 있다고 위장하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것을 볼 때 자주 나타나는 패턴을 발견하면 우리는 확실성은 없지만 실재성을 인위적으로 부여하고 그것을 믿고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니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아도 마치 보이는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예술 작품을 보고 우리가 무언가를 느낀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우리가 느껴서 말하는 것이 맞는가? 마치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외치는 것은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척하고자 하진 않았나 뜻밖에 반성을 하게 된다.






그러나 나는 키치가 그리 나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키치는 내가 가진 도덕적 가치관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내 행동을 선하게 이끄는 나의 신념조차도 결국 키치의 범주에 속한다. 우리 안에서 어떤 것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그 기준의 모든 것은 사실 키치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나의 삶에 키치가 주는 안정감은 분명히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를 배우고자 하는 욕망은 사실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려는 욕망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나의 삶은 그 욕망으로 인해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이 그냥 키치일 뿐이니 앞으로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보이는 대로만 배우면 내 삶은 더 발전할 수 있는가? 나의 생각에 더 집중하고 나의 감정에 더 집중한다면 자기중심적인 사람만 되지 않을까? 적당히 키치를 이용해야 우리는 사회적인 사람이 되고, 그 안에서 발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예술작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예술 작품을 보며 내가 느끼는 것만이 전부라고 단정 짓는다면 작품을 보는 것에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이 되어버린다. 모더니즘 예술은 창조해 내는 그 과정 자체를 예술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러면 우리는 후대의 사람에게 우리의 문화를 간접적으로 느끼게 해 줄 방법이 없다. 이런 의미에서 키치는 우리 삶에서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렇게 키치에 대해 읽고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키치는 참 어렵다. 키치를 좋다 나쁘다 이분법적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처럼 보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돕는 것을 비난할 수 있는가? 어쩌면 키치는 나를 기만하면서도 나를 좋은 사람으로 이끌어주는 장치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키치는 나에게, 우리에게 뗄 수 없는 존재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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