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히즘, 불편한 쾌락
모든 것을 이해하고 포용하는 사람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바로 사랑을 가장한 폭력이 아닌가? 사디즘, 마조히즘은 나에게 폭력으로만 여겨졌다. 취향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잔인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책은 나에게 읽는 것 자체가 약간의 도전정신이 필요했다.
이 책은 사실 선정적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단지 가학적인 부분만 보여준다. 불편한 구절을 말하자면 책의 모든 내용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다. 그런데 나는, 우리는 왜 마조히즘이 불편할까? 나는 때리는 것과 맞는 것 모두 사랑이라고 불리는 게 불편하다. 어째서 고통을 주고받는 게 사랑이란 말인가?
주인공 제베린은 반다에게 계속 자신의 환상과 욕망을 따라줄 것을 강요한다. 망설이던 반다는 결국 그 제안을 받아들여 제베린을 자신의 노예로 삼는다. 제베린은 반다에게 가학적으로 지배받는 것에 수치심을 느끼면서도 그 안에서 쾌락을 느낀다. 제베린은 자신의 인생 자체를 본인 스스로 끌고 가는 것이 두려운 사람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절대자에게 자신의 통제권을 부여하고 그대로 따르며 느끼는 안정감을 사랑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모피를 입은 비너스>에서 나에게 가장 불편한 부분은 가학적 행위를 하는 부분과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반다의 행위 자체이다. 그래서 이러한 가학적 부분을 잠시 제거하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되면 제베린과 반다의 권력과 관계의 주도권이 남는다. 흔히 사디즘. 마조히즘은 섹스를 할 때 나타나는 그들의 취향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반다가 섹스를 할 때뿐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도 제베린을 지배한다. 일반적인 연인이 섹스를 할 때, 주도하는 사람과 따라가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주도권을 쥔 사람과 그 리드에 따라가는 사람은 서로 그 상황에서 더 만족감을 느낀다면, 이것 또한 사디즘과 마조히즘으로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폭력이라는 수단에 갇혀 실질적인 것은 권력과 관계의 문제라는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 같다. 인간은 언젠가부터 오랫동안 주도하는 쪽은 남성이고, 따라가는 쪽은 여성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 관계의 역설을 보여주는 부분은 흥미롭다. 남성성에 부여된 권력의 상징성을 비틀었다.
반다는 제베린을 사랑했을까? 사랑하면서 상대에게 가학적 행위를 할 수 있을까? 나는 가학적 행위에 폭력 수위를 낮춰서 생각해 보았다. 만일 반다가 제베린을 사랑해서 볼을 꼬집고 깨문다면 갑자기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나도 가장 귀엽고 사랑스러운 우리 집 강아지의 볼을 비비고, 끌어안는다. 강아지가 싫다고 해도 놓아주기 싫고 더 만질 때도 있다. 그 순간 나는 사랑을 가학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내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사랑해서한 행위가 누군가가 볼 때는 가학 행위일 수도 있구나!
그렇다고 해서 사랑을 가장한 채찍질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인간 사회에서 내재된 도덕적 관념이 인간이 인간을 노예로 삼고 채찍질을 하는 것에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다. 이 책의 채찍질은 어쩌면 우리가 무시하고 있는 우리 안의 어떠한 쾌락과도 닮았다. 사회에서 용인할 수 없고, 심지어 나 조차도 부끄러워서 감추고 싶은 욕망. 나만의 환상과 쾌락을 남들과 공유할 자신은 없다. 나는 쾌락을 추구하면 안 된다는 인식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우리 사회를 유지하는 장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억압된 쾌락이 오히려 잘못된 방향으로 빠지면 더 나빠진다는 사실도 생각해 봐야 할 문제이다.
오히려 내 안에 내재된 쾌락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면 별거 아닌 것이 될 수도 있다. 조금 더 가볍게 우리의 쾌락을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나? 이 책은 나에게 그러한 교훈을 준다. 나의 쾌락을 마주하자! 나의 환상을 숨기지 말자!
(물론, 상대가 원치 않는 폭력과, 지나친 폭행은 불편한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