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성 그리고 평등
나는 평등함에 회의적이다. 인간은 평등을 추구하는 척하지만 진심으로 평등을 바라는지는 의문이다. 인간의 습성은 우위에 서고 싶은 것이지 모든 이들과 동등해지고 싶은 것 같지는 않다. 이 지구에 사피엔스가 존재한 후로 지금까지 인류는 진정한 평등사회를 이루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과거에 태생과 계급으로 나누어진 것이 지금에는 부와 명예로 옮겨졌을 뿐이다.
<연을 쫓는 아이>와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오래된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불과 1970년부터 비교적 최근인 2000년대를 모두 보여주고 있다. <연을 쫓는 아이>는 아프가니스탄의 부르주아 계층으로 살던 남자의 이야기이고,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하층민에 가까운 여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연을 쫓는 아이>를 읽었을 때는 태생에 대한 계급의 차이, 빈부 격차를 보여주고 있다. 함께 태어난 아이가 신분의 차이로 인해 사회에서 받는 대우가 다르다. 서로를 친구로 여기지만 부르주아에 속하는 아이는 다른 아이를 진정 친구로 부르기를 꺼린다. 아프가니스탄만 그러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현재에도 보이는 모습이다. 어떤 것을 기준으로 삼게 되는 것의 차이이다.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은 계급의 차이에 더해 사회적으로 더 많이 억압된 아프가니스탄의 여성들을 보여준다. 아프가니스탄은 공산주의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는데, 많은 남자들은 군대로 끌려간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여자들은 그때 비교적 자유롭다. 이 책은 그 부분을 놓치지 않는다. 라일라의 아버지 바비의 입을 빌려 그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억압이고 존엄성이 박탈당했다고 느껴지는 시대였지만, 그게 여성에게는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권력의 아이러니란 이런 것일까?
공산주의의 상징 소련이 멸망하게 되고 아프가니스탄에는 탈레반이 권력을 잡는다. 아프가니스탄 여성들에게 트였던 숨통은 다시 옥죄어진다. 남자가 없이는 길을 함부로 돌아다닐 수도 없다. 60대의 남자가 10대의 여자와 결혼하고 자신의 비위를 상하게 하면 무자비하게 구타한다. 이러한 세상에 놓여서 자아를 잃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들에게 인간의 존엄성은 왜 남자의 존엄성으로만 해석되는지 의문이 든다. 누군가의 우위에 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피엔스는 이번엔 힘을 권력으로 삼아 여자의 우위에 서려는 것이다.
평등은 참 조심스럽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평등이 그저 자신을 끌어내리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여성의 권위는 과거보다 좋아지긴 했다. 하지만 여성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성과 동등해지고 싶어 한다. 그것이 왜 불편할까? 우리는 평등과 인간의 존엄성을 추구하면서도 막상 그 주장과 마주치면 불쾌해지곤 한다. 어쩌면 인간이 추구하는 평등이란 내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