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를 하는 이유
독서를 왜 하냐고 물어본다면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책이 좋아서요.”
나는 정말 어릴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전래동화를 읽으면서 울고, 웃고, 행복하고, 슬펐다. 그게 자연스럽게 이어져왔다. 성인이 되면서 재미난 것들이 늘어났다. 스마트폰을 하루종일 끼고 살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런데도 무언가 나를 채우지 못하는 느낌이 들 때면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 책을 사는 것만으로도 텅 비었던 내 삶이 차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책이란 게 혼자서 즐기기에는 할 말이 너무 많다. 왜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마주치면 누군가와 나누고 싶다. 하지만 책은 함께 읽지 않은 사람에게 말해봤자 분위기만 숙연해진다. 나는 독서를 하면서도 가끔씩 갈증을 느꼈다. 그래서 결국 독서모임이란 것에 발을 들여놓았다. 그렇게 나는 작년 한 해 동안 60권 가까이 책을 읽었다. 총균쇠, 사피엔스, 코스모스, 이기적 유전자와 같이 이름난 책들에 빠져 들었다. 이런 책을 읽고 나누는 것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는 서양 철학의 조상인 플라톤의 책까지 읽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제목이 지나치게 매력적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불교에 큰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다. 6-700쪽에 육박하는 책도 독파했으니 <싯다르타>처럼 얇은 소설책도 어렵지 않게 읽을 것이라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눈에서 글자가 튕겨 나갔다. 좀처럼 책에 집중을 하지 못했다. 원래 소설을 읽을 때는 머릿속으로 마치 그 장면을 목격한 것처럼 그림이 그려졌었다. 그런데 <싯다르타>의 텍스트는 내 머릿속에서 이미지로 구현되지 않았다. 결국 최초로 중도포기를 하고야 말았다.
그러면서 나에게 책과의 권태기가 왔다. 책에서 무언가를 얻고, 나누는 것에 집중을 하다 보니 본연의 재미는 사라져 버렸다. 보고 싶은 책은 쌓여있는 데 처음으로 그게 두려웠다. 내가 이 책을 씹어 먹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감이 들었다. 지금 나에게 독서를 왜 하냐고 물어본다면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전투적으로 책을 읽는 것을 내려놓기로 했다. 인문, 철학책을 덮어놓고 소설을 더 자주 읽기 시작했다. 인물 하나하나에 집중해서 읽었다. 한동안 안 보던 드라마도 열심히 보았다.
며칠 전 독서모임의 모임원분이 <싯다르타>를 읽고 발제를 하겠다고 신청했다. 이 책에 꼭 다시 도전하려던 마음이 흐릿해졌는데, 마침 읽어야 할 명분이 생겼다. 다시 책을 펴 들었다. 놀랍게도 이번에는 생생하게 그림이 그려졌다. 싯다르타와 고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장소인 강이 머릿속에서 재생이 되었다. <싯다르타>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깨달음은 용써서 오는 것이 아니다. 치열하게 생각한다고 오는 것도 아니다. 자연스럽게 내 삶 속에서 다양한 번뇌와 고통, 시련과 극복을 통해 생기는 것이다. 하루아침에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애쓰지 마라. 결과에 집착하지 마라. 느리더라도 온전히 과정을 느껴보라. 내가 왜 슬럼프에 빠졌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나는 가장 사랑하는 나의 취미 독서에서 마저 지름길을 찾고 있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나는 무시당하기 너무 좋은 조건이었다. 20대 초반의 어린 나이, 어린 여자, 사회 초년생 등 모든 면에서 전문가의 향기를 줄 수 없었다. 나름대로 기술직에 가까운 업무였기에 그 시절의 나는 얕잡아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 눈빛에서 벗어나고 싶어 나는 빨리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기술이란 것은 하루아침에 나한테 숙련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그러니 나는 편법을 써서 그 시간을 단축했다. 선배들이 작업했던 내용을 매일 모니터 하고 그것을 기억했다가 그대로 가져다 썼다. 나만의 기술이 아니라 그들의 기술을 가지고 내 것인 양 사용했다. 그 결과로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나만의 것을 만드는 데 두려움을 느꼈다. 기초부터 쌓지 못하고 조급하게 굴었던 것이 나비효과로 작용한 결과이다.
이 책의 주인공 싯다르타는 남들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다. 실존하는 사람 중 가장 현자였던 스승 고타마에게서 떠난다. 그는 깨달음이란 것은 배움으로 오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그 말의 의미는 깨달은 자를 쫓아봐야 깨달음이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싯다르타는 속세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긴 아들을 보면서 자신의 아버지도 떠올리게 된다. 싯다르타는 사랑도 해보고 돈도 벌면서 쾌락의 삶도 살았다. 그러다 문득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그리하여 자신의 재물을 버리고, 사랑도 버리고 뱃사공이 된다. 즉, 모든 쾌락 끝에서 오는 허무함까지 맛보게 된다. 이 모든 경험을 바탕으로 싯다르타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반면, 고빈다는 고타마를 쫓아 계속해서 사문의 길을 걷는다. 그러다가 싯다르타를 마주치게 되는데, 자신과 달리 깨달음을 얻게 된 싯다르타에게 어떻게 하면 해탈할 수 있냐며 묻기 시작한다. 고빈다는 깨달음이란 결과에 사로잡혀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을 생략한다. 마치 편법을 써서 능숙해 보이려 했던 나처럼.
최근에 <시간의 향기>란 책을 보면서 느낀 점은 <싯다르타>로 이어졌다. 조급해하지 말자. 나는 나만의 속도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내가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기억해 보자. 그때 맡았던 향, 들었던 소리, 보았던 풍경에 집중하자. 결과에 집착해서 과정을 경시하면 결국 결과로 도달할 수 없다. 나의 현재는 돌아올 수 없는 과거가 된다. 다시없을 지금 이 시간 속에 행복을 느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