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명의 나, 여러 명의 나
지금 나는 온전히 한 명의 나인가? 아니면 수많은 경우의 수로 떠돌고 있는 ‘나’들 중 하나인가? 방구석에 앉아 글을 쓰는 나와 달리 또 다른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에게 관측된 나는 지금의 나라면, 관측과 동시에 잊혀진 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내가 양자역학에 관심을 가지고 나서 종종 빠져들었던 생각이다. 20살 때부터 Mbti 검사만 했다 하면 두 번째 자리에 항상 N이 나오는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 속에서 또 다른 나를 생각해 본다. 어쩌면 양자역학에 끌리게 된 이유도 이 상상력을 확장시킬 수 있기 때문인가?
그렉 이건의 SF 소설 [쿼런틴]에서는 나의 이러한 상상력을 더욱 짜릿하게 자극한다. 앙상블이라는 개념은 수많은 경우의 ‘나’들이 존재하는데 그 모든 ‘나’들의 상태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짜장면을 먹을지 짬뽕을 먹을지 고민 끝에 짜장면을 먹었다고 치자. 짜장면을 먹는 나와 동시에 짬뽕을 먹은 나도 존재할 수 있다. 선택에 의해 관측된 짜장면 먹는 나는 과연 유일한 버전이 맞는가? 나는 내 자유의지에 의해 짜장면을 선택한 것은 맞는가? 사실 나는 무수히 많은 나의 상태 중 격리된 상태가 아닐까?
이렇게 끊임없이 질문하다 보면 잠깐 ‘나’란 존재의 가치에 혼란이 온다. 인간이란 사실 참으로 하찮은 존재가 아닌가. 무수히 많은 경우의 수를 다 알지 못하고 내 눈으로 보이는 것만 느낄 수 있으니 말이다. 누군가가 나를 다마고치처럼 육성하고 있는 것을 나는 내 자유의지로 살아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아닐까?
양자역학은 30년 가까이 살아온 나의 기억을 의심하게 된다. 시간이란 과거와 현재가 이어져있고 내일과 같은 미래와 또 연결될 예정이다. 그런데 양자역학은 그 시간의 순서를 파괴한다. 양자역학에서는 시간의 순서가 없다. 즉, 과거라는 것이 지나가서 다시는 못 올 순간이 아니란 말이다. 다시 돌아가 충분히 바꿀 수 있는 영역이다. 양자역학은 우리가 믿는 모든 것들을 파괴한다.
유발하라리는 [사피엔스]에서 인본주의는 인간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이라 표현한다. 이 상상의 산물에 갇혀 우리는 인간이 모든 우주의 질서를 인지하고, 가장 우수한 존재라 믿는다. 양자역학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내가 관측할 수 없는 ‘나’들이 어찌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어떤 존재의 증명은 인간을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오류에 빠진 것이다.
[쿼런틴]에서 포콰이처럼, 닉처럼 나도 나를 확산시켜 또 다른 나를 느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그 모든 ‘나’들을 느끼면 나는 얼마나 혼란스럽겠는가? 동시에 내가 진짜 고유의 나라는 사실이 깨지게 된다면 나는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인간이 양자중첩의 세계를 관측할 수 없는 것은 어찌 보면 다행일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고유한 ‘나’를 위해 오늘도 열심히 할 수 있지 않은가? 모든 경우의 수에 존재하는 ‘나’를 만날 수 있다면 나는 과연 최선을 다해 살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은 또다시 나를 양자역학에 빠지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