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작된 추억

조작된 아련한 추억

by 초이

어떤 단어들은 오래된 추억들을 꺼내보며 아련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목욕탕에서 목욕 후 먹는 바나나우유]

[초등학교 운동회]

[하얗게 쌓인 눈]

[실내화가 담긴 실내화 주머니]

등등..



괜히 이런 추억이 묻은 단어를 보면 내 안에 기억 조작이 일어난다. 목욕탕에서 목욕 후 엄마 손을 잡고 바나나우유를 먹었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바나나우유를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목욕 후 먹은 적이 없다.



초등학교 운동회를 떠올리면 하얀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열심히 뛰는 내가 떠오른다. 열심히 이어달리기를 하고 줄다리기를 하며 땀을 뻘뻘 흘리는 내가 떠오른다. 사실 그런 기억은 없다. 초등학생이던 나는 운동회를 좋아하지 않았다. 내리쬐는 태양에 눈살을 찌푸리며 앉아있던 건 같다. 부채춤을 해야 해서 남아서 연습하느라 짜증을 내던 기억은 있다.


하얗게 쌓인 눈을 떠올리면 하얀 세상에서 뛰어노는 내가 떠오른다. 하얀 눈을 밟으며 강아지와 펄쩍펄쩍 뛰어노는 내가 떠오른다. 하얀 눈에 누워 팔다리를 휘젓는 내가 보인다. 아니다. 나는 눈을 좋아하지 않는다. 눈이 오면 밖을 나가는 순간부터 화가 난다. 하얀 눈 위에서 뛰어다니는 건 넘어지고 싶어서 환장한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왠지 아련하고 왠지 러브레터 속 첫사랑이 존재할 것만 같다.



실내화 주머니를 빙빙 돌리며 하교하는 나는 친구들과 떠들며 집에 가고 있다. 가는 길에 분식집에 들려 컵 떡볶이를 먹으며 즐거워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실내화 주머니를 들고 다니기 싫어서 실내화를 신고 다니다 혼나기만 했다.




나에게 없는 추억이 강제로 생성되는 건 왜일까? 뻔한 추억하나 없는 나 자신에게 상상 속에서라도 그런 추억을 만들어 주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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