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비겁한 변명?

플라톤의 저서를 읽고

by 초이

플라톤 저서 두 권 <국가>와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향연>을 연달아 읽었다. <국가>를 읽고 소크라테스가 왜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철학자인지 알 수 있었다. 당시에 노예나 다름없는 여성에게도 지혜를 갖출 경우에는 통치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하다니, 정말 훌륭한 분이지 않나? <국가>는 내내 정의에 대해서 말한다. 당시 일부 소피스트는 불의가 정의를 앞선다고 말하는 데 소크라테스는 특유의 변증법으로 그 말을 반박한다. <국가>는 나에게 어떤 책 보다 정의의 필요성에 대해 사색하는 시간을 만들어 주었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소크라테스가 고발되고 아테네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는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래서 그 책을 읽고 당시 실제 역사와 비교하며 생각을 해 보았다. <국가>를 읽으며 웅장해졌던 나의 존경심은 조금 머쓱해졌다. 소크라테스의 아내는 당시 돈벌이도 못하는 소크라테스의 무료 교습 활동을 싫어해서인지 악처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런데 아이를 주렁주렁 낳아놓고 돈을 벌지 않고 무료로 강의하는 남편을 무엇을 보고 예뻐할 수 있겠는가? 당장 아이들이 굶어 죽게 생겼는데 철학적 삶을 산다는 소신으로 돈을 버는 행위는 일절 안 하는 남편. 나라도 미워서 화낼 것 같다. 소크라테스는 스스로 남긴 저서가 없어 후세 사람인 나는 플라톤의 눈을 빌려 그를 볼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훌륭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단지 플라톤이 만들어낸 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기호처럼 모든 책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그것은 플라톤이 만들어 낸 이미지 메이킹일 수도 있다.




소크라테스는 비겁하다. 스스로 말하길 정치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고, 오직 철학적 삶만 설파하며 다녔다고 한다. 그건 지독한 이상주의자에 불과하다. 또한, 본인 말에 따르면 누명이고 억울한 선고인데, 그것에 그냥 순응하고야 만다. 철학적 삶은 죽어야 완성된다는 말을 하면서. 그러나 사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 살아내려는 사람이 더욱 힘들고 고통 속에 살 수밖에 없다. 죽음 빼고는 모든 것을 다 해야만 그 신념을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해야 한다는 소명 때문에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죽음 보다 더 고통인 궁형을 받아들였다. 그의 의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사기>를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소련의 전체주의를 비판하기 위해 예브게니 자미아틴은 소련을 비판하는 글을 쓴다. 이런 사람들과는 달리 소크라테스는 그냥 죽음으로써 홀가분해 보이기까지 한다. 죽음에 대한 그의 생각은 자신의 편안함을 위한 변명이라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개 소시민 독자에 불과하지만 위대한 철학자에게 이런 비판을 한 번 던져본다. 철학자에게도 비판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도 많은 시행착오를 걸쳐 나만의 생각을 장착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나 플라톤은 절대적인 진리와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절대적인 진리가 없다는 사실이 더 와닿는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 철학자들을 통해서 인지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해야 할 정의, 이데아는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이데아는 사람마다, 시대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적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서로에게 해악이 되지 않고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진리는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오래된 철학자들에게 나는 다른 것이 아니라 진리에 대한 사색을 배우게 된다. 지금은 진리라는 말에 오그라들고 괜히 진지한 것 같아 거부감이 드는 시대이다. 하지만 우리는 진리에 대한 사색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사색을 외면하는 사회는 아름다움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철학책을 읽고 사색하는 삶에 계속 도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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