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르바는 될 수 없겠다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은 사람들에게 이 책의 키워드를 뽑아보라고 말한다면 대부분 “자유”를 생각할 것 같다. 카잔차키스가 조르바를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자유라고 생각한다. 굳이 내 인생에서 가장 좋아하는 키워드를 뽑자면 나 또한 자유이다. 자유에 대해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자유를 가장 많이 추구하려 한다. 그렇다면 나는 조르바 그 자체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하면 절대 그렇지 않다. 그가 누리는 자유와 내가 사유하는 자유는 이름만 같고 속성은 전부 반대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완독 하기까지 크고 작은 장벽이 많다. 내가 싫어하는 단어들을 모아놓은 것처럼 듣고 싶지 않은 말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기 때문이다. 모든 여자를 사물 이하로 취급하는 워딩을 볼 때마다 다 읽고 얻는 거라곤 스트레스밖에 없지 않을까 생각을 했다. 읽는 내내 조르바가 쓰는 단어들은 책을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을 들끓게 했다. 그럼에도 완독을 한 것은 워딩을 이겨내는 것이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믿음이 다 닳아 없어질 때쯤 조르바가 살짝 감동을 주긴 했다. 하지만 줄거리를 통틀어 나는 조르바에게 이입할 수 없었다. 조르바의 워딩 말고도 여러 가지 면에서 이 책은 왜 유명한 책인지 의문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1. 줄거리를 요약하라고 하면, 크게 기억에 남은 장면이 없으며, 딱히 기승전결이 없다.
서사와 인과관계에 집착하는 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는 다소 평면적인 진행이었다. 큰 사건은 한 두 개 정도로 진행이 되며, 그 마저도 금방 마무리되는 느낌이다. 그래서 서사가 중요한 사람에게는 줄거리 자체가 주는 감동은 없다. 단지, 문장이 수려하여 내가 그리스 앞바다를 바라보고 앉아있는 느낌은 준다. 세상에서 가장 낭만적인 바다 앞에서 거친 조르바를 만나고 있는 느낌이다.
2. 조르바보다 화자인 ‘나’에게 더 이입이 된다.
제목부터 전체적인 주제까지 조르바가 이 책의 핵심 인물이자 주인공이다. 그런데 조르바의 감정선은 나에게는 너무나 혼란스럽다. 말하고 싶은 것은 다 말하고,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버리는 그는 흡사 망나니 같다. 망나니 조르바보다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나’가 훨씬 더 공감되었다.
3. 모든 욕망의 대상을 ’ 여성‘으로 나타낸다.
조르바에게 여성이란 그저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 이성도 없고 남자에게 기생해서 사는 무의미한 것이다. 조르바뿐 아니라 등장인물 모두가 여성을 욕망한다. 그리고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켜 주지 않으면 죄인 취급을 한다. 등장인물 중에 과부가 나오는 데 그 인물은 모든 남성의 욕망의 대상이자 동시에 다른 여성들의 질투의 대상일 뿐이다. 과부가 남자를 거절하면 남자의 순정을 가지고 논 부정한 존재가 된다. 여성을 이렇게 묘사하기 때문에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과 싸우느라 이 책이 회자되는 건 사실 세상이 나를 왕따 시키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만들었다.
저자는 조르바를 이렇게 묘사하며 어떤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저자는 니체와 실존주의 철학에 영향을 많이 받은 사람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이성적인 것들은 사실 한낱 키치에 불과하다. 조르바는 꾸준히 키치들을 부정한다. 국가주의, 민족주의 같은 이념들을 부정한다. 그리스인, 터키인보다는 그저 좋은 사람, 나쁜 사람으로 나누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수도원을 비판하면서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계속 해댄다. 조르바는 키치한 삶을 벗어난 사람이다. 예전에는 옳다고 믿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 모든 것은 부질없고, 지금 현재만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지금 바로 이 순간, 우리는 미래도 과거도 아닌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내가 진짜로 불편했던 이유는 여기에 있다. 나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 어려운 사람이다. 나뿐만 아니라 현대인들 대부분은 현재의 삶을 미래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 우리는 조르바처럼 살기 어렵다. 동시에 그래서 조르바가 계속해서 회자되는 포인트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언젠가 조르바처럼 순간에만 집중하는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다.
내게 있어 자유라고 생각되는 것은 해방감과 유사하다. 예를 들면 회사에 속박되어 9시간을 보내고 맞이한 퇴근 시간 같은 것이다. 구속에서 풀려난 상태, 해방된 상태일 때 나는 자유롭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자는 조르바를 통해 자유란 원하는 게 없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원하는 게 없는 삶이 가능할까? 나는 나의 국가를 초월하여 사람을 볼 수 있을까? 나의 신념을 초월하여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아예 그런 것들을 갖지 않을 수 있을까? 이 모든 문제들은 아직은, 그리고 앞으로도 나에게 절대로 해소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러니 나는 조르바처럼 살 수 없다. 더 정확히는 그러고 싶지도 않다.
조르바의 삶은 어딘가 고독하다. 처음에는 어디가 고독한지 몰랐다. 그러다가 곱씹을수록 그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생의 마지막 순간에서 조차 몸을 눕히지 않는다.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창에 서서 밖을 내다본 채로 죽는다. 우리가 생각하는 죽음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조르바는 자신을 사랑했지만, 동시에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 조르바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았지만, 동시에 모두를 사랑했던 것도 같다. 조르바조차 어느 쪽이 정답인지 모를 것이다. 조르바의 마지막 모습은 끝까지 그다웠으며, 닮고 싶었다. 나도 내가 온전한 인간의 형태일 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 누군가의 돌봄 속에서 살다 가는 삶보다는 이왕이면 내 스스로의 의지가 있을 때 죽는 것을 원한다. 조르바는 끝까지 그렇게 살다 그렇게 죽는다.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안나와 브론스키보다는 레빈과 키티의 가정이 톨스토이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들은 단 한순간에도 서로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순간의 감정에 솔직하게 화를 내고, 질투를 하고, 밤새 울다 화해를 하는 사람들이다. <안나 카레니나>와 <그리스인 조르바>는 연관성이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하지만 두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결론이 같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와 미래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 드는 감정에 집중하고 드러내는 것 말이다. 우리 삶은 조르바처럼 순간에 집중을 하고 살아내기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을 완독하고 나서는 언젠가는 이렇게 되어야겠다는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순간에 집중하려고 노력해 보면,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왔을 때 이번 생은 행복했다 만족할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독서의 매력이란 내가 읽은 책들의 연관성을 찾아내는 짜릿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다 읽고 톨스토이를 떠올렸을 때 내가 느꼈던 짜릿함이 또 나를 책으로 향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