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저편, 나의 모순적인 도덕성

니체 <선악의 저편>을 읽

by 초이

누구든 저마다 가치 판단의 기준이 있을 것이다. 나도 나만의 평가 기준이 있다. 심지어 그 기준은 세고 명확하다. 나는 꽤 오랫동안 “도덕성”을 기준으로 나도, 남도 평가했다. 내가 한 행동도 저 기준으로 잘잘못을 가려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렇게 나만의 기준으로 행동을 재단하면서, 그 기준이 나에게도 엄격히 적용되는 걸 방패 삼아 옳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것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한다. 니체라는 외골수 철학자 때문이다.







니체를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가 좋지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가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며 그 여자를 까내리는 모습에 1차적으로 정이 떨어졌다. 그리고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책이 인정받지 못하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이 모순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모습들은 지금 생각해도 좋은 모습들은 아니다. 다만, 돌이켜보니 그 모습이 정말 인간답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상대를 원망하고,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슬퍼하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한 인간의 잔상이 아닌가? 그는 인간을 인간답지 못하게 하는 모든 것들을 경멸했다.







니체의 가장 유명한 한 문장은 “신은 죽었다”이다. 그 문장은 비단 신만 죽인 것이 아니다. 절대적 존재에 대한 믿음과 동시에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통념을 깨부수었다. 나아가 타인을 배려하고 희생하는 정신을 노예 도덕이라 주장했다. 성공, 진취, 욕망들을 오히려 주인의 도덕이라며 칭송했다. 우리가 알던 일명 “도덕”을 망치로 부신 것이다. 지금은 그 말들이 각광을 받고 있지만, 니체가 살던 그때, 종교적인 신념이 가득했으니 누가 니체의 철학을 좋아했겠는가? 그의 주장은 지구를 둥글다고 믿고 있는 우리 인류에게 지구는 뾰족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더 충격적인 말일 것이다.





나는 앞서 말했던 나의 기준인 “도덕성”에 니체가 말하는 노예 도덕에 해당하는 것들이 많았다. 나는 남을 배려할 줄 모르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의 비난을 사는 행동을 하는 것들을 경멸했다. 그런데 그 가치판단은 옳은 것인가? 내가 조심한다고 하여 남의 비난을 안 사고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한 깊은 의문이 든다. 사실상 누군가에게는 해악을 끼치고 살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의 작은 기준으로 상대를 선과 악으로 나눌 수 있는가 말이다. 나는 도덕성을 주장하면서도 성공에 대한 열망이 있으니 나야말로 모순적인 사람이지 않나?









그렇다면 니체는 성공과 욕망으로 타인을 희생시키라고 하는 것인가라고 물어본다면 그렇지 않다. 그는 자신의 내면 안의 욕심을 마주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을 한 것이다. 내 욕망을 인정하고 그것을 조절해야 한다고 말한다. 내 욕망대로 행동하라는 뜻이 아니다. 절대적인 진리를 좇아서 무언가를 할 시간을 아껴 나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운명을 사랑하라는 ‘아모르파티’는 그 의미인 것 같다. 내 운명은 어차피 아름다울 수 없으니, 그냥 사랑해 보자는 것. 내 욕망이 선하지 않아도 그 욕망을 조절해 보자는 것.





니체는 영원회귀를 말하여 내 운명이 고통으로 가득 차도 받아들이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행복하고 부유하게 살았던 이가 말한다면 정말 웃긴 말이다. 하지만, 고통의 삶을 살아왔던 니체이기에 이 말이 와닿는다. 그렇게 단호하게 말했으면서 정작 본인도 운명을 사랑하라는 그 말이 슬펐던 것 같기도 하다. 길 위에서 채찍질을 당하는 말을 끌어안고 그는 말에게서 본인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온전한 정신을 놓아버리며 고통에서 벗어났을지도 모른다.







니체를 만나며 나는 나의 기준을 온전히 놓아버리진 못했지만, 그 기준이 온전히 나의 편견임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나는 변해간다. 니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가, 다시 들여다본 그의 삶에 마음이 아팠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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