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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part.2

행복과 불행

by 초이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알려진 명문장이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접하게 된 문장이며, 이상하게도 마음이 와닿았다. 행복한 가정과 불행한 가정에 그리 잘 알지 못하는 내가 봐도 뭔가 그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일까? 이 책에 과연 그런 가정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지 않을까 기대에 차서 읽었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묘사된 가정의 모습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안나와 카레닌 가정과 돌리와 오블론스키 가정 모두 "불륜"으로 인해 불행해졌기 때문이다.



톨스토이는 왜 이 문장으로 글을 시작한 걸까? 이 문장과 이 책의 줄거리는 크게 맞닿아 있지 않은 느낌인데 말이다. 잠시 책의 줄거리를 배제하고 이 문장만 가지고 생각해 보자.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무엇일까? 행복의 사전적 의미에서는 충분한 만족감과 기쁨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행복의 기준이 굉장히 모호하다. 행복은 물질적으로 완성되면서도, 그 안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신뢰가 충분한 어찌 보면 모든 것이 완벽한 상태를 말하는 것도 같다. 그래서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은 지나치게 이상적인 느낌이라 딱 한 가지의 모습만 존재하는 것 같다.



그러나 불행은 어떤가? 불행은 행복하지 않은 상태이다. 행복이 절대적으로 이상적인 모습이니, 그렇지 않은 모든 상태는 행복하지 않은 불행의 상태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 불행은 스펙트럼이 넓다. 우리에게 행복하지 않은 모든 상태는 불행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문장이 우리 삶의 고뇌들을 어루만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 문장을 큰 의미 없이 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추리를 해보자면 행복을 이상적인 어떠한 한 상태로 규정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 소설의 이상적 가정의 형태인 레빈과 키티는 아름다운 모습으로 시작하지 않았다. 레빈의 청혼을 거절하면서 서로 멀어지기까지 했다. 어렵게 다시 서로의 마음이 통하고, 결혼까지 했지만 그들은 마음이 딱 들어맞지는 않는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키티가 화를 내고 또 다른 부분에서는 레빈이 서운해한다. 그렇게 서로가 서로를 완벽한 형태로 만족시켜 주지 않는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의 모자란 부분을 서로가 채워주는 형태로 성장해 나간다. 자신들의 모난 부분을 상대에게 숨김없이 보여주면서 서로의 단점을 마주한다. 자신의 단점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은 이상적인 행복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레빈과 키티가 그렇게 함으로써 오히려 그게 현실적으로 행복으로 가는 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는 안나나 브론스키처럼 뜨겁게 사랑하여, 그만큼 서로의 단점을 가리고 있는 것보다는 서로에게 스며들어 모든 걸 알게 되고 이해하는 것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해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가장 궁극적 목적을 행복이라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모든 영역들의 중용을 지켜야 한다고 말한다. 중용이란 게 좋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적당하게 모난 것들도 가지고 있어야만 행복으로 가게 된다. 우리의 가정도 그러하다. 모난 점들을 적당히 가지고 있을 때 진정으로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것이다. 태생부터 고귀한 성품만 가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자신의 밑바닥을 가린다고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상대에게 보여주면서 그 부분을 함께 보완하는 것이 더 좋은 관계로 성장시킬 수 있다. [안나 카레니나]의 각 가정들의 모습에서 행복은 고귀하고 엄청난 이상적 형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드라마 속 주인공처럼 거대한 행복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내 앞에 놓인 작은 행복에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내 주변 사람에게도 멋진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솔직한 사람이 돼보자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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