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공백

마침표(.)

by 초이

친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친구가 있다. 몇 번 만나기는 했지만 자주 만나지도 않았고 대화를 길게 나눠본 적이 없던 친구. 가끔 마주칠 때마다 나와 참 다르지만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술자리에서 드디어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었다. 여린 마음을 가졌지만 고독한 사회생활로 인해 타의로 단단해진 친구. 그날의 대화 이후 자주는 만나지 못해도 만날 때마다 마음을 터놓게 되었다. 그와 나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서로의 삶에 굉장히 몰입하며 살았기에 마주칠 일이 없었다. 서로의 바쁨을 존중하느라 연락을 자주 하지 못했다. 이따금씩 연락을 해볼까 하다가도 용건이 생기기 전까지 크게 연락하지는 않았다. 자주 못 보니 마음을 많이 쓰지는 못했지만 한 번씩 그가 잘 살고 있기를 바랐다.


한동안 소식을 모르다가 어느 날 연락이 왔다.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가기 전에는 꼭 봐야겠다는 생각에 오랜만에 만났다. 요즘 사는 이야기와 힘들었던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그가 지금껏 이곳에 버티고 있다는 사실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살던 곳에서 꽤 먼 이곳에 정착하고 별로 좋지 못한 직장 동료들을 마주하며 외로움을 이겨낸 것. 사람마다 그것을 느끼는 정도는 모두 달라서 어쩌면 깊은 공감을 받지 못했을 수도 있었던 날들. 그 많은 날들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처음 후회를 했다. 왜 나는 더 자주 연락을 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좀 더 자주 만났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생각을 치우며 새로운 삶을 앞둔 친구를 응원했다. 진심으로 훨씬 더 행복하길 바랐다. 그날 헤어지기 전에 그 친구는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에 내 눈시울도 붉어졌다. 그를 배웅하고 집에 가면서 정체를 알 수 없는 감정의 눈물이 흘렀다. 난 지금 왜 슬픈 거지? 자주 만나지도 않고 내 일상에 크게 자리 잡고 있지도 않은 이 친구가 서울을 떠난다는 사실이 나에게 그렇게 슬플 일인가? 의문을 품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도 그 친구가 떠오를 때면 눈물이 났다. 그리고 한참 후에 그 감정의 정체를 깨달았다. 아쉬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보다 더 많이 그 친구를 좋아했나 보다.


관계의 상실은 언제나 슬프다. 나는 주로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다. 나는 계속 같은 도시에 계속 살고 있으며, 생활 반경에 큰 변화가 없다. 어릴 적 친구들 중 대부분은 이 도시를 많이 떠났다. 물리적으로 멀어진 친구도 있지만 그들의 상황이 변해서 떠나는 일이 더 많다. 어떤 이는 결혼을 해서, 어떤 이는 일이 바빠서, 어떤 이는 다른 것들을 하기 위해 나의 도시를 떠났다. 처음 맞이한 이별은 나에게 큰 충격을 주었지만 세월이 지나니 이제 그 이별에도 내성이 생겼다. 그들의 상황이 변할 때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더 큰 축복을 빌어주는 일도 제법 잘 해냈다. 그들을 축복할 때 내 마음은 한 치의 거짓도 없다. 그것과 별개로 나를 떠나는 그들의 상황에 대한 아쉬움은 내가 이겨내야 할 과제로 남는다. 내성이 생겼지만 아직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마침표들. 그 마침표가 새겨진 공백을 다른 것들로 메꿔보지만 텅 빈 마음은 또다시 나를 괴롭힌다.


이별의 공백을 채워도 결국 또 다른 마침표에 흔들린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그 말을 곱씹는다. ‘인간은 누구든 외롭다. 인간은 결국 혼자다.’ 앞으로 나는 누군가와의 마침표가 찍힌 그 공백을 채우지 않고 그대로 두어 보기로 한다. 정확하게 말하면 다른 것들로 채우는 게 아니라 오로지 나로 채워보고자 한다. 내 인생에 무수히 찍혀있는 마침표들 그대로 내 추억에 묻어 두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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