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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수지 Aug 19. 2022

난 힘들 때면 기억을 미화하곤 해

도워줘서 고마워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그리고 도움을 요청해줘서 고마워요.




등산을 시작한 지 열 달 정도가 됐다. 


 그동안 몇 번이나 산을 오른 지 기억나지 않지만 요즘 산을 타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블랙야크 어플에서 40좌를 달성했다. 혼자서 산을 타는 게 지루해지고 이제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쯤 등산 소모임에 들게 됐고 어쩌다 운영진이라는 감투까지 쓰게 됐다.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산을 탔고 등산은 내게 단순히 '운동'이 아니라 취미생활로 자리를 잡았다. 여행하는 기분으로, 사람을 만나는 설렘으로, 마음에 있는 무거운 짐 하나를 내려놓고 오는 기분으로 산을 올랐다. 내게 등산을 함으로써 얻은 점 한 가지를 꼽으라고 한다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사람이 됐다는 게 무슨 말이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사람과 어울려 지내면서도 철저하게 선을 긋고 피해를 받는 것도 주는 것도 싫어하는 나한테는 아주아주 생소한 일이었다. 누가 나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기쁜 마음으로 선뜻 도움을 주면서도 정작 남들한테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말 못 하는(어쩌면 안 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산을 타면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했던 건 휴지가 필요해서였다.


 보통은 물이나 등산스틱, 장갑, 아니면 손을 잡아 달라거나 가방에 있는 물을 꺼내 달라는 요청을 많이 하는데 휴지라니. 그것도 화장실이 급해서 휴지를 빌리다니!!


 이런저런 생각을 할 틈도 없이 "휴지 있는 사람!!!!!!"을 외치고 기적적으로 산 중턱에, 신호가 옴과 동시에 발견된 옆에 있는 화장실로 휴지를 받아 들고 냅다 뛰어갔다. 이런 불상사가 일어날까 봐 등산할 때 꼭 휴지를 들고 다니는데 하필이면 그날따라 휴지를 챙기지 않았고, 일부로 산을 오를 때는 든든하게 먹지도 않는데 하필이면 꽤 든든하게 먹은 탔이었다.



"풉 ㅋㅋ"


 웃음인지 실소인지 모를 탄식이 터져 나왔고 시원함, 쪽팔림, 통쾌함과 같은 감정들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쪽팔리다는 감정이 가장 컸던겄같다.


 그날의 등산이 힘들었는지 어쨌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 분명한 건 행복했다. 시원하게 볼일을 본 탓일까? 퀴퀴하게 묵혀있던 무언가가 내려간 것 같은 시원한 해방감을 느꼈다






최근에는 국립공원 1 경이라는 설악산 공룡능선을 등반했다.


 워낙 힘들기로 악명이 높고 그만큼 예쁘다고 명성이 자자한 산이라서 산 좀 탄다는 산쟁이들한테는 꿈의 코스이다. 그리고 드디어 공룡능선을 갈 기회가 생겼고, 공룡능선은 고사하고 설악산 정상인 대청봉을 갈 때도 힘들어서 울며 엄마한테 전화한 전적이 있는 나는 당연히 가야지!라고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됐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전과 달라진 건 함께 할 사람들이 생겼다는 것, 내가 힘들어할 때 내 손을 잡아줄 사람이 있다는 것 만으로 큰 힘이 됐고 그렇게 공룡능선을 등반했다.


 새벽 세시 오색 코스를 시작으로 대청봉을 오르고 중청대피소에서 밥을 먹고 공룡능선을 타고 소공원으로 내려오는 코스. 장장 14시간의 긴 코스였다. 오르는 순간순간 힘들었다. 잠도 못 자고 퇴근하자마자 바로 사람들을 만나서 운전해온 탔에 피곤했고, 더웠고, 물만 7통이 들어있는 가방은 무거웠다.  


 그런데 지금 나는 그렇게 힘들었던 공룡능선이 또 가고 싶다.


 산을 오르내리며 한고비, 한고비 넘을 때마다 이전의 고통은 잊히고 새로 시작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정상에서 추위에 떨 때 빌린 옷, 피곤한 눈을 붙일 수 있었던 대피소, 얻어 마신 얼음물과 포카리스웨트, 

"파이팅!!" 외치던 목소리, 눈에 다 담을 수도 없는 절경 앞에서 서로의 사진을 찍어주며 미소 짓던 얼굴들.


 힘들었던 기억들은 이미 미화되어 사라졌고 도움을 받고 함께해서 좋은 기억들만 남아있었다. 






일정을 다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 산행에서는 도움을 받은 기억밖에 없는 것 같아 조금은 민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한 감정과 고마운 감정이, 알 수 없는 낯선 감정이 느껴질 때쯤 같이 간 일행의 공룡능선 산행 후기를 읽게 됐다. 글에는 힘들었지만 함께한 사람들을 향한 고마움이 가득했고 나에게 고마워하는 내용도 꽤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게도 고마움을 느꼈구나...


 사실 짐을 쌀 때부터 혹시 몰라 물 한 병을 더 챙기고 함께 먹을 과일을 챙기고 파스를 챙기고, 내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가 생겼을 때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뭘지 고민하면서 짐을 챙겼다.

그리고 실제로 도움을 줬다는 사실이 기뻤다.



'따뜻하다...'


사람들과 함께 하고 도움을 받는 일, 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일.

힘들었던 기억은 금세 사라지고 함께 해서 좋았던 일만 기억나는 일.



그래서 내가 등산을 좋아하나 보다. 등산은 참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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