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을 살 수 있다면
엄마와 딸 그리고 나도 샤프란의 추억
태풍처럼 요란한 비바람이 밤새 몰아치고 사라졌다. 한적한 휴일 오후다. 나무들은 간밤의 비바람에 말갛게 씻겨 파릇한 향기를 뿜는다. 나무줄기 사이로 돌아온 철새들이 앉았다. 종다리와 박새와 할미새가 재잘거린다. 섬 휘파람새의 맑고 청아한 노랫소리가 정원을 가득 채운다. 성큼 다가온 봄이다.
당근마켓을 보고 꽃 사러 왔다며 40 초반의 여인이 말을 건넨다.
"나도 샤프란 있어요?"
"아 네 있지요."
꽃들 중에 잘 알려지지 않은 나도 샤프란을 찾아 안내하였다. 어디서 오셨냐 물으니 제주시 연동에서 왔단다. 선흘리에서 차로 35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이다. 제주사람들은 차로 10분이 넘어가는 거리는 멀게 생각한다. 이곳까지 꽃을 사러 온 이유가 궁금해졌다.
“이 꽃 이름을 아는 분들이 많지 않은데 잘 아시네요.”
"나도 샤프란을 사려고 여기저기 찾아봤는데 여기밖에 없더라고요."
"촌집에는 더러 있지만 파는 곳은 많지 않을 거예요"
"네 어렵게 찾았어요"
"나도 샤프란을 좋아하시나 봐요."
"어릴 적 촌집 마당에서 보던 거라서요."
나도 샤프란은 제주의 민가에서는 심심치 않게 보이던 식물이다. 그녀는 중학생인 딸아이와 함께 왔는데 차에서 내리지 않는다며 계면쩍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은 빌라에 사는데 내년에는 단독주택으로 이사할 것 이거든요."
"그러면 화분에 키우셔야 되겠네요."
"네 그러려고요."
"화분에 어떻게 키워야 돼요?"
"봄, 가을에는 겉흙이 마르면 물을 흠뻑 주시고요. 여름에는 아침 일찍이나 해 질 녘에, 겨울에는 낮에 주시면 돼요."
"꽃들이 많네요. 나중에 꼭 다시 올게요."
"네 잘 키워보세요."
식물을 직접 키워 본 적이 없다고 했다. 화분에 심어 베란다에서 키워야 할 것이다. 이 꽃을 간절히 찾은 이유는, 아마도 그녀 자신의 모습과 닮은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서야 부모님이 몹시 그리운 게 아닐까. 삼복더위에 일구던 우영팟(채마밭)에서, 구슬땀 흐를 제 울담 아래 하얗게 피어나던 꽃. 부모님의 젊은 날은 그렇게 기억되었을 것이다.
그녀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부모님이 몹시 그리울 때는 일상적이지 않은 괴로운 날이기 쉬우니...
새 봄이 오면 그녀는 딸아이와 함께 화단에 나도 샤프란을 심겠지. 이 봄이 시들고, 더위와 쓸쓸한 바람과 추위를 지나, 다시 생기 품고 올봄을 기다리는 이유가 한 가지 더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