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해적 임봉(리마홍)의 필리핀 식민지화 계획

필리핀을 침략해서 식민지로 만든 후 해적 왕국 건설을 꿈꾼 명나라 해적

by 바다의 지정학
필리핀에서는 국가적 위기상황이 발생하면 계엄으로 인해 위, 아래 국기 색깔이 바뀐다.




오늘은 필리핀 역사상 가장 큰 국가적 대위기였던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스페인 왕국, 미국, 일본 지배시기의 필리핀 못지 않았던 대위기, 바로 "명나라의 해적 임봉(리마홍)의 필리핀 식민지화 시도"가 그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필리핀"에 대해 잘 모르는 분들을 위해 필리핀이란 어떤 곳인지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A) 필리핀 ?



필리핀은 어떤 곳일까? 우선 필리핀은 동남아시아다.


"춥고 건조한 동북아시아"와는 정반대로, 동남아시아는 매우 덥고 습하다. 그래서인지 세계적으로도 피부 색깔이 하얀 동북아시아 인종들과는 달리, 동남아시아 인종들은 피부 색깔부터가 까무잡잡한 라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 인종과 비슷하게 생겼다.


동남아시아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오세아니아와 비슷한 점은 또 있다. 바로 1년 365일 더운 여름뿐인 열대 지방이기 때문에 사회 문화 자체가 뭐든지 느긋하고 느리다는 점이다. 이게 너무 심해서 게으르다는 느낌마저 들 정도다. 그리고 바다 색깔이 탁하지 않고 투명하고 아름답다. 또 열대 과일들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이런 동남아시아의 느긋함과 맛있음에 매료되서 매년 찾는 여행객들도 많다.






B) 동남아시아란 ?



"동남아시아"라고 다 같은 동남아시아가 아닌 것 알고 있는가? 동남아시아는 크게 옛날부터 국방력과 문명들이 발전했던 대륙부 동남아시아(베트남, 미얀마, 태국, 라오스) 지역과 도서부 또는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방(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브루나이, 필리핀)으로 나뉜다.


일단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해양부 동남아시아보다 위도가 훨씬 더 북쪽에 위치해 있어서 해양부보다 훨씬 더 춥다. 그 중에서도 베트남은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북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 한정으로 가장 추운 지역으로 손꼽힌다. 그래서 베트남의 "하노이"는 간혹 겨울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도 있을 정도이며, 특히 베트남의 "사파"는 동남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눈이 내리는 추운 산악 지역으로도 유명하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남쪽에 속하는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인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는 완전히 1년 365일 내내 살인적인 찜통 더위다. 대륙부인 태국만 여행가면 덥다고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인데, 필리핀은 태국보다 훨씬 더 덥다. 왜냐면 "필리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적도에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필리핀조차도 지구상에서 가장 덥다는 체감 온도가 무려 1년 365일 내내 섭씨 64도라는 남아메리카의 브라질에 비하면 애교지만 말이다..


어쨌든 기후를 이야기했으니 이제 "대륙부"와 "해양부"의 역사적 차이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C) 대륙부 동남아시아란 ?



앞서 얘기했던 대로 대륙부 동남아시아 지역들은 세계사적으로도 유명한 문명들이 많다. "미얀마의 파간 왕국이나 캄보디아의 크메르 제국처럼." 그리고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특징은 고대 중국의 식민지들이었다는 점과 고대 중국의 식민지가 아니면 인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베트남은 고대 중국의 식민지로 1,000년 간"이나 살았다. 미얀마나 태국은 다행히 고대 중국의 식민지는 아니었으나 고대 중국이 자주 침략하거나 영향력을 자주 행사했던 국가들이긴 한다. 물론 세계 1위의 군사력을 가졌던 대원제국의 쿠빌라이칸이 미얀마를 침략해서 정복한 적도 있긴 하다. 하지만 대원제국이 중국은 아니니까.


고대 중국의 식민지였던 베트남과 인도의 영향력을 강하게 받은 태국.


고대 중국이 베트남을 1000년간 식민 통치하면서 남긴 식민잔재 중 하나가 바로 베트남의 공식 문자였던 쯔놈이다. 이 "쯔놈(字喃)"은 고대 중국 한자어의 영향을 받아 베트남에 정착된 문자로, 베트남의 호치민은 "차라리 프랑스의 속국이 되는게 낫지 중국의 식민지로 다시 사는건 싫다"로 말할 정도의 인물이었다. 그정도로 베트남은 반중감정이 심한 국가였고, 아직도 심하다. 베트남은 한자 문화권 국가였고 조선시대때는 조선인이 가서 베트남인과 "필담(筆談)"으로 대화를 했다는 기록까지 있을 정도였다. 필담이란 음성 언어는 통하지 않지만 문자 언어로 대화를 하는 언어 대화 방식이다. 어쨌든 이렇듯 한자 문화권이었던 베트남은 스스로 한자에서 독립하고 라틴 문자로 바꾸는 문자 개혁을 실시했다. 한자 문화권은 아니긴 하지만 오스만 제국이 망한 후에 1928년에 터키를 세운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했던 문자 개혁과 비슷한 느낌이다.


하지만 베트남어랑 비슷하게 느껴지는 "태국"은 "인도 문화권"에 속하는 국가다. 일단 사회적인 문화나 전통복부터가 인도쪽에 가까운 데다가, 문자부터가 묘하게 아랍어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태국의 문자인 "타이 문자(태국어: อักษรไทย)"는 생긴건 중동 아랍어와 비슷하게 생겼어도, 그 기원은 인도쪽의 브라흐미계 문자에 속한 "아부기다(Abugida)"가 그 기원이다.


이렇듯 베트남은 고대 중국의 식민지였기에 중국의 문화권에 속했고, 태국은 인도나 무굴제국의 식민지는 아니었지만 인도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에 인도 문화권에 속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베트남이나 태국, 미얀마는 간혹 세계사 무대에 등장하곤 한다. 애초에 세계사가 중국, 서양 위주로 편찬되있기 때문에 고대 중국의 식민지였거나 고대 중국의 침략을 받는 베트남, 태국이나 미얀마들도 부록으로 세계사 책에 등장하는 경우는 왕왕 있다.


하지만 이렇게 부분적으로나마 이름이 알려진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역사들과는 달리, 도서부(해양부) 동남아시아 지방은 완전히 "미개척지"다.





D) 해양부(도서부) 동남아시아란 ?



그도 그럴 것이 해양부 동남아시아 지방들은 사실상 거의 버려진 열대 섬들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다가 나중에는 중국 상인, 아랍, 인도 상인들이 서로 활발하게 해상 무역들을 진행하면서 "멀라카(Malaka, 海峽, Selat Malaka)" 제도가 있는 해양부 동남아시아쪽으로도 진출하게 됐고, 중국 상인들이 당시 "미개척지"였던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들을 어느 정도 "개척"하긴 한다. 아랍 상인들의 경우는 아예 잔류해서 평화적으로 이슬람교를 전파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는 이슬람교를 믿는 곳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는 필리핀보다는 상대적으로 개척이 빨랐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주제인 "필리핀"은 다르다. 필리핀은 우리가 아는 일반적인 동남아시아와는 완전히 역사, 문화부터가 다르다. 필리핀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와는 달리 해상 무역의 조계지 역할로 각광받던 섬도 아니었기에 중국, 아랍, 인도 상인들이 많이 찾던 곳도 아니었기에 문명으로부터 소외를 받던 섬이었다.





E) "임봉(리마홍)"의 필리핀 식민지화 계획 이전까지


의 "필리핀 역사"




그래서 아쉽게도 스페인 왕국이 필리핀에 진출했던 16세기 전까지의 모든 필리핀의 역사는 알 수가 없다. 마치 "라틴 아메리카의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처럼 말이다.


16세기 이전까지 이 필리핀이라는 열대 섬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고, 정확히 누가 어떻게 정착했으며, 무슨 사건과 일들이 있었으며, 뭘 먹고 뭘 하며 뭘 믿고 살았는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왜냐면, 필리핀에는 정확히 "부족"이나 "마을", "국가"라는 개념이 없었다. 그저 "구석기인들처럼 혹은 라틴 아메리카의 잉카인, 아즈텍인, 마야인이나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들처럼 알몸으로 살아가는 개방적이면서도 느슨한 남녀 사람들이 열대 섬 곳곳에서 기생하며 살아갈 뿐이었던 곳이 필리핀"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자체적으로 글자도 없었고 그들이 뭘 했는 지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가 없었다. 고대 이집트 왕국처럼 벽화를 새긴 것도 아니니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에 고대 중국이 이 필리핀이라는 섬에 대해 일찍 관심을 가지고 개척을 했더라면 우리는 세계사적으로 필리핀이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 그 역사를 알 수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고대 중국의 관심사는 항상 중앙아시아가 1순위였고, 그 다음 2순위가 동북아시아였다. 고대 중국에게 중앙아시아는 적대국가로서 항상 그쪽으로 군대를 배치하거나 치열하게 전쟁했었기에 고대 중국 한족들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끊임없는 전쟁 연구들과 세계사적 기록들을 썼고 그로 인해 고대시대부터 튀르크족은 세계사적으로 엄청나게 유명하다. 이는 동북아시아도 마찬가지다. 고대 중국의 영향을 강하게 받으면서 군사력이 막강해졌기에 동북아시아에 대한 기록도 존재한다.


물론 고대 중국인들이 동남아시아에 대해 연구하고 기록한 경우는 베트남이 있다. 이는 고대 중국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그렇다. 하지만 고대시대에 실크로드는 주로 육상을 통해 이뤄졌기 때문에 아랍과 무역을 하기 위해서 굳이 동남아시아를 개척할 필요는 없었다. 중세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중동 아랍 상인들과 무역을 하기 위해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를 개척했던 중국 한족들이지만 필리핀처럼 덥고 습하고 아무것도 없고 말라리아 모기들만 많고 알몸의 구석기인들인 미개인(중국 한족의 시각으로 볼때 그 당시 필리핀은 미개인들이었다. 이는 스페인인들이 볼때도 마찬가지였지만)들이나 사는 필리핀은 아무 쓸모가 없던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해적들의 은신처로 사용되던 곳이기도 했다. 중국 한족들이 필리핀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명나라 시기때 해적들이 활발해지자 명나라 관군들이 해적 소탕을 하면 명나라 해적들은 주로 아무도 찾지 않는 필리핀에 숨어서 은신처로 삼고 주변 지역들을 약탈하면서 전리품을 챙기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다. 이로 인해 왜구들도 가담해서 필리핀에 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명나라 해적이나 왜구들은 전리품을 챙길 목적으로 혹은 심심풀이로도 필리핀 원주민들을 학살하는 끔찍한 일들을 마구잡이로 자행했다.


여튼 요새 말로 치면 "무법천지""구석기적인 미개함"이 공존하던 섬이 바로 그 시기의 필리핀이었다.


그때 구석기의 열대 섬, 필리핀에 찾아온 것이 바로 "스페인인"들이었다. 스페인 왕국이 필리핀을 진출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추후 다른 곳에서 다룰 수 있으면 다루려고 하니까 그 부분은 빠르게 생략하고 대충 얘기하자면 "스페인(에스빠냐) 왕국"은 16세기인 1521년쯤으로 추정되는데, 까를 5세 왕의 부탁을 받은 포르투갈인 탐험자인 "뻬르디난드 마젤란(Fernão de Magalhães)"에 의해 필리핀의 루손 섬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필리핀 개척이 시작되게 된다.


하지만 당시 세계 패권국가는 명나라였기에, 스페인 왕국으로서는 필리핀을 먹는데 수많은 패배를 겪는다. 알몸이나 다름없는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무려 7번이나 패배했던 스페인 해군 함대들은 8번째에 가까스로 먹을 수 있었다.


벌거벗은 알몸의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대패한 스페인군들 그림. 최대한 알몸이 안나오는 건전한 사진을 찾느라 애먹었다..


마젤란과 스페인군들이 현재의 필리핀 세부 섬에 살던 2명의 촌장 가운데 1명인 "라뿌 라뿌(Lapu-Lapu)"를 만났는데 스페인 국왕에게 순종하라는 얘기를 거부한 라뿌 라뿌와 필리핀 원주민들이 스페인군들을 공격했고 결국 스페인군들이 현재 세부 주에 있는 섬인 "막탄 섬(Mactan Island)"에서 필리핀 원주민들과 "막탄 싸움(Battle of Mactan)"을 하게 됐고.. 이 싸움에서 라뿌 라뿌쪽 필리핀 원주민들은 80명 이상 죽었고 스페인들은 14명 죽고 스페인들과 같이 싸운 다른 세부 원주민들은 150명 죽었고 결정적으로 뻬르디난드 마젤란이 죽으면서 스페인(에스빠냐) 왕국이 이 전투에서 패배한다. 여기까지가 정사다.


하지만 여기서 숨겨진 비하인드 스토리, "야사"가 있는데.. 사실 이 막탄 배틀이 발생하게 된 계기는뻬르디난드 마젤란이 라뿌 라뿌에게 스페인 국왕에게 순종하라고 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로 스페인군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강간했던 것처럼 필리핀 원주민 여자들을 강간했던 사실을 다른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들키면서 이에 격분해버린 라뿌 라뿌가 스페인군들을 덮쳤다는 얘기가 필리핀 쪽에는 꽤 정사처럼 많이 퍼져있다.


하지만 당시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의 탐험자들이 남아메리카에 잉카인, 아즈텍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밥먹듯이 성폭행하고 그로 인해 태어난 사람들이 현재의 라틴 아메리카 혼혈 인종들인 걸 생각해보면.. 저 야사라고 아예 판타지 소설처럼 들리진 않는다. 게다가 그 당시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이 잉카, 아즈텍, 필리핀에 대해서 쓴 기록들은 일부 사실도 있긴 하지만 잉카, 아즈텍, 필리핀이 얼마나 미개했는 가에 대해 초점을 맞추고 쓴 기록들이 대부분이라 역사 왜곡들이 많이 있는 걸 현재 역사학자들도 인정하는 부분인 걸 보면 저 "야사"라고 해서 아예 그냥 판타지 소설 취급하기엔 매우 찝찝하다.


여튼 그렇게 스페인 왕국은 계속된 패배 끝에 가까스로 필리핀을 다스리게 됐고 곧 필리핀을 다스리는 총독이 부임되게 됐다. 첫 필리핀 총독은 바로 "미겔 로뻬스 데 레까슷삐(Miguel López de Legazpi)"라는 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탐험자 마젤란이 실패한 필리핀 정벌에 성공한 사람이다.


레까슷삐는 이사벨이라는 여자와 결혼해서 다산해서 9명의 아기들을 출산했으며, 1565년쯤에 세부 섬에 스페인 첫 정착지를 세우고 촌락을 짓고 1572년쯤에 70살까지 살다가 심장마비로 숨을 거뒀을 것으로 추정된다.


레까슷삐가 숨을 거두자 다음 총독으로 부임한 사람이 "뀟또 떼 랏뻬싸렛쓰(Guido de Lavezaris)"라는 사람이었다.


랏뻬싸렛쓰는 1542년 ~ 1543년쯤에 필리핀을 향한 스페인 항해자 "비야롤로뽀스(Ruy López de Villalobos)"가 데기로 온 "왕실 재무관"이었다. 왕실 재무관(Tesorero Real, Royal Treasurer)이란 한마디로 그냥 항해하는데 돈을 관리하는 사람을 얘기한다.


그렇게 약 1543년 쯤에 이 에스빠냐의 "비야롤로뽀스(Ruy López de Villalobos)"가 데려온 사람들이 필리핀의 섬들을 보고 스페인 국왕인 필립 2세(뻴리뻬 2세, Felipe 2)의 이름을 가져와서 "라스 이슬라스 삘리삐나쓰(Las Islas Filipinas)"라고 붙였고, 그 후 스페인 간섭기의 모든 필리핀 섬들을 "필리핀"이라고 부르면서 현재까지 필리핀이 된 것이다.


그렇게 필리핀에 있던 "비야롤로뽀스(Ruy López de Villalobos)"이 데려온 사람들은 밥이 부족해지자 다시 되돌아가야할 상황이 됐다. 그래서 급한데로 먹을 걸 구하러 믈라까 제도로 갔는데 하필 그곳은 포르투갈 왕국이 진출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렇게 포르투갈인들에게 끌려간 스페인인들은 믈라카 제도의 "암본 섬(인도네시아어: Pulau Ambon)"란 곳에 압송되어 갇히게 된다. 기록에 따르

"떼 랏뻬싸렛쓰(Guido de Lavezaris)"는 포르투갈인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기 전에 감옥에서 탈출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정확히 어떻게 탈출했는지는 모른다.


여튼 그렇게 고생한 떼 랏뻬싸렛쓰였지만 스페인 왕국으로 돌아가진 않고 다시 필리핀에 와서 레까슷삐의 손자인 "후안 떼 쌀쎗또(Juan de Salcedo)"와 일을 하게된다.







F) 명나라의 해적 "임봉(리마홍)"의 필리핀 식민지화


계획과 시도




명나라의 세계 패권은 영락제 시기 최절정을 달렸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영락제 사후 해금정책을 펼치면서 오히려 명나라 해적들이 아시아 ~ 인도양 ~ 태평양 바다를 점령하는 대해적 시대가 시작되게 된다. 이는 미국이 금주법을 시행하자 마피아가 생겨나게 된 것과 비슷하다고 본다.


어쨌든 원래 아시아, 인도양, 태평양 바다를 지배하던 왜구 세력들은 명나라 해적들과 결탁하면서 명나라 해적들과 왜구들의 연합함대들이 아시아, 인도양, 태평양 바다 패권들을 완전히 가지고 휘두르게 된다.


그리고 16세기 중반인 1553 ~ 1561년에 명나라 해적들의 최전성기를 달리면서 이에 드디어 칼을 뽑은 명나라 정부는 명나라 해적들과의 대대적인 전면전을 선포한다.


명나라의 대해적 시대는 15세기 "진조의(陳祖義)"가 개막했고, "왕직(汪直)"의 시대때 최전성기를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조의"는 일본, 인도양, 타이완, 남해들을 사실상 자신들의 해적 소굴로 두고 50개가 넘는 대도시들을 약탈하고도, 1만여 척 이상의 군함대들을 약탈하고 전리품으로 삼고, 말라카 제도에서 위세를 떨치다가 이에 해적 소탕의 필요성을 느낀 명태조 홍무제가 진조의의 목에 무려 50만 량의 "백은"을 현상금으로 걸고 군인들에게 진조의의 체포 및 처형을 황명으로 하달하자, 진조의는 곧바로 인도네시아로 가서 그곳을 접수한 후 사실상 "팔렘방(현재 스리랑카)"의 국왕으로 군림한다.


하지만 곧 1407년 정화의 대함대들이 서양에서 돌아오는 길에 해적들을 소탕할때 같이 소탕 당하면서 진조의의 대함대들은 격침당하고 5,000명의 해적단들이 전멸하고, 결국 진조의 해적단들은 결국 정화에 의해 명나라 영락제와 전 세계 사신단들의 앞으로 끌려간 후 참수형 당하면서 최후를 맞이한다.


중세 일본의 전열보병들


정화와 영락제 사후에 명나라의 대해적 시대를 이끈 왕직은 가장 큰 규모의 대함대들로 완전히 아시아, 인도양, 태평양 바다의 패권을 쥐고 있었으며, 왕직의 패권이 어느 정도였냐면 일본에 화승총이 전래된 것도 왕직의 작품이었다. 당시 왕직의 해적단이 동맹을 맺고 있던 신원 미상의 포르투갈 해적들에게 일본에 화승총을 전해주게끔 유도한 것이다.


그리고 1555년 을묘왜변 때 조선을 침략한 해적단도 "왕직"의 해적단들 중 산하 해적단의 일원들 중 하나였다.


이렇듯 아시아, 인도양, 태평양의 패권을 잡으며 휘두르던 당시 아시아, 인도양, 태평양 전체의 해적왕이었던 "왕직"이었으나, 중앙아시아 북방 유목제국들과 치열한 대전쟁 끝에 잠시 휴전에 성공하면서 시간을 벌게된 명나라가 이제 본격적으로 남하해서 왕직이 이끄는 대해적단들을 소탕하는데 주력하자 점차 아시아 바다 전체의 패권을 명나라군들에게 빼앗기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명나라군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한 해적왕 왕직은 1559년 12월, 명나라의 군사 총독(總督)들 중 1명이었던 호종헌 총독이 주도한 체포 작전에 속아 넘어가 호종헌 총독(總督)이 왕직에게 제시한 "휴전안"이 사실은 왕직을 내륙으로 끌어들이려고 호종헌이 계획한 군사 작전의 일부였는데도 왕직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결국 고심 끝에 받아들이고 명나라로 귀국했다가 호종헌 총독의 군사 명령을 수행한 순안어사인 왕본고 장군에 의해 즉각 체포되어, 1560년 1월 22일에 저장성에서 참수형 당했다.


황제로 군림한 호랑이가 없는 굴에 늑대가 왕이 된다고 했던가.. 아시아, 인도양, 태평양의 패권을 휘두르던 해적왕 "왕직"이 죽자마자 마치 일본 만화 원피스의 해적왕, 골 D. 로저가 공개 처형당하자 대해적시대가 열리면서 수많은 해적들이 바다로 나가듯, 왕직의 뒤를 이어 해적왕이 되고 싶은 야망을 가진 해적들이 더욱더 많아졌다.


그 수많은 해적들 중 하나가 바로 "임봉(林鳳, 유럽에는 리마홍, 림아홍, 林阿鳳, Limahong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짐)"이었다. 해적왕 왕직이 살아있을 때는 그의 해적단에 탑승해있던 수많은 부하들 중 1명에 불과한 임봉이었으나 왕직이 죽자마자 자신의 야망을 펼칠 기회가 생긴 것이다.


필리핀의 루손 섬 위치


게다가 이미 이때쯤 되면, 필리핀의 "루손 섬"의 가장 북쪽 끝에는 왜구들이 개척하고 있었다.


앞서 말했듯 필리핀은 "국가""부족"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곳곳에 허점 투성이였다. 당시에는 스페인 왕국이 필리핀에 진출하고 있을 때였지만 필리핀에는 술루 왕국처럼 스페인 왕국도 이기지 못한 세력도 있었고, 뎅기열이나 말라리아 모기가 많은 열대 섬이라는 특성 때문에 아직까지 필리핀을 모두 지배하는 건 불가능했다.


물론 네그리토 원주민들도 대충 약 96000명 이상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왜구들이나 스페인인들과는 달리 네그리토 원주민들은 그저 잉카인, 아즈텍인들처럼 구석기시대인처럼 살아갈뿐이었다. 게다가 성격도 온순해서 왜구들이나 스페인인들은 네그리토 원주민들을 발견하면 그들을 지배하고 조종하려고만 했다.


여튼 이렇게 왜구에 의해 개척된 지역들은 일본인들도 소수지만 이주했는데 2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그리고 필리핀 북부에 위치한 필리핀 최대의 섬인 루손은 워낙 은신하기도 좋다보니 명나라 해군함대들로부터 도망친 명나라 해적들이나 왜구들의 해적소굴로도 활용했고, 이들이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약탈하는 해적기지 역할도 많이했다. 왜구나 일본인 이외에도 일부 화교도 간첩 활동을 하면서 해적활동에 동참하면서 살았다.


필리핀의 남일로코스 주의 위치. 출처: 위키백과.


1571년, 광동성(广东省)에 주둔했던 "류요회(劉堯誨, 유요회, 중국어로는 리우 야오후이, 혹은 류야오후이) 장군"의 군사 작전에 의해 명나라 군인들의 공격을 받아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당한 임봉(리마홍)은 필리핀의 루손 섬에 위치한 "남일로코스(Ilocos Sur)"에 임시적으로 해적요새를 건설하고 그곳을 본부로 삼아 명나라군의 공세를 방어하려 했으나, 곧 류요회 장군은 루손 섬까지 함대를 보내 임봉의 해적기지들을 기습공격한 탓에 임봉은 거점을 옮길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던 와중에 임봉은 명나라 무역선 하나를 발견한다. 그 무역선에는 임봉이 지금껏 본적없는 엄청난 양의 금은보화들이 가득했다. 명나라는 세계적으로도 철광석 같은 철제 무기 제작에 필요한 철광산들은 많지만, 금과 은은 별로 없는데 이 정도 양은 절대로 명나라가 자체적으로 생산해낼 수가 없는 양이었다. 그렇다. 명나라는 스페인 왕국과의 해상 무역에서 막대한 양의 이득을 얻고 엄청난 양의 금과 은들을 가지고 명나라로 가지고 가고 있던 것이었다.


명나라 왕국이 페필리핀을 접수한 스페인 왕국과의 무역을 통해 돈을 번 것임을 눈치 챈 임봉은 빠르게 계산하며, 스페인만 약탈하면 저런 엄청난 금은보화들을 가질 수 있다는 계산에 이르렀고, 스페인의 아지트가 마닐라란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임봉(리마홍)으로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대해적왕인 왕직은 명나라 관군들에게 붙잡혀 참수형을 당했고, 그 수많은 부하들은 뿔뿔히 흩어졌고 그 중 1명인 임봉(리마홍)도 곧 소멸할 위기에 쳐해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명나라 군함대들은 동남아시아 곳곳에 뿔뿔히 흩어진 다른 명나라 해적들도 전부 소탕하려고 출병식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고, 임봉으로서 가장 최악의 상황은 명나라의 수많은 최정예부대들 중 "척가군"을 지휘했던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장군"의 군사 명령을 받던 휘하 장군들 중 1명인 "호수인(胡守仁) 장군"이 임봉 해적단을 섬멸시키려고 군사 작전을 수립 중이기도 했다.


즉, 임봉(리마홍)으로서 뒤는 없었다. 길은 오로지 앞에만 있는 상황이었다. 멈추거나 물러서면 붙잡히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비록 명나라 해적들은 거의 다 명나라 수군들에게 격침당해 전멸했으나, 그에게는 아직 62척 이상의 "해적선"들이 남아있었고, 그에게 절대 충성하는 중국 해적이 약 3,000명, 일본 왜구 400명이 임봉(리마홍)과 연대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필리핀의 마닐라의 위치다


임봉(리마홍)은 스페인의 본거지를 공격해서 약탈하기로 결정하고 그가 이끌던 해적선들을 이끌고 다시 모험을 단행하여 남일로코스에서 떠나 "마닐라"로 출격했다.


거사일은 1574년 11월으로, 임봉(리마홍)은 일부러 기습공격하기 좋게 스페인인들이 기념한다는 카톨릭의 기념일을 선택했다.


마닐라로 진격하던 임봉(리마홍)의 해적단들은 비건에 정박한 스페인군의 갤리엇들을 발견하는데, 당시 스페인 왕국의 "꽁끼쓰따도르(conquistador)"들 80명이 배에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콩키스타도르들은 갑자기 공격해오는 중국의 해적선들을 보고 지레 겁먹고 반항한 번 제대로 못해보고 쉽게 제압당하고, 콩키스타도르들 중 22명은 임봉(리마홍) 해적단들의 포격에 의해 전사한다.


가까스로 살아남거나 도망친 콩키스타도르들이 후안 떼 쌀쎗또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쌀쎗또는 곧바로 마닐라로 방어병을 보냈다. 리마홍(임봉) 해적단은 계속해서 마닐라로 진격했고, 리마홍(임봉)은 예정대로 1574년 11월 30일 오전 10시에 필리핀 마닐라 남쪽 항구에 위치해 있던 "세인트 앤드류(Saint Andrew)"에 도착해서 우선 선봉대로 700명의 해적들을 마닐라에 상륙시켰다.


명나라의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아퀴버스 화승총


당시 기록에 따르면 임봉(리마홍) 휘하의 해적들은 원거리 무기로는 화승총인 "아퀴버스 총", 근거리 무기들로는 명나라식 군용장검, 단검, 스페인 커틀러, 스페인의 전투용 도끼, 파이크 같은 긴 도끼장창, 게다가 심지어 초기형 수류탄에다가 여러 폭발물들과 대포 등으로 완전 중무장하고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왜구들도 상당수 섞여 있었는데 이들은 카타나(일본도)로 중무장하고 있었는데, 실제 기록에 따르면 왜구들은 키는 난쟁이처럼 왜소하지만 왜구들의 검술 실력은 스페인군의 콩키스타도르들을 훨씬 뛰어넘으며, 왜구들이 사용한 카타나(일본도, 日本刀) vs 스페인군이 쓰는 장검들인 에스파다 롱가(Espada Ropera, 레이피어), 톨레도 검(Toledo Sword)이 부딪치면 항상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이 쓰는 장검만 부러진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 측은 병력 숫자가 300여 명에 일로카노라는 지방의 원주민들과 민병대들 그리고 원거리 무기로 총과 화포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스페인군 외에는 쓸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콩키스타도르 외에는 갑옷조차 입지 않는 오합지졸들이었다.


일단 무기의 수준면에서는 임봉(리마홍)의 해적단이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보다 훨씬 더 강했다. 누가 봐도 게임이 되지 않은 싸움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봐야할 점은 임봉(리마홍) 해적단의 무기들에는 중국제, 일본제, 스페인제 등 다양하게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해적이라는 특징 때문에 그동안 임봉(리마홍) 해적단들이 스페인 군함대들도 자주 공격하고 격침시키고 약탈해서 빼앗은 스페인식 장비들을 다른 곳을 약탈할 때 계속 사용하거나 아니면 그 약탈품들을 분해한 후에 생산방법을 연구한 후 따로 자체적으로 생산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어쨌든 이렇게 스페인군보다 훨씬 압도적으로 막강한 철제 무기들로 중무장한 임봉 해적단들은 마닐라에 상륙하자마자 콩키스타도르들보다 훨씬 강력한 자신들이 보유한 화력 무기들로 첫 번째로 마주친 "마틴 데 고티(Martín de Goiti)"라는 스페인 대위가 이끄는 부대들을 순식간에 전멸시키고, 임봉(리마홍) 해적단들은 자신들에게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저항하는 마틴 데 고티 대위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하지만 샤꼰 대위와 벨라쓰께즈 대위가 데리고 온 스페인 저항군 본대들의 저항에 부딪쳐 임봉의 해적들은 더는 진입하지 못하고 전략적으로 철수해야됐다. 일이 쉽게 풀릴 줄 알았지만 예상 외의 거센 저항이 격노한 임봉(리마홍)은 해안에서 사로 잡았던 전쟁 포로(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들을 죄다 사살하고 해적선으로 복귀했다. 결국 이때 임봉 해적단의 첫 전과는 스페인군 14명을 전사시키고, 마닐라의 산 아구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을 불태우고 파괴하고, 스페인 갤리선 몇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냈음에도 끝내 마닐라 함락은 실패했다.


1574년 명나라의 해적 임봉의 필리핀 침략에 의해 파괴당한 산 아구스틴 성당(San Agustin Church)은 1607년 다시 재건되었으나 원래의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철수한 틈을 타 스페인군들은 긴급하게 또 임봉 해적단들이 쳐들어올까 봐 마닐라에 방어용 진지들을 구축했는데, 다행히도 이때 후안 떼 쌀쎗또는 50명의 추가 졸병(콩키스타도르)들을 데리고 마닐라에 도착했다.


그로부터 2일 뒤, 꼭두 이른 아침이 되자마자 임봉(리마홍)은 전 해적 함대들을 이끌고 해안을 향해 3발의 대포들을 발포했다. 갑작스런 발포에 당황한 건 스페인군들이었다. 왜 여기서 발포를 계속하지 않고 3발만 발포했는 지에 대해서는 미스테리이지만, 아마도 임봉(리마홍)은 필리핀을 자신의 식민지로 삼는 것과 동시에 필리핀에 자신(임봉)만의 해적 왕국을 건설하려고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필리핀은 내 것이니 죄다 파괴해버리면 나중에 자신만의 해적 왕국을 건설할 때 고생 좀 할테니 말이다.


여튼 그 3발의 발포 후에 임봉(리마홍)의 명나라 해적들은 즉각 마닐라에 상륙했고, 스페인군들과 백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아까 말했듯 무기의 수준에서 명나라 해적들은 스페인군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그렇기에 이 백병전에서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은 무차별적으로 학살당했다. 하지만 여기서 임봉(리마홍)은 그만 오만에 빠지는데, 스페인의 콩키스타도르들을 오합지졸로 판단한 임봉(리마홍)은 전략적으로 실수하는데... 소수의 80여 명의 해적들만을 내부로 진입시켰고 그들은 무작정 마닐라 도시의 내부를 향해 진격한 해적들은 시가전으로 나가면 금방 스페인군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하지만 임봉의 해적들을 기다리는 건 그보다 훨씬 많은 인구수의 스페인군들이었다. 결국 인구수로도 절대 불리한 데다가 스페인군들의 처절한 저항에 다시 한 번 부딪히게 된 임봉의 해적들은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한 채 장기전으로 갈 경우 보급로까지 차단되서 고립되면 말라 죽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다시 한 번 마닐라에서 철수했다.


팡가시난주(Province of Pangasinan)는 필리핀 루손 섬에 있는 일로코스 지방의 주로 필리핀에서 세 번째로 인구가 많은 주다. 출처: 위키백과.



이렇게 마닐라에서 크게 재미를 보지 못한 임봉(리마홍)은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지지부진하게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자... 결국 이대로 장기전으로 계속 가게 되면 절대적으로 보급품이 부족한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말라 죽을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임시 거처를 마련하기로 했다. 그렇게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필리핀의 모든 섬들을 수색한 끝에 새로운 임시 해적기지로 삼은 곳은 루손 섬의 중부 해안에 위치한 현재의 "팡가시난(Province of Pangasinan)"이라는 지역이었다.


참고로 "세계 패권국가인 명나라의 영락제 치세때"에 정화(명나라)가 이 "팡가시난"을 개척한 후, 명나라의 식민령인 도독부가 이곳 팡가시난에 아주 잠깐 일시적으로 세워 졌던 적도 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선지 오래되지 않아 황제의 명령에 의해 철수됐다. 세계의 여러 역사학자들은 저마다 이에 대해.. 어떤 학자들은 필리핀 독립운동가들의 거센 저항 때문에 필리핀의 팡가시난에 주둔했던 명나라 군인들이 철수했다는 말도 있고, 명나라가 이곳 팡가시난을 장기적으로 식민지배해봤자 얻는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에 철수했다, 라는 주장도 있는 등 여러 설들이 난무하는 상황이다.


실제로 이곳 팡가시난은 다른 동남아시아 도시들보다 그렇게까지 무역적으로 중요한 도시도 아니었고 이곳을 유지해봤자 얻는 경제적 이득은 크지 않았을 것으로 계산된다. 어쨌든 그런 여러 가지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혼합되서 결국 명나라의 필리핀 팡가시난 식민통치는 아주 일시적으로만 이뤄졌다.


여기서 또 재밌는 사실이 있는데..


자신을 화교계라고 주장했던 필리핀의 제10대 대통령이자 독재자로 악명 높은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가 이곳 팡가시난 지역 출신이고 정치적 기반도 이곳 주변이기도 하다. 게다가 필리핀 마르코스 대통령은 본인의 조상이 명나라의 해적 선원 출신이라 발언한 바 있으며, 이를 가장 자랑스럽게 여긴다고 했다. 그렇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대통령이 주장했던 자신의 "조상이 명나라의 해적 선원 출신"이라는 말은 임봉(리마홍) 해적단의 일원이 자신의 조상이라는 말이었다.


필리핀의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Ferdinand Marcos)는 자신이 명나라 해적의 후손이라고 강하게 주장했다.


실제로 임봉(리마홍) 해적단은 전원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에, 이곳 필리핀 팡가시난에 해적기지를 건설한 후에 임봉(리마홍) 본인은 아니지만, 남성 해적 선원들 중 일부가 팡가시난에 거주하던 필리핀 원주민 일부와 결혼해 자식을 낳았다는 주장이 필리핀의 역사학계에서는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게다가 실제로 당시에는 모든 필리핀 원주민들은 다 알몸으로 생활했는데 팡가시난의 원주민들 가운데 "이푸가오, 네그리, 이고로 원주민 사회"는 다른 필리핀 원주민들과는 달리 "옷"이라는 걸 입고 있었으며, 일부다처제를 지향하는 다른 필리핀 원주민들과는 달리 그들은 일부일처제를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로 명나라를 비롯해 그 이전의 고대 중국의 역대 제국들도 모두 일부일처제를 시행해왔기 때문에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팡가시난에 은신하면서 그곳 원주민들에게 명나라식 일부일처제 개념과 "의상(옷)"의 개념을 도입한 게 아니냐는 가설이 필리핀에서는 거의 역사적으로 정설이나 다름없다. 확실히 다른 필리핀 원주민들과 달리 유독 이 팡가시난쪽 원주민들만이 일부일처제, 옷의 개념을 간직하고 있던 걸 봐서는 이는 역사적으로 사실에 가까운듯 하다.


어쨌든 그곳 팡가시난에서 해적기지를 건설한 임봉(리마홍)은 한동안 칩거(蟄居)에 들어갔으나, 여전히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려는 그의 야망은 멈추지 않았다. 임봉(리마홍)은 팡가시난을 전초기지로 삼아서 보급품들을 쌓으면서도 필리핀 식민지화에 대한 군사적 계획들을 차근 차근 수립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때 스페인의 후안 떼 쌀쎗또는 임봉(리마홍)이 필리핀에 대한 공세를 멈춘 틈을 타서 마닐라에 방어벽들을 견고하게 쌓았으며 임봉(리마홍)의 제2차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방어군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임봉(리마홍) 해적단들이 스페인 군함대들을 공격해서 격침시키는 횟수가 줄어들자, 이번에는 쌀쎗또는 그동안 당했던 것들을 앙갚음하기라도 하듯이, 치욕과 원을 되갚기라도 하듯 스페인 병졸 256명과 일로카노 원주민들 2500 ~ 3000여 명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1572년 3월 23일 샤꼰, 째브쓰, 리뻬라, 라미레쯔, 짜꼰 대위들이 데리고 온 59척의 배들로 사실상 동남아시아에 있는 모든 스페인 병력들을 다 긁어 모아서 출항했다.


쌀쎗또는 수색 끝에 임봉(리마홍)이 팡가시난에 있음을 확인하고 그쪽으로 도달했는데, 쌀쎗또는 리뻬라와 28명의 병졸들을 보내어 육지 쪽에서 임봉(리마홍)의 해적 요새를 압박했지만 임봉(리마홍)은 이미 쌀쎗또가 오고 있는 것을 알고 그의 계획을 미리 이미 간파했었기 때문에 전투를 밤까지 장기전으로 끌고 갈 생각으로 질질 끌었고, 결국 밤이 되면서 무덥고 습한 필리핀 열대야 때문에 시야가 보이질 않은 탓에 스페인군들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임봉(리마홍)은 전열을 가다듬고, 그렇게 다시 임봉 해적단 vs 스페인군 간의 전쟁이 시작된다. 하지만 전쟁은 길고 지루했다. 자그마치 4개월 간이나 어느 누구도 쉽게 승기를 잡지 못했다. 무기면에서는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압도적으로 더 강했지만, 스페인군들은 죽어도 죽어도 계속 병력 증원(增援)이 될 정도로 인구수가 많았다. 무기가 우세한 임봉 해적단 vs 인구수가 우세한 스페인군의 전쟁은 지루하면서도 긴 전쟁(포위 공방전, 요새전)으로 이어졌다.



결국 먼저 지친 쪽은 임봉 해적단이었다. 해적단이란 건 약탈이라던가 뭔가 경제적으로 이득이 있어야 싸울 맛이 나는 법인데... 임봉 해적단은 자그마치 4개월이나 별다른 소득없이 스페인군들과 지루한 공방전을 이어가고 있었다.


게다가 명나라의 명장 "척계광(戚繼光) 장군"의 휘하 장군들 중 1명인 "호수인(胡守仁) 장군"이 황제의 명령을 받고 군함대를 조직해서 임봉 해적단들을 몰살시키기 위해 필리핀을 공격하기 위한 출병식을 마무리했다는 소식까지 임봉(리마홍)의 귀에 들려오면서 명나라군과 스페인군이 연합해서 임봉(리마홍) 해적단을 공격하면 이길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임봉은 끝내 철수를 결정한다.


철수는 신속하고 빨랐다. 임봉(리마홍)은 해적들과 함께 요새 안에서 30척의 기동식 전함들을 건조했고, 1575년 8월 4일 스페인 군함대들의 포위망을 뚫고 철수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한다.


스페인 측은 70여 명이 넘게 전사했지만 양측 모두 처음에만 백병전으로 밀어붙였지 곧 총, 대포 같은 화력전으로 서로 치고 박고 싸운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임봉 해적단이나 스페인군이나 모두 막강한 화력의 총, 대포들로 무장했기 때문에 쉽사리 승부가 나지 않아 4개월간이나 장기전으로 이어진듯하다.


어쨌든 임봉(리마홍)의 필리핀 침략 및 식민지화 시도는 필리핀 역사에서 엄청난 충격이긴 했는데 필리핀에 많은 잔재들과 흔적, 상처들 그리고 전설들을 남겼다.


필리핀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 우르두자(Urduja)의 남주인공은 임봉이 롤모델인듯 하다.


대표적으로 필리핀 최초의 애니메이션 영화인 웃르뚯짜(Urduja)가 그것이다. 이 필리핀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남주인공은 "임봉(애니메이션 상에서는 "림항"으로 등장. 아마 임봉으로 추정됨)"을 롤모델로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용은 이렇다. 13세기가 배경인데.. 림항은 현상금이 걸려있는 중국의 해적이다. 그런 림항을 찾아서 한몫 챙기려는 중국인 한족 현상금 사냥꾼은 총, 대포를 가득 실은 군함들을 타고 림항을 추적하다가 우연히 림항이 숨어 들어간 필리핀 섬까지 다다르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는 지도상에서는 전혀 없었던 팡가시난 왕국이라는 가상 속 필리핀 왕국이 있었고, 그곳을 다스리는 건 여왕이었다. 이에 이 중국인 해적 사냥꾼들은 이 왕국을 식민지로 만든 후에 막대한 금은보화들을 자신에게 바치게 했다. 그때 임봉이 혜성처럼 등장해서 이 필리핀 왕국을 구해낸다는 것이다.


이 필리핀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면 느끼는 씁쓸함은 13세기에 필리핀을 식민지화 시키는 것도 중국 한족이고, 그 식민지화에서 필리핀을 구원해주는 것도 중국 한족이라는 것이다. 결국 이 애니메이션 영화에서 필리핀 원주민들은 그냥 힘없이 식민 지배를 받거나 혹은 누군가가 자기들을 그런 식민 지배에서 구원해줘야만 구원받을 수 있는 그런 무능한 존재들로만 등장한다. 물론 실제 필리핀 역사를 보면 아주 틀린 얘기는 아니지만.. 그걸 필리핀인들이 스스로 만들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왜 필리핀의 독재자인 10대 대통령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자신의 조상을 임봉의 해적들 중 1명이라고 그렇게 주장했는지 알 것 같다.


무능한 필리핀인이라는 민족보다는... 비록 필리핀을 침략하고 식민지배하려고 계획하고 시도했지만 스페인군들을 압도할 정도로 강한 화력을 지닌 임봉 해적단의 해적들 중 1명을 자신들의 조상들로 섬기고 싶어하는 게 필리핀인들의 심리인 것일까.


어쨌든 이야기가 너무 삼천포로 셌는데...


그 후 어쨌든 그렇게 팡가시난에서 철수한 리마홍(임봉) 해적단은 "타이완(대만)"으로 가서 그곳을 자신의 해적기지로 삼고 다시 해적질을 시작하면서 필리핀이나 혹은 다른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식민지화시키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동남아시아 식민지화 계획을 포기하지 않고 있던 찰나에 결국 임봉(리마홍)은 자신을 끝까지 추격했던 호수인(胡守仁) 장군이 지휘하는 명나라의 군함대가 대만까지 침략하면서 완전히 전멸당한다.


그후의 임봉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더 이상 없는 것으로 보이 호수인 장군에 의해 참수된듯하다. 게다가 당시 타이완(대만) 섬은 아직 명나라의 마지막 장군인 "정성공(鄭成功) 장군"이 네덜란드군들을 학살한 후 대만을 식민지화시키기 전이었고, 네덜란드군들이 들어오기도 전이었다. 그러니 타이완(대만)에서 죽었다면 소식이 끊길 법도 하다.


일본의 나가사키 무역항구에 자주 정박했던 명나라 해적들의 기동식 전함들 중 소형 전함을 그린 그림


하지만 그때 임봉(리마홍)이 지휘했던 해적단들은 모두 명나라의 호수인 장군에 의해 전멸당했으나, 임봉만큼은 생존해서 시암(태국의 옛 국명)인도에서 간간히 목격되었다는 목격담들이 한동안 전해지기도 했다. 아무래도 동남아시아를 들쑤시고 다녔던 해적이었다보니까 동남아시아 전역에서 목격담들이 끊이질 않았던 것 같다. 요즘으로 치면 포르투갈이나 네덜란드, 스페인 등에서 간혹 히틀러는 살아있다는 떡밥이 계속 나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려나.


계속해서 임봉 해적단들을 추격하던 명나라군들은 필리핀을 비롯해 동남아시아 곳곳에 간첩들을 심어뒀었다. 그래서인지 명나라군에게 전멸당했으나 가까스로 목숨만 건졌던 임봉(리마홍) 해적단이 전열을 재정비하고 필리핀을 침략해서 스페인군들을 공격했다는 소식은 명나라군에게 이미 첩보로 다 들어가 있었다.


한편, 무시무시한 임봉(리마홍)의 침략으로부터 필리핀을 지켰던 마닐라 전투의 수호자인 "후안 데 살세도(Juan de Salcedo)"는 마닐라 전투가 끝난 다음 해인 1576년에 말라리아 질병에 걸려 사망했다. 아무래도 필리핀 같은 동남아시아 지역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처럼 무더운 열대 지방이기 때문에 뎅기열이나 말라리아들이 기승을 부렸고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이 말라리아 치료제가 발명된 후 18세기 후반부쯤은 되서야 필리핀, 남아메리카를 완전히 속국으로 만들수있었다. 그 전까지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은 필리핀, 남아메리카의 깊숙한 곳까지는 먹지 못하고 해변가들밖에 먹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열대 지방에서 안까지 들어가면 말라리아 모기들이 워낙 많아서 죽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물론 엄밀히 따지면 필리핀의 입장에서 볼때 "마닐라 전투"는 그저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침략한 명나라의 침략자 임봉(리마홍) vs 자기의 속국인 필리핀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스페인 왕국의 후안 데 살세도(Juan de Salcedo) 간의 필리핀 먹기 쟁탈전에 불과했고, 불쌍하고 힘없는 필리핀 원주민들은 두 외세 침략자들간의 힘겨루기 쟁탈전에 억울하게 죽어나갈뿐이었다....


그래서 당시 명나라의 수군제독들 중 1명은 자신들이 직접 임봉 해적단을 소탕할 수고를 덜었다면서 감격했고, 사신을 보내 필리핀을 임봉 해적단으로부터 지켜낸 스페인 왕국의 후안 떼 쌀쎗또(Juan de Salcedo)의 공훈을 치하하려고 했으나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사신들은 다시 명나라로 귀국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마닐라 전투를 계기로, 명나라와 스페인 양국 간의 외교적 관계는 더욱 사이가 좋아지고 더욱 돈독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시점부터 더욱 더 친해진 양국가는 갤리온 무역을 늘렸다. 동남아시아를 거점삼아 활동하던 명나라 해적들과 왜구들의 수많은 해적기지들 중 1곳이었던 필리핀을 토벌한 덕분에 조금이나마 그 군세가 줄어들긴 했으나, 그후에도 계속 기승을 부렸고 명나라 해적들과 왜구들은 틈만나면 동남아시아의 태평양을 오가는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군함대들이나 무역선들을 공격해서 약탈하고 전리품들을 빼앗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어쨌든 임봉(리마홍) 해적단 토벌 이후로는 그 규모가 약간이나마 조금 줄어들긴 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인 셈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명나라와 스페인 왕국은 외교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동맹관계인 국가였다는 점이다. 대항해시대 당시 명나라는 네덜란드, 포르투갈 왕국과는 사이가 안 좋아서 해전도 가끔 치뤘지만(전부 명나라가 승리했다) 스페인 왕국과는 거의 매년 무역선이 오갈 정도로 사이가 좋은 동맹관계였다.


아무래도 14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세계 패권국가였던 명나라와 바다의 패권국인 스페인 왕국이니까 "패권국은 패권국을 알아보는 법이니, 패권국끼리는 서로 통하는 게 있어서 친한걸까?"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물론 그런 생각도 아예 틀린 생각은 아니긴 하지만 정확히는 명나라와 스페인 왕국은 서로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기 때문에 복잡한 계산이 들어가있다.


당시 명나라는 국가 화폐가 은이였고, 이로인해 전 세계의 기축통화가 '은'이 됐따. 아무래도 세계 패권국가가 명나라였으니 명나라의 국가 화폐가 곧 세계 화폐가 된 셈.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생겼으니 명나라는 자국 내에서 은을 생산하는 것이 어려웠다. 세계적으로도 중국 대륙은 철제 무기 제작에 꼭 필요한 철광석(鐵鑛石)들은 엄청나게 많은 지역이었지만, 정작 금이나 은 같은 광물들이 매장된 금광(金鑛) 은광(銀鑛)들이 별로 없었다.


따라서 명나라가 자국의 국가 화폐인 은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외국에서 수입할 수밖에 없는데 그 수입처가 바로 일본,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이었다. 명나라는 일본,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에게서 은을 계속 수입해오지 않으면 국가 화폐를 찍어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 왕국은 그런 명나라에게 은을 판매하면서 서로 상생했던 것이다.


즉, 명나라와 스페인 왕국은 둘다 패권국이면서도 둘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관계였기도 했다. 그런데 이런 구조는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그렇다. 이런 경제적 구조는 서로가 서로에게 너무 얽혀있다. 즉, 명나라는 스페인 왕국이 망해버리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는다. 반대로 스페인 왕국도 명나라가 망해버리면 큰 타격을 입는다.


즉, 서로가 경제적으로 너무 얽혀있다보니 상대국가가 망해버리기라도 하면 완전히 파산 지경까지 간다는 것이 문제였다. 그렇다보니 누르하치의 후금제국이 건국되면서 세계 판도가 완전히 재편되자 명나라는 휘청거리고, 명나라가 휘청거리면서 덩달아 스페인 왕국의 경제도 파산 지경까지 가면서 명나라가 망할때 쯤에는 나비 효과로 스페인에게까지 영향을 가해서 스페인도 같이 파산해버린다. 그래서 스페인 왕국은 7번이나 파산한다.


물론 스페인이 망한 이유는 꼭 명나라가 망해서 같이 망한 건 아니지만 명나라가 망하면서 그 영향을 받은 스페인도 망한 것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더욱더 신기한 점은 세계 최강의 기병대인 팔기군을 앞세워서 명나라와 총력전을 개시한 누르하치의 후금 제국이 승리하면서 명나라가 멸망하는데

스페인 왕국이 망한 계기 역시 떠오르는 신흥 왕국인 영국과의 전쟁에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처절하게 박살나면서 오합지졸로 전락했고, 그로 인해 영국이 부흥하면서 망했다.


즉, 둘 다 막강한 신흥 세력에 의해 망했다는 점 역시 비슷하다.

어쨌든 명나라는 이렇게 스페인과 친해서 간접적으로 교류들을 많이 했지만, 네덜란드와는 약간 적대관계를 유지했다면, 일본은 네덜란드와 친했지만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과는 적대관계를 유지했다.


어쨌든 그렇게 명나라와 스페인 왕국 간의 서로 겔리온 무역에서 사무역 및 밀무역으로도 규모가 확대되었고 이런 매우 우호적인 관계는 대청제국(청나라) 시대때까지 유지됐다. 그리고 서로 교류를 통해 스페인 왕국이 남아메리카의 모든 은들을 명나라에게 바친 결과 축적(蓄積)된 압도적인 양의 은으로 대청제국 시대 때는 옹정제가 "지정은제(地丁銀制)"를 실시하는게 가능해졌다.


하지만 명나라는 포르투갈 왕국에 더 먼저 교류했다. 당시 명나라는 포르투갈 왕국보다 훨씬 군사력이 막강했었기 때문에 명나라 해군함대 vs 포르투갈 해군함대들이 전쟁했던 "둔문해전(타마오 해전, 1521년 발발, 명나라군의 승리)""첸카오완 해전(시사오완 해전, 1522년 발발, 명나라군의 승리)" 등에서 명나라가 포르투갈과 전쟁해서 모두 연전연승했던 전적들이 있다.


이렇듯 포르투갈 왕국보다 훨씬 더 막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명나라는 해전들에서 연전연승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 왕국이 막대한 양의 은들을 명나라 황제에게 바치자 당시 해적들의 소굴이나 다름없던 쓸모없는 쓰레기 동네였던 최남단의 섬에 가까운 반도인 마카오를 임대해줬다.


어쨌든 마닐라 전투의 보고를 받은 명나라는 스페인 왕국과 공식적으로 교류를 시작했는데, 1575년 경에 성 아우구스뜨 수도회의 선교사들인 스페인 사절단들은 명나라 관리들의 안내를 받고 "복건성"에 도착했다.


중국 당국은 마닐라 전투에서의 공훈을 스페인에게 치하했다. 이에 스페인 왕국은 자신들도 포르투갈 왕국처럼 막대한 양의 은을 황제께 세금으로 바칠테니 제발 마카오 같은 쓰레기 동네라도 좋으니 임대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하며 애걸복걸 사정했으나 중국은 포르투갈 왕국의 경우는 특별히 임대를 허락해준 것이기 때문에 스페인 왕국에게 임대는 불허했다.


다만 여기까지 고생해서 사절단들이 온 것도 있고, 마닐라 전투의 공도 있고 하니 스페인인들에게만 특별히 마닐라 전투의 공을 치하하는 의미에서 복건성과 저장성 해안에 상거래를 허가했으며, 푸저우(福州), 샤먼(厦門), 취안저우(泉州)에서 무역을 할수 있게 허락했다.


어쨌든 이렇게 명나라의 지원을 받은 스페인 왕국은 스페인 왕국 ~ 필리핀 ~ 멕시꼬를 연결하는 삼각무역의 길을 열게 된다.


하지만 얼마안가 세계 최강 팔기군으로 명나라와 총력전을 해서 승리한 누르하치에 의해 명나라가 멸망한 후 대청제국이 건국되고, 스페인 왕국은 7번의 파산 끝에 망조로 추락하게 되고 포르투갈 왕국도 마찬가지로 경제적으로 내리막길로 떨어지면서 대항해시대를 주름 잡던 세계적인 초강대국들인 명나라,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의 시대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져버리고 만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