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혹적인 문명: 대영제국의 역사

고대 시대부터 대영제국의 해체까지 매혹적인 영국의 역사

by 바다의 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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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속에서,


"해가 지지 않는 나라(The empire on which the sun never sets)"


무슨 뜻일까?


한마디로 남반구에서도 무더운 열대 섬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열대 섬에


해를 비추듯 계속 영향력을 투사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최초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바로 대영제국인 것이다. 간혹 대항해시대 때의 스페인 왕국이 원조 아니냐고 얘기하는 사람이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스페인 왕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아니다. 스페인 왕국의 영향은 기껏해야 라틴 아메리카, 필리핀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영제국이 세계 정복을 했다고 공인되지 않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대영제국이 영향력을 투사했던 지역들을 보면 대부분 인도, 남아프리카 일부, 캐리브 해 지역 일부 같은 남반구나 혹은 열대 지방들에 거의 한정되어 있고 북반구의 대륙 세력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반면, 몽골제국은 순식간에 속전속결로 직접 군사 정복을 통해 세계를 정복했기 때문에 “세계 정복(world conquest)”이라고 세계 역사학계에서 공인되어 있다.


몽골제국이 정복한 제국들은 모두 세계적인 초강대국들인 중국 금나라, 송나라, 중동, 화레즘 제국, 아바스 제국, 룸 셀주크 제국(혹은 셀주크 제국), 러시아, 헝가리, 폴란드, 동유럽 전역, 고려, 중앙아시아 전역, 서아시아 전역, 아랍권, 이슬람권이었다. 이렇게 몽골제국에게 정복당한 제국들은 하나 하나가 모두 세계적으로 군사력이 막강한 초강대국들이었다. 그렇기에 세계 역사상 유일하게 "세계 정복"했다는 제국하면 몽골제국이라고 공인된 것이다.


즉, 세계 역사학계들은 두 세계 최강국(몽골제국, 대영제국)의 정복 방식과 통치 형태의 차이를 반영하여, 대영제국의 경우는 “world conquest” 대신 “colonial empire” 같은 용어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으며


몽골제국은 “세계 정복(world conquest)”이었던 반면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는 아니었고,


대영제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반면에 "세계 정복"은 아니었던 것이다.


학술적으로 보면 이렇다. 여기까지가 학술적으로 정의된 대영제국이다.



하지만 대영제국도 대단한 제국인 것은 사실이다.


중세시대 때까지 동양이 가지고 있었던 세계 패권을


서양으로 들어오게끔 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국가가 산업혁명 후의 대영제국이기도 하고


근현대시대 때 이후에 어떤 국가에 뭔가 이상한 일이 생기면 대영제국을 지목하면 거의 맞는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이며, 오늘날 현대 문명을 탄생하게 했던 건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과 미국의 공이 큰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오늘은 고대 영국의 탄생부터 대영제국의 해체까지의 역사를 다뤄보겠다.




A1) 석기 시대의 영국(수십만 년 전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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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섬에는 약 수십만 년 전부터 정착하여 초기 인류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흔적이 발견된다. 그들은 채집을 주로 하였다. 그로부터 한참이나 흘러서 기원전 수만 년 전쯤에 기후가 온화해지면서 영국 섬에는 점차 인구들이 증가하기 시작했고 인구 증가와 함께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발달하면서 농경이 도입되었고, 이와 함께 거대한 기념물(예로 스톤헨지)들이 생겨나는 등 사회가 발달하기 시작했다.


재밌는 점은 라틴 아메리카의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은 약 16세기 때까지도 이 청동기로 조차 발전하지 못해 석기시대로 멈춰있었던 문화권들이 바로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이었다. 하다 못해 필리핀 원주민들조차도 청동기로는 이미 발전했던 걸 생각해보면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이 건축 기술은 높았지만 군사력은 필리핀 원주민들보다도 훨씬 약했다.




A2) 석기 시대 이후의 영국(약 기원전 2500년경 ~ 기원전 800년 쯤)




청동기 시대(약 기원전 2500년경 ~ 기원전 800년쯤) 에 농사로 인한 잉여 생산물이 많아지면서 사회가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청동이 만들어지면서 문화적으로도, 국방적으로도 발달했다.







B) 철기 시대의 도래와 고대시대의 영국(약 기원전 800년쯤)




기원전 800년쯤부터 탄생하게된 철기 시대는 철제 도구의 사용으로 인해 사회 전반에 큰 변화가 생겨났다. 철의 사용은 농기구를 만들어내면서 농업 생산성을 높이고, 서로 충돌 시 우위를 만들어 주면서 각 지역의 권력 구조를 재편하게 만들었다.


그 후 "켈트인(Britons)"이라 불리는 민족을 비롯해 여러 다양한 민족들이 섬의 여러 지역에서 독자적인 문화와 사회를 낳았다. 이들은 저마다 구전 풍습, 독특한 예술, 미신 의례들을 통해 각자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냈다.


그 한참 후에 기원전 55년 ~ 54년 쯤에,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잉글랜드 섬에서 켈트인과 맞서 싸워서 승리하면서 로마인들은 이 잉글랜드 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서기 43년 쯤에 클라우디우스라는 이름의 지도자의 정책으로 인해 당시 미개척지였던 영국 섬을 쉽게 먹은 로마는 약 400년 정도간 영국 섬을 개척하게 된다.


그 400년은 영국에 축복이었다. 로마가 영국을 다스리면서 석기시대나 다름없던 영국에 남녀 혼욕탕이나 위생 관념, 로마의 아름다운 문화 등을 영국 섬에 꽃피웠다.


영국 섬은 아니지만 기원전 3세기 ~ 1세기 쯤 사이에 현재의 론 강(Rhône)알프스(Alps) 지역에 살았던 켈트인들 가운데는 "케이사테(Gaesatae)"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마치 라틴 아메리카의 잉카인, 아즈텍인, 마야인,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뉴질랜드나 폴리네시아쪽 원주민, 필리핀 원주민들처럼 옷을 입지 않고 벌거벗은 알몸으로 로마군들과 전쟁해서 승리했던 알몸의 켈트인 남녀들이 많았다고 전해진다.


"케이사테(Gaesatae)"라는 용어는 라틴어로 “알몸의 남녀들(naked ones)”을 의미하며,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학자들의 기록에 의하면 켈트인들 가운데는 벌거벗은 알몸이 되어 로마군과 싸우는 켈트인들이 많다는 기록이 있다.


특히 그리스의 학자인 폴리비우스는 "그들(켈트인들)은 다른 갈리아인들과는 다르게 알몸으로 전투에 임했다."고 얘기했다. 이는 종교적, 마술적 의례의 일환으로 알몸으로 로마군과 전쟁했던듯 하다. 또 "케이사테(Gaesatae)"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들도 많았다고.


sadddadsafsf.jpg 로마군과 전쟁했던 알몸의 남녀들이었던 켈트인 "케이사테(Gaesatae)"의 대표적 이미지


물론 "케이사테(Gaesatae)"에 대해서는 영국 섬의 켈트인들이라기보단 주로 로마 근처의 켈트인들과 관련된 경우가 많았기에 영국의 켈트인들도 알몸으로 전쟁했는 지는 아직 더 밝혀져야 한다.


"케이사테(Gaesatae)""투창을 쓰는 사람"을 의미하며, 갈리아 및 켈트 문화에서 있었다고 하며 알몸이었지만 마치 바디페인팅(Body painting)처럼 파란색 타투를 온 몸에 색칠했던듯 하다. 물론 알몸이긴 했지만 무기나 방패는 들고 있었는데 투창과 타원 방패를 든 것으로 추정된다.


기원전 222년쯤에도 로마군들과 전쟁해서 승리했고 여러번 로마군들을 패배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을 처음 본 로마군들은 공포에 질려 도망치기 바빴으나 케이사테에게도 약점이 있었으니 바로 케이사테가 오로지 보병으로만 이뤄져 있는데다, 매우 느렸고 곧 켈트인 케이사테들의 좁고 긴 방패가 화살과 투창을 막아내기에는 방어력이 부족했다는 단점이 있었다고 한다.


sadddadsafsf.jpg 아무튼 이런 모양의 방패가 아니었을까 추정된다





알몸 남녀들인 "케이사테(Gaesatae)"는 이후로도 꾸준히 기록상에 등장하고, 꼭 켈트인이 아니라 하더라도 갈리아인들 일부가 알몸으로 싸웠다는 기록도 있거나, 목걸이만 달고 밑에를 입지 않고 성기를 덜렁거리면서 달려오는 전사들이 트럼펫과 함께 신음을 지르며 로마군과 전쟁했다는 얘기가 자주 써있는 걸 보면 굳이 케이사테(Gaesatae)가 아니더라도 고대시대 때는 로마인들을 제외한 유럽인들은 알몸으로 전쟁을 하는 경우가 흔했던듯 하다.


기원후 4세기 후반쯤부터 로마 제국은 흉노제국의 침략과 내부의 부정부패, 로마인들의 개방적인 성 문화가 가져온 타락과 쾌락과 방탕적인 문화 등으로 국력이 어마어마하게 쇠퇴하기 시작했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겹치면서 로마의 행정 체계들이 속절없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이로 인해 브리타니아 지방에서도 점차 방어 체계가 약화되었다.


그리고 결국 서기 410년 쯤에, 로마는 더 이상 브리타니아를 지키기 어려워지면서 결국 도망쳤고 영국은 그렇게 방치되었다.





C) 대항해시대의 영국



중세시대 때 영국은 유럽에서 가장 약소국이고 후진국이고 존재감이 별로 없던 지역이었다. 물론 이는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왕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약소국들이었던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왕국은 영국보다 먼저 생존을 위해서 배를 띄우면서 경제 성장을 했던 반면에 영국은 후발주자에 불과했다.


원래 중세시대 유럽에서 군사력이 가장 높았던 국가들은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 프랑스쪽이었다.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의 다음 국가로 프랑크 왕국은 약 5세기 ~ 9세기까지 존속했던 게르만계 왕국이었다. 주로 오늘날 프랑스와 독일에 걸쳐있던 왕국이었다. 그리고 이런 프랑스보다 군사력이 강한 제국이 신성로마제국, 폴란드였는데 이는 먼 미래에 13세기에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했던 몽골제국이 유럽까지 침략하면서 신성로마제국의 연합군들을 다 학살하고 폴란드를 정복, 식민지화하면서 유럽은 초토화됐다.


어찌됐건 중세 내내 프랑스는 귀족스러운 왕국으로 유명했던 반면에 영국은 "촌놈"들이나 사는 뒤쳐지고 낙후된 동네라는 인식이 있었다.


다시 아주 아주 먼 미래인 16세기쯤에 가면 대항해시대를 열어서 잉카, 아즈텍, 마야를 먹고 부유해진 경제부국으로 성장한 스페인 왕국은 당시 황금기때는 군사력으로는 세계 5~ 6위에 해당될 정도로 높았고, 경제력으로는 세계 2~ 3위에 해당될 정도로 부유했다. 물론 대영제국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아직 동양의 제국들인 명나라, 오스만제국, 무굴제국 같은 동양의 제국들이 세계 군사력, 경제력의 1, 2, 3위 최상위권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여튼 스페인 왕국의 흥망성쇠를 굉장히 짧아서 금방 흥했다가 금방 망해버려서 7번이나 파산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물에서 만큼은 잘싸웠던 스페인 왕국의 무적함대(Armada Invencible)들은 16세기 후반쯤에는 영국(당시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의해 대패하게 된다.


16세기 황금기때 스페인 왕국의 국왕 펠리페 2세의 정책으로 인해 많은 돈을 쏟아부어서 무적함대를 만들어냈다.


이 스페인 왕국의 무적함대는 약 130척의 배와 108척 이상의 개조된 상선, 수천 명의 병력, 그리고 2000문 이상의 대포를 갖추고 있었으나, 치명적인 약점들이 있었으니 무거운 구조로 인해 기동성이 느렸다는 것, 그런데 이게 후일 스페인 왕국이 영국에게 대패하는 데 치명적인 이유로 작용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스페인 왕국의 무적함대는 조선 수군 함대들처럼 견고하고 튼튼했지만 기동력에서 다소 아쉬웠다면 일본 군함대들은 굉장히 기동력이 빠르고 백병전에 강했는데 영국의 배들도 일본 군함대들처럼 기동력이 빨랐다. 물론 조선 수군 함대들은 백병전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압도적인 화력으로 일본 군함대들을 임진왜란 때 격침시켰다면 스페인 왕국은 정반대로 자신의 약점을 결국 극복하지 못해 대패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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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배는 당시 상대적으로 소형이었으나 무겁고 느렸던 스페인의 함선들에 비해서는 덜 느렸고, 그로 인해서 충돌할때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었다.


영국인들은 스페인 함대가 잔잔한 해역에 정박해 있을 때, 불을 지른 배를 스페인 함선들에 가까이 닿게 해서 스페인 함대들에 불이 붙게 만들었고 아비규환이 되고 공포에 질린 스페인 함대들은 오합지졸처럼 흩어졌다. 이로 인해 스페인 군의 전열이 순식간에 와해되고, 영국의 배를 방어하기 힘들어졌다. 그때 영국인들은 장거리 포격에 유리한 작은 화포와 좋은 원거리 사격술을 바탕으로 스페인 함대들에 지속적인 포격을 가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왜구 세력들 중 가장 강한 해적 세력이자 해적 출신 다이묘(영주)인 "구키 요시타카(九鬼嘉隆)"나 해적 영주 가문 출신의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通總)"가 이순신 장군과의 해전에 참전해서 조선군에 어마어마한 공격을 가했던 것처럼 영국도 "프랜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와 같은 정부 공인 해적들을 돈주고 고용하거나 스페인 함대들을 약탈하는 것을 허락하면서 영국의 해적들이 스페인 왕국의 보급선을 교란시킨 것에 큰 역할을 했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뜩이나 패배 중이던 스페인 함대는 영국 해협을 지나는 와중에 심한 폭풍우, 해류를 만나면서 상당수의 함선들이 난파되고, 살아남은 배들도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이는 스페인 왕국의 치명적인 약점들을 영국에게 노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16세기 후반부인 1588년 쯤에 스페인 왕국 무적함대의 패배는 당시 유럽 각국에 스페인 왕국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고, 알고보니 “무적함대”라는 타이틀은 허구라는 것을 알려주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이렇게 오합지졸이 된 스페인 왕국은 사실상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역사에 거의 등장하지 않고 간신히 목숨만 연명하는 처지로 전락했고.. 지중해 바다를 장악한 영국은 그때부터 경제력을 성장시키면서 차츰 "부국"의 자질을 갖게 되지만 아직 "대영제국"이 탄생하려면 한참이나 멀었다.






D) 영국인의 아메리카 이주와 미국 독립전쟁




경제 부국으로 성장한 영국이었으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이 많았는데, 대표적으로 제임스 1세(1603년 쯤 옹립, James Charles Stuart)와 그의 아들 찰스 1세(1625년 쯤 옹립, Charles I)의 기간 동안 종교적 박해와 정치적 갈등으로 인해 더욱 심해졌고, 특히 아들 찰스 1세 왕 시절에는 결혼 문제와 종교 정책으로 많은 반대에 직면했으며, 이러한 결혼 상황들은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이주를 촉진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sadddadsafsf.jpg 대충 요로코롬 생긴 영국의 메이플라워 호(Mayflower)


물론 청교도들의 아메리카 이주는 제임스 1세가 영국을 다스리던 시기부터 이뤄졌다. 영국인들은 17세기 초반 쯤부터 박해와 신앙의 해방, 경제적 기회로 인해 아메리카로 이주하기 시작했고 17세기 1620년 쯤에 영국의 청교도인들은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기회를 찾아 아메리카로 떠났으며, 1620년 쯤에 현재의 매사추세츠주 플리머스에 정착한 "메이플라워 호(Mayflower)"의 승객들의 얘기는 미국에서 영화 소재로도 자주 쓰인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처음 아메리카에 정착했던 영국의 청교도인들은 처음에는 정착에 애를 먹었고 적응하는데 무지 힘들었다고 한다. 게다가 인구마저 소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인구수에서 북미 인디언들에게 밀리면서 영국인들은 납작 엎드려서 인디언들에게 저자세로 다가가고 최대한 그들과의 공존을 선택한다. 다행히 북미 인디언들은 약하게 생긴 영국인들을 보고 불쌍했는지 도와주고 먹을 것도 나눠줬고 게다가 농사를 짓는 법도 알려준다.


이렇듯 북미 인디언들의 도움을 받아 먹을 것도 얻어먹고 농사도 지으면서 둘의 입장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농사를 짓자 출산율이 높아져 인구가 많아지기 시작한 영국인들은 곧 북미 인디언들보다 숫자가 많아지면서 "을"의 입장에서 "갑"의 입장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많은 인구수로 밀고 나간 영국인들은 곧아메리카에 있는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오늘날 미국을 탄생시켰다.


하지만 행복도 잠시 미국이 탄생했음에도 영국은 미국에 대해 내정간섭을 하기 시작하면서 미국인들은 반발하기 시작했고 1775년~ 1783년쯤까지 8년간 치뤄진 독립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면서 1783년 7월 4일쯤에 파리 조약을 통해 미국 독립선언서가 채택되어 미국은 정식으로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E) 산업혁명과 근대화




근대시대라고 부르는 18세기 후반쯤이 되면서 탄생한 산업혁명은 영국 경제와 사회 전반에 걸쳐 완전히 변화시켰다. 많은 공장들을 지어졌고 노동자라는 새로운 개념이 생겨나면서 영국을 인류 최초의 산업국가로 만들었다. 이 산업혁명으로 인해 가장 큰 변화는 인구 증과와 수도권 인구 과밀화 증상이었다. 그 전까지는 지방 곳곳에 분포하던 인구수는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로 인해 수도에 몰리기 시작했고 생활이 편리해지면서 여과생활이 생겨난 영국인들은 노동시간이 감소하면서 출산율이 높아져 인구가 폭증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중반이 되면서는 노동조합이 생겨났고, 복지제도가 개선되면서 근대 시민 사회로 발달하기 시작했고, 이는 후대 영국 정치 제도와 복지 사회 국가 건설의 기초가 되었다.


이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에 바로 대영제국이 탄생하면서 해상 국가로서 남반구에 많은 식민지들을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팍스 브리타니카(Pax Britannica)" 즉, 대영제국의 전성기라고 부르는 시대의 도래가 도래했다.


세계 역사적으로 이렇게 세계 패권을 가진 시기를 "팍스 OOO"라고 부르는데,


대표적으로 중세 때 "팍스 몽골리카나(몽골제국의 평화)"


근대 때의 "팍스 브리타니카(대영제국의 평화)"


오늘날의 "팍스 아메리카나(미국의 평화)"가 대표적이다.


이렇게 패권의 영광을 누리던 대영제국이 순식간에 망하게된 계기는 바로 2차대전 때문이었다. 패권국은 아니지만 패권국 만큼이나 강했던 나치 독일과 일본제국은 지구 전체를 위협했고 나치 독일은 영국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존재로 부상한다. 2차대전에서 중국과 미국은 일본 제국을 상대로 싸웠고, 소련과 영국 등은 나치 독일을 막기 위해 막대한 인적, 재정적 손실을 낳았고 싸움이 끝날때 쯤 되면 소련과 미국을 제외한 2차대전 참전국들은 모두 서로 큰 피해를 입고 자국이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특히 중국, 영국, 독일, 일본, 프랑스 할 것 없이 대부분의 북반구 강대국들은 2차대전에 참전해서 치열하게 싸우느라 경제가 침체했는데 반해서 북반구에서 멀리 떨어진 남반구 국가들이나 아메리카 대륙은 직접적으로 2차대전의 여파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인적, 경제적 피해가 적었는데 그렇기에 남반구나 남반구에 가까운 열대 섬인 필리핀, 아르헨티나, 나우루 같은 섬들은 1970년대에 경제적으로 꽤나 잘살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경제적 번영을 누렸던게 바로 "미국"이었다.


2차대전 중이던 1940년대부터 1960년대에 걸쳐 영국의 속국들인 인도, 아프리카 일부, 카리브해 섬 일부 등에서는 마치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점령해서 식민지처럼 만든 틈에 남아메리카 지방이 독립운동을 했던 것처럼 영국도 2차대전 때문에 영국이 휘청거리던 틈을 타서 그 속국들이 독립 운동이 활발히 했고 결국 많은 속국이 독립함에 따라 대영제국은 점차 해체하는 계기가 됐다. 경제부국 미국이 부상하면서 2차대전 후에는 쑥대밭이 된 영국과 달리 직접적인 피해는 일본 제국의 진주만 공습 외에는 없었던 미국은 영국의 경제력을 추월했고 영국에게 있던 패권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넘어가게 된 것이다.


전후 미국은 막대한 국내 소비시장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바탕으로 최대의 경제 대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는 20세기 후반 "아메리칸 센추리"라 불리며 미국이 문화, 금융 분야에서 패권을 행사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또, 미국은 하드파워인 "경제력"뿐 아니라 "소프트파워" 분야에서도 독보적이었는데 할리우드 영화, 대중음악, 예술 계통 등으로 미국 문화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동시에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모델로 미국을 찾는 국가가 생겨났다.


이렇듯 이제 영국의 시대는 저물고 미국의 시대가 되면서 영국은 단지 미국을 낳은 "엄마"로만 취급되고 있는 것이 가슴 아픈 현실이지만 영국이 근현대사에 있서 "가장 매혹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인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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