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부터~ 16세기 후기까지 일본은 "전국시대"라는 인류 역사상 매우 긴 100년~200년 넘는 대전쟁기를 겪었다. 이 기간 동안 일본의 남자들은 농사보다 "인간 베는 기술"을 먼저 배웠다. 100년~200년 넘는 전국시대 동안 일본은 실전 경험을 통해 "집단 도륙"에 특화된 군인 계층을 형성했다. 그들의 군사 기술과 전력, 정신력은 스페인군의 콩키스타도르들조차 도망칠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1600년 세키가하라 대전쟁, 1615년 오사카 전투를 끝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 열도를 통일하면서 전쟁이 끝났다. 종전(혹은 정전일지도)은 일반 백성에게는 축복이었으나, 전쟁터에서만 쓸모가 있던 군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1615년 오사카 성 전투 이후, 도쿠가와 막부 체제 하에서 수십만 명의 무사들이 주군을 잃고 낭인이 되었다. 이들은 일본 내에서는 사회적 위협 요소이자 최하층민이었지만, 그들이 가진 "강철검"과 "100~200년이 넘는 전쟁 경험"은 해외 시장에서 최고의 상품 가치를 지녔다.
주군을 잃고 영지를 몰수당한 패잔병 수십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들은 일본 사회 내부에서는 "패잔병", "폭력단", "낭인(주군 없는 무사)" 취급을 받으며 최하층으로 전락했기에 결국 일본 내에서는 설 자리가 없던 이들은, 자신의 유일한 기술인 "살인검(殺人剣)" 비싼 값에 팔 수 있는 동남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2)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일본 왜구들
당시 동남아시아는 서방(네덜란드 동인도회사, 포르투갈 왕국, 스페인 왕국, 영국 동인도회사)과 토착 왕국들이 뒤엉켜 다투는 거대한 시장이자 전장이었다. 서구 상인들은 원거리 화력은 좋았으나, 검은 잘 쓰질 못했기에 백병전을 치를 병력이 늘 항상 부족했다. 그들의 눈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스페인의 강철검보다 훨씬 예리한 강철검인 일본도로 인간을 토막 내는 일본인 용병"은 최고의 살육 병기였다.
그런데 일본 왜구들이 가장 활약할 수 있는 장소가 탄생했으니 바로 인도네시아 몰루카 제도(향료 제도) 중 반다 제도(Banda Islands)였다. 그곳은 당시 유럽에서 금보다 비싼 향신료인 "육두구(Nutmeg)"의 유일한 생산지였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VOC) 총독 "얀 피터르스존 꾼(Jan Pieterszoon Coen)"은 육두구를 독점하기 위해 "말을 듣지 않는 원주민을 다 죽이고 네덜란드인으로 채우겠다"는 계획을 세우지만 총으로 무장한 네덜란드군은 현지 동남아시아 원주민들과 싸우면서 원거리 화력에선 당연히 우세했지만 백병전에서는 밀리는 상황에서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게다가 정글 속에서 숨어 있는 원주민을 색출해 죽이는 데는 칼을 쓰는 병력이 필요했는데 그 시기의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영국 등은 이미 대부분 총과 대포 같은 원거리 무기만 거의 쓰다보니 칼을 쓰는 실력이 무뎌져서 칼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났다. 따라서 네덜란드군은 백병전에서의 열세 상황을 도저히 극복하기 힘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동남아시아에 모습을 드러낸게 바로 왜구들이었다.
일본 왜구들은 닥치는 대로 동남아시아 곳곳에 해적 기지, 해적 소굴을 만들어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약탈하고 있었는데 100~200년 넘게 칼질만 했던 일본에서 비록 패잔병들이지만 그 실력하나만큼은 세계 1위급이었던 일본인이었던 터라 그 귀신 같은 칼솜씨에 동남아시아인들은 도저히 당해낼 수가 없었고 이를 본 네덜란드군들은 감탄하면서 그 인도네시아 총독 얀 쿤은 결국 일본 낭인, 왜구들을 약 80~100명 정도를 아주 비싼 거액의 돈을 주고 용병(Japanese Mercenaries)으로 고용했다. 이 왜구, 낭인들은 전쟁터가 그리워 나온 "살인 전문가"들인데 워낙 가난해서 돈이 된다면 강철도 씹어먹을 존재들이었는데 네덜란드 총독이 매우 거액의 돈으로 자신들을 고용해주니 일본 왜구들은 마침내 자신들의 실력을 뽐낼 곳을 찾았던 것이다.
3) 동남아시아로 진출한 일본 왜구들의 동남아시아 인종 대청소(학살)
1621년, 일본 왜구와 낭인 검객과 네덜란드군 연합군들은 반다 제도의 론토르(Lontor) 섬 등을 공격했다. 기록에 따르면, 일본 낭인과 왜구 용병들은 저항하는 동남아시아 원주민 전사들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촌장(Orang Kaya)들과 가족들까지 색출해서 죄다 포획했다.
그렇게 세계 1위의 칼솜씨를 지닌 일본 왜구, 낭인과 활, 노, 총, 화기 등의 우세한 원거리 화력을 지닌 네덜란드군의 연합 공격으로 인도네시아 반다 제도의 원주민 지도자급인 "오렌 까야(Orang Kaya)" 44명을 체포하여 대나무 울타리 안에 가뒀다. 하지만 원거리 무기만 써왔던 서구의 군대는 직접적으로 칼로 적을 죽이는 것에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고 이때 일본 낭인들이 오직 카타나(일본도)만을 뽑아 들어 울타리 안으로 들어갔다.
사무라이의 할복 시 고통을 줄여주기 위해 목을 베어주는 "카이샤쿠" 기술이, 여기서는 "가장 효율적인 도살 기술"로 쓰였다. 낭인들은 지구상 가장 숙련된 칼솜씨로 지도자 44명의 목을 차례차례 빠르게 베었고, 시신을 4등분 하여 순식간에 효수했다. 이는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에게 극도의 공포를 심어주기 위한 퍼포먼스였다.
추장들이 죽자 원주민들은 정글로 급하게 도망쳤다. 하지만 일본 낭인들은 그 원주민들을 끝까지 추격하는 "인간 사냥'을 시작했다. 일본 왜구와 낭인 검객들은 숲속을 뒤지며 발각된 원주민들을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베어 죽였다.
4) 결과 "인구 소멸"
그렇게 학살 이전 약 15,000명이었던 반다 제도의 인구는 참수 전문가들이었던 일본 왜구와 낭인들의 주기적인 학살을 거쳐 1,000명 미만으로 줄어들었다. 살아남은 자들도 일본 왜구에게 붙잡혀 다른 섬으로 팔려갔다. 베테랑 살인청부업자들이었떤 일본 낭인들은 이 "인종 청소"의 최일선 실행범이었다. 이는 세계 식민지 역사에서 가장 어두운 장면 중 하나이자 완벽한 인종 청소(Genocide)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된다.
5) 일본 낭인, 왜구는 어떻게 동남아시아인들을 "가볍게" 전멸시켰나?
일본은 당시 세계 최강의 절삭력을 가진 강철검 "일본도(카타나)"를 주로 썼다. 이 일본도는 당연하지만 서양의 스페인의 톨레도 강철검보다 훨씬 예리하고 날카로웠으며, 일본도는 "강철"이나 "사철"을 고강도로 저온 제련하여 만든 "타마하가네(玉鋼)"를 수천 번 접고 두들겨 접쇠하여 제작한다. 이는 탄소 함량을 조절하여, "부러지지 않으면서도 무시무시한 절삭력"을 가진다.
15~17세기 당시 일본도의 절삭력은 세계 최고로, 갑옷을 입지 않은 인간의 몸통 정도는 단칼에 두 동강 낼 수 있는 위력이 있었다. 게다가 이런 일본도를 쓰는 낭인, 왜구들은 비록 일본 내에서는 세키가하라 대전투에서 패배한 패잔병들이었으나 그들의 검 숙련도 역시 낭인들은 최소 10년 이상 칼만 휘두른 전문가들이었다. 그들에게 인간을 베는 것은 숨 쉬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반면에 이와는 정반대로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의 주무기는 청동기 혹은 연철 수준의 칼인 "크리스(Kris)"나 "파랑(Parang)"은 찌르기에 특화되었거나 농기구 겸용인 경우가 많았는데 이조차도 왕실만이 쓸 수 있거나 일부는 마치 잉카나 아즈텍 문명, 브라질 원주민처럼 뼈 같은걸 쓰는 경우도 있었다. 철의 질도 세계 1위의 강철이었던 일본도에 비하면 불순물이 많은 연철 수준이라, 강철검과 부딪치면 깨지거나 휘어지기 일쑤였다.
즉,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에게 있어 카타나(일본도)는 마치 현재 21세기의 핵무기, 핵잠수함처럼 하이퍼 오버테크놀로지의 비대칭 전력 무기였던 셈이다.
게다가 갑옷의 경우도 일본 사무라이의 갑옷은 조립식이라서 마음대로 조립이 가능한 데다가 유연성, 민첩성, 그리고 방어력까지 모두 갖춘 엄청난 갑옷이었다. 물론 낭인은 패잔병, 왜구는 해적들이었기에 일본 정규군의 갑옷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뛰어난 갑옷들을 착용하고 있었다.
이와는 정반대로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의 경우 더운 날씨 때문에 갑옷은 커녕 옷조차도 대부분 웃통을 벗거나 상의를 항상 탈의하고 얇은 천, 기껏해야 라탄(Rattan)을 입었다. 그 결과 일본 낭인이 일본도를 휘두르면, 원주민의 나무 방패와 가죽 갑옷은 종이처럼 베어나갔고, 그 뒤에 있는 인간의 뼈와 살까지 한 번에 절단되었다는 네덜란드 측의 기록도 많다. 이처럼 방어가 불가능한 공격이었기에 일본 낭인, 왜구의 일방적 학살이 가능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본 낭인들은 비록 패잔병이었으나, 수만 명 단위의 대규모 회전(전면전)을 경험한 정규군 출신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100~200년 넘는 대전쟁 기간에서 전쟁만 했던 전쟁기계였다. 부대 단위의 전술, 매복, 돌격, 포위 섬멸에 능숙했다. 100년~200년 넘는 거대 전쟁에서 축적된 조직적인 전술의 우위였던 것이다.
반면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은 원주민 단위의 소규모 패싸움이 고작이었다.
공포심도 한몫했다. 일본 낭인들이나 왜구들은 전투 시 기합을 지르며, 적의 머리를 베어 허리춤에 매달거나 창에 꽂는 살벌한 방식으로 전쟁을 했었다. 이를 처음 본 동남아시아 원주민들에게 낭인, 왜구는 인간이 아니라 "피에 굶주린 강철 악귀(Rakshasa)"로 보였다. 공포에 질려 도망치는 적의 등 뒤를 베는 것은 낭인, 왜구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이처럼 일본은 100~200년이 넘는 거대한 전쟁을 통해 제철 기술과 살상 기술이 극한으로 발달한 상태였고, 반면에 동남아시아는 동시기의 라틴 아메리카나 폴리네시아처럼 평화로운 원주민 사회 위주였다. 일본도와 동남아시아 무기의 대결은 핵무기(일본도)와 달걀(동남아시아 무기)의 전쟁이었다. 군사력 격차가 하늘과 땅 차이였다.
그렇기에 이는 대등한 전쟁이 아니었다.일방적인 "사냥(Hunting)"에 가까웠다. 일본 낭인의 강철검(일본도)은 청동기, 석기 수준에 머물러 있던 동남아시아 원주민의 무장을 몇 천 년이나 압도했다.
일본에서는 낭인은 단순히 패잔병에 불과했지만, 동남아시아로 진출하니 그들이 가진 "살인 기술" 하나만으로도 공포의 대상이자 동남아시아에서 최강의 군사 조직으로 군림했다.
6) 일본 사무라이 환상의 이면
대중매체에서 일본 사무라이는 정의, 명예와 도를 아는 전사 군인으로 포장되지만, 실제 역사에서 특히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그들은 "돈만 주면 어린 아이도 가리지 않고 베어버리는 살벌한 제국주의적 군인" 그 자체였다. 그들의 강철검은 무사의 영혼이 아니라, 약탈과 학살의 도구로 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