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야마 토안 사건"은 일본 도쿠가와 막부가 국가적 차원에서 낭인 부대를 이용해 해외 식민지를 건설하려 했던 최초의 시도다.
당시 나가사키의 대관이었던 상인 "무라야마 토안"은 도쿠가와 막부로부터 "대만(고산국)을 식민지로 삼아 무역 기지로 삼으라"는 정식 허가를 받는다. 도쿠가와 막부의 목적은 중국 명나라 및 동남아 무역을 위한 무역 기지, 해군 전진 기지 확보가 목적이었던 것으로 이에 나가사키 대관 무라야마 토안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여 그에게 대만 정복을 허가해준 것이다.
무라야마 토안은 도쿠가와 막부의 정식 허가를 받아 13척의 함대와 약 4,000명의 패잔병(낭인) 병력을 모집했다. 그는 13척의 함대에 4,000명에 달하는 병력을 태웠다. 이 병력의 대다수는 전쟁(일거리)가 필요한 난폭한 직업군인들이자 낭인(로닌)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정규군이 아니라, 세키가하라 대전쟁에서 패전한 패잔병들로 주군을 잃고 폭력단이 되어 행인들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전쟁기계 낭인"들을 모집한 부대였다.
어..? 그런데 대만은 청제국의 식민지 아냐? 근대 시기도 아니고, 청제국의 전성기 때면 청제국, 일본의 군사력은 하늘과 땅 차이라서 일본이 감히 청제국의 식민지인 대만을 건들면 청제국이 일본을 침략해서 완전히 일본을 완전히 초토화시켜버릴텐데..?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으실 것 같아 미리 말씀드리면 1616년은 아직 청제국이 대만을 식민지로 삼기 전입니다. 대청제국이 대만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은 것은 "1683년"이기 때문에 아직 대만 섬은 "주인 없는 땅"이었습니다.
2) 침공과 학살
하지만 몇백 년 전 일본을 세계 최강 제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지켜줬던 고마운 신풍(카미카제)가 이번에는 대만 섬으로 향하던 일본 함대는 태풍을 만나 침몰하거나 흩어졌으나, 하지만 운좋게도 일부 함대는 대만 북부와 중부에 상륙했다.
운좋게도 살아남은 몇몇 낭인들은 대만 중북부에 표류했고 낭인들은 자신들이 대만 섬에 도착했다고 생각해서 곧바로 임무에 착수했다. 4,000여 명의 낭인들을 주축으로 한 낭인 부대들은 강철검인 카타나를 휘두르며 당시까지 주인이 없던 대만(타이완) 섬 고산족 원주민 마을을 급습하여 무차별적으로 학살을 자행했다.
당시 대만 원주민들은 막강한 침략자를 상대로 처절하게 저항했습니다. 그들은 "목 사냥(Headhunting)" 풍습이 있던 식인종들로 추정되며 일본 낭인들의 무차별적인 학살에도 끝까지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그러나 군사 기술과 무기 차이가 커도 너무 컸다. 대만 섬 원주민들의 무기는 기껏해야 돌도끼나 투창 수준이었으나, 일본 낭인들은 강철 갑옷과 투구를 착용고 강철검인 "일본도"와 화승총(조총)으로 중무장하고 있었다.
일본 낭인들은 상륙 지점 인근의 대만 섬 원주민 고산족 마을들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보이는 족족 베어죽이며 마구잡이로 도륙을 저질렀다. 이때 역사 기록 "통항일람" 등에 따르면, 일본 낭인들은 전공을 세우기 위해 대만 섬 원주민들을 닥치는 대로 베어 죽이고 그 귀나 코를 베었다. 는 식의 살벌한 폭력 행위가 빈번했다고 한다. 하지만 지리에 밝은 대만 섬 원주민들은 곧바로 산으로 도망쳐서 숨어살게 됐고, 보급품이 태풍으로 인해 거의 다 침몰해버린 상황에서 낭인부대는 식량 부족으로 인해 결국 장기전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현지 대만 섬 원주민들에게 "왜인(일본인)은 무섭고 잔혹하다"는 공포를 심어주었다.
게다가 비단 식량 부족 때문만은 아니었다. 겨울에는 추운 기후가 되는 북반구 국가인 일본과는 달리, 대만 섬은 전형적인 동남아시아 아열대 기후였기 때문에 일본 낭인들은 이런 아열대 기후를 경험해본 적이 없었고 결국 말라리아와 풍토병이 낭인 부대를 덮친 것도 있었다. 결국 말라리아 모기에는 속수무책이었던 것이다.
결국 일본 낭인부대는 대만 섬 자체를 점령하는 데는 성공했으나, 식량 부족, 태풍, 전염병으로 장기 지배하지 못하고 결국 철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