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의 스페인 왕국 점령이 300년이나 걸린 이유

스페인 왕국은 어째서 단번에 라틴 아메리카를 못 먹었을까요?

by 바다의 역사



어째서 "단번에" 불가능했을까요?


대항해시기부터 시작된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라틴 아메리카 진출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를 단번에 먹지 못한 이유는 거대한 지리적 장벽, 알몸 구석기 원주민 남녀들의 끈질긴 저항, 그리고 유럽 본토의 정치적 상황이 낳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에요.


우리가 흔히 아즈텍 문명과 잉카 문명이 순식간에 증발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왕국의 수도"가 함락된 것일 뿐 전역을 장악하는 데는 수 세기가 걸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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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19년쯤에 에르난 꼬르떼쓰는 꾸바 총독의 지시를 어기고 독단적으로 멕시코 만에 상륙했어요. 그리하여 아즈텍 문명의 억압을 받던 주변 알몸 원주민 남녀들(틀락스칼라 등)이 스페인 왕국과 손을 잡았지요. 그래서 이것은 스페인 왕국 단독의 승리가 아니라, "원주민들끼리의 다툼"의 성격이 더 짙었어요.


약 1521년쯤에는 천연두 창궐로 아즈텍 문명의 수도 떼노찌띠뜰란은 무너졌어요. 아즈텍 문명의 인구수는 주로 중부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멕시꼬 북부의 민족인 찌찌메(Chichimeca)인들은 16세기 후엽까지 40년 넘게 "찌찌메까 다툼"을 발생시키며 스페인 왕국의 은 광산을 깐죽거렸어요. 스페인 왕국이 이들을 완전히 복속시키는 데는 18세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어요.


그렇기에 멕시꼬 북부(현재의 미국 서부 포함)는 스페인의 행정력이 거의 미치지 못하는 "변경(Frontier)"으로 남았는데 이는 훗날 약 19세기쯤에 미국에게 영토를 쉽게 뺏기는 이유가 되지요.






쁘란시스꼬 삐사로는 빠나마에서 잉카 문명의 황금에 대한 소문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요. 그 시절 잉카 문명은 국왕의 자리를 두고 아따알뽜vs우아쓰깔 간의 아웅다웅을 하던 것이 막 끝난 뒤였으며, 신대륙을 방문 중이던 스페인인들로 인해 천연두가 잉카 문명까지 퍼지면서 이미 왕국을 휩쓸고 지나간 상태였지요.


약 1532년쯤에, 삐사로는 아따알뽜에게 사기를 쳐서 납치하여 교수형을 내렸지요. 그러자 잉카인들은 안데스 깊은 산속으로 도망쳐 "빌까밤바"라는 걸 건설하고 "신(New) 잉카국(Neo-Inca State)"을 세우고 약 1572년쯤까지 저항 행위를 했고 뚜빡 아마루 1세가 교수형되던 시기까지 스페인 왕국은 페루 전체를 전혀 통제하지 못했어요. 물론 약 1572년쯤에, 스페인 왕국 부왕 쁘란시스꼬 데 똘레도(Francisco de Toledo)가 보낸 병졸들이 뚜빡 아마루 1세를 찾고자 빌까밤바를 먹었을 때, 이미 뚜빡 아마루 1세는 수많은 아내들과 자녀들과 함께 가족 동반으로 아마존 열대 처녀림로 도망간 뒤였지요.


하지만 성문화가 그 시절 지구상에서 가장 개방적이었던 잉카 문명답게 빌까밤바에서 숨어살았을 시절에도 성행위를 워낙 많이했는지 아따알뽜의 아내들(Coya)은 계속 임신 상태였는데 특히 "꾸시 우아르까이(Cusi Huarcay)"의 경우는 수많은 아기들을 출산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고 스페인 측에서 기록하고 있지요. 그렇기에 험난한 열대 정글 처녀림을 뚫고 가기에는 몸이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이며 뚜빡 아마루 1세는 스페인 졸병들이 오고있어서 워낙 겁이나서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들과 자녀들만 데리고 가고 아내들 가운데 1명이었던 꾸시 우아르까이는 버린 것으로 추정되요.


하지만 스페인 왕국의 다른 기록에서는 쁘란시스꼬 데 똘레도(Francisco de Toledo)가 보낸 "마르띤 가르씨아 오녜스 데 로욜라"가 데리고 온 병졸들이 빌까밤(Vilcabamba)를 먹었을 때, 뚜빡 아마루 1세는 수많은 아내들과 함께 아내인 꾸시 우아르까이와 자녀들도 같이 아마존 열대 처녀림 깊은 곳인 "마마리" 지방까지 도망쳤다는 기록도 있어요. 빌까밤바에 남몰래 숨어있었든 아니면 뚜빡과 같이 가다가 잡혔든 결국 둘 다 최종적으로는 잡혔던 건 맞는 것 같아요.

어쨌든 원주민 안내자들의 도움을 받아 끈질기게 그, 그녀들을 쫓아간 스페인 병졸들은이 가까워지자, 잉카 왕실 가족들은 생존을 위해 2개의 그룹을 떨어졌는데 국왕인 뚜빡 아마루 1세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들과 자녀들과 함께 생존 가능성이 보다 더 높은 루트로 도망갔고, 꾸시 우아르까이를 포함해 임신해서 못 움직이는 여자 그룹은 결국 숨어 있다 스페인인들에 의해 붙잡혔다는 게 가장 정설에 가까운 것 같아요.


이 과정에서 스페인인 탐험자들이 잉카 문명의 왕실 여성들을 성적으로 착취하고 번식 성노예로 만들었다는 기록들이 매우 많아요. 스페인인들이 잉카 문명의 왕비였던 꾸시 우아르까이를 끌고 가면서 성노예로 만들려 하자 그녀는 저항 행위로 자신의 똥, 오줌을 온몸에 바르는 행위를 했지만 굉장히 비위생적인 삶을 산 데다가 성욕이 왕성했던 스페인인들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결국 꾸시 우아르까이를 성노예로 만들려 했다는 기록이 바르똘로메 데 라스 까사스 신부 등의 고발장에 써있지요.


하지만 잉카 문명의 왕비였던 그녀가 온몸에 똥, 오줌을 바른 행위는 "실성해서" 했던 행동이 아니라, 성노예가 되지 않고자 여자로서 최후의 이성적이고 처절한 행위였던 것이지요. 그리고 이는 1가지 사실을 알려주는데 대항해시대부터 스페인인들과 포르투갈인들이 라틴 아메리카의 원주민 여자들을 발견하면 즉시 성노예로 만들었다다는 공공연한 사실이에요. 스페인인들이 얼마나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여자들을 성노예로 많이 만들었는지 그 결과 "메쓰띠쏘"라는 하나의 인종 자체가 탄생할 정도니까요. 게다가 이미 스페인인들은 잉카 왕비들을 보자마자 자기들의 성노예로 만들었던 수많은 사례들이 있었어요.






약 1533년쯤에, 쁘란시스꼬 삐사로(Francisco Pizarro)는 아따왈빠를 교수형을 받게해버린 뒤, 새로운 사까 잉까(Sapa Inca 국왕)를 옹립했지만 실제 권력은 스페인 탐험자들이 쥐고 있었고 약 1535년쯤에는, 쁘란씨쓰꼬 삐사로가 새로운 마을 "리마"를 건설하기 위해 꾸스꼬를 떠나자 그의 동생인 "곤살로 삐사로"가 꾸스꼬를 다스리는 책임을 맡았는데 문제는 이 곤살로 삐사로는 성욕이 매우 심했으며 황금보다 여자를 좋아할 정도로 여자와 섹스에 미쳐있던 사람이었다는 것이에요.


그렇기에 곤살로 삐사로는 잉카 문명의 왕비였던 "꾸라 오끌로(Cura Ocllo)"의 미모에 집착했고 급기야 곤살로 삐사로는 잉카 국왕에게 대놓고 아내를 자기의 성노예로 바치라고 협박까지 했어요. 결국 이에 불안함을 느낀 곤살로 삐사로는 꾸라 오끌로와 최대하게 비슷하게 생긴 하녀를 왕비처럼 분장시켜서 곤살로 삐사로에게 바쳤으나 그게 들통이 나버리는 바람에 열불이 난 곤살로 삐사로는 결국 밤마다 왕비 꾸라 오끌로의 침실에 들어가 맘껏 온갖 성적 착취를 했지요.


왕비이자 자기 아내가 곤살로 삐사로의 번식 성노예가 되자 잉카 국왕은 곤살로 삐사로에게 항의했지만 곤살로 삐사로는 미안하다고 사과하기는커녕 오히려 잉카 국왕을 줄로 묶어 그 몸에 오줌을 싸는 등 노예처럼 취급하며 온갖 수치를 줬고, 기록에 의하면 곤살로 삐사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잉카 국왕의 아내들은 물론 자매들과 가족들과 하녀들까지 모두 자기의 성노예로 만들어서 대놓고 노골적으로 밥먹듯이 성적 착취들을 했다고 해요.





결국 잉카 국왕은 곤살로 삐사로에게 황금을 찾아주겠다며 속여 꾸스꼬를 벗어나는 데 성공했지만 문젠 그는 왕비 꾸라 오끌로를 데리고 같이 도망가지는 못했다는 거에요. 꾸라 오끌로는 곤살로 삐사로의 성노예로 잡혀 꾸스꼬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에요.

약 1539년쯤 쁘란시스꼬 삐사로의 지시로 꾸라 오끌로를 알몸 그대로 기둥에 묶은 뒤 화살을 쏘아 잔인하게 죽였다고 해요. 다른 기록에서는 총으로 쏴죽였다는 기록도 있어요. 여튼 이후 그 시체를 열대 강물에 띄워 잉카 국왕에게 보냈지요.


이런 여러가지 사건들이 있었기에 꾸시 우아르까이는 꾸라 오끌로처럼 스페인인들의 성노예가 되지 않고자 잉카 왕비였던 자기의 몸을 똥, 오줌으로 바르면서 비위생적이게 만들면서까지 스페인인들의 성욕을 떨어뜨리려고 했지만 헛수고였지요. 기록에 의하면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은 전쟁할 경우에는 항상 여자 매춘부(창녀)들을 데리고 다녔는데 잉카 문명은 바다를 건너 멀리 있었기에 스페인 여자 매춘부(창녀)들을 거기까지 따라오려고 하질 않았고 결국 여자 매춘부(창녀) 없이 신대륙에서 활동해야했음으로 성욕 해소가 불가능했던 스페인인들이나 포르투갈인들은 가뜩이나 성욕이 폭발 직전이었는데 거기다가 개방적인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의 성문화와, 1년 365일 내내 습하고 무더운 열대 기후로 인해 남녀들이 죄다 알몸으로 생활하는 라틴 아메리카의 수많은 구석기 알몸 원주민들을 계속 보니까 스페인인들이나 포르투갈인들은 결국 라틴 아메리카의 알몸 원주민 여자들을 자기들의 성욕 해소를 위해 성적 착취하기 시작했다고 해요.


게다가 이후 잉카 왕비인 그녀는 꾸스꼬로 가서 남편 뚜빡 아마루 1세의 교수형을 지켜보아야 했으며, 스페인인들의 끊임없는 성적 착취를 받으며 생을 마감해야했어요.


어쨌든 이렇게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은 왕비들까지 성노예로 만들 정도니 일반 여자는 얘기할 것도 없으니 죄다 성노예 대상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나요? 이렇게만 보면 스페인인들은 잉카, 아즈텍 문명을 죄다 먹은 것처럼 보이는데 어째서 19세기까지도 라틴 아메리카를 먹질 못했을까요?







우선 잉카 문명의 안데스 산맥은 해발 4,000m가 넘는 지대에요. 스페인인들은 이곳에 올라가다가 지치는 경우가 많았지요. 결국 스페인 왕국은 잉카 문명의 행정망(까빡 냔)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고, 이 행정이 끊으면 고립되기 일쑤였지요. 이는 스페인 군대의 이동이 얼마나 제한적이었는지 보여주는 사례에요.


브라질의 포르투갈 점령도 마찬가지에요. 여기도 해안선에 갇힌 채 300년이나 흘렀지요. 약 1494년쯤에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스뻬인 왕국과 뽀르뚜갈 왕국은 라틴 아메리카를 반으로 갈랐고, 뽀르뚜갈 왕국은 약 1500년쯤에 뻬드루 알바레쓰 까브랄이 브라질을 발견했으나 처음에는 큰 가치를 두지는 않았다고 해요.


약 16세기쯤까지 뽀르뚜갈 왕국은 아마존 처녀림 깊숙이까지는 들어가지 않았어요. 해변가에 "교역소(Feitoria)"만 만들고 아마존 원주민들과 "파우 브라질(염료 나무)"을 교환할뿐이었지요. 그러다가 약 17세기쯤에 사탕수수가 인기있자 북동부 해변으로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 탄생했고 처음에는 브라질 아마존 구석기인 알몸 원주민 남녀들을 노예로 써먹기 시작하다가 곧 죽자 그 원주민 여자들을 성적 착취해서 억지로 아기를 낳게 하곤 그 아기들이 성인이 되면 또 노동력으로 동원하는 등으로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통해 임신, 출산, 번식, 노동력 착취를 반복했으나 이조차도 결국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들은 제대로 노동을 할 줄 모른다고 해서 결국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구입해오면서 브라질에 흑인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것이지요.







브라질 내륙은 지구상에서 가장 습하고 무더우며 넓은 아마존 열대 지방이었어요. 약 17~18세기쯤이 되면 수많은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죄다 번식 성노예로 만들었는데 그렇게 태어난 메쓰티쏘 가운데 몇몇이 상파울루에 모여서 "반데이란뜨"란걸 만들었어요. 그들은 죄다 엄마가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이었지만 오히려 포르투갈인이 되고자 포르투갈인보다 더 열성적으로 브라질 아마존 열대 처녀림으로 들어가서 브라질 아마존 원주민 여자들을 성노예로 만들거나 유흥업소에 파는 걸을 업으로 삼았지요. 그렇게 상파울루의 반데이란뜨의 탄생으로 포르투갈 왕국은 브라질 열대 처녀림으로 점차 들어가기 시작했지만 이는 왕국 주도가 아닌 민간 주도의 느린 확장에 불과했지요.


브라질의 열대 처녀림(마뚜끄로쑤, 꼬이아쓰 등)이 실질적으로 포르투갈 왕국의 행정력 아래 들어온 것은 약 18세기쯤 이후 금광 발견 이후에 포르투갈 왕국이 대대적으로 많은 돈을 들여서였으며, 아마존 열대 처녀림은 약 19세기 후엽인 고무 붐이 유행하기 전까지 사실상 방치되었지요.




아즈떽 문명과 잉까 문명가 무너진 뒤에도 "아라우꼬 다툼(Guerra de Arauco)"은 300년간 지속되었지요. 찔레 남부의 마뿌쩨(Mapuche) 족은 스페인군을 상대로 계속해서 전쟁하면서 완벽하게 승리했고 결국 스페인군은 항복하면서 스페인 왕국은 마뿌쩨를 최종적으로 점령하는데 "실패"했고, 결국 "비오비오 강(Río Biobío)"을 국경으로 인정하고 불가침 조약을 맺어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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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최종적으로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약 19세기에 망하고 말았어요. 약 1808년쯤에 프랑스의 나뽈레옹이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을 침입했기 때문이지요. 스페인 왕국 왕 뻬르난도 7세가 쫓겨나자 속지의 끄리오요들은 "왕이 없으니 독립하자"며 독립의 빌미를 스페인 왕국으로부터 가져갔지요.


프랑스의 나뽈레옹에게 지레 겁먹은 포르투갈 왕국의 왕실은 리스본을 버리고 브라질로 도망쳐 브라질이 일시적으로 포르투갈 왕국의 중심이 된 적도 있지요.


그러다가 19세기인 약 1810~1825년쯤에 시몬 볼리바르가 베네수엘라, 꼴롬비아, 에꽈도르를 해방시키고 뻬루로 떨어지고 남부 루트에서는 호세 데 싼 마르띤이 아르헨띠나에서 안데스 산맥을 넘어 찔레를 해방시키고 뻬루로 올라가 만나서 과야낄 회의에서 싼 마르띤이 은퇴하고 볼리바르가 뻬루의 잔여 스뻬인인들을 추방시키며 약 1824년쯤 아야꾸쬬 싸움으로 스페인 왕국은 사실상 끝장나요.


브라질의 다소 특이한 독립을 맞이하는데 포르투갈 왕국의 겁쟁이왕이 본토로 돌아가면서 아들인 뻬드로 1세에게 브라질을 다스리는 수렴청정을 맡겼는데 뻬드로 1세가 포르투갈 의회에서 돌아오라는 부탁을 거절하고 "독립을 할꼬얌~~♥"하며 갑분싸 브라질 왕국을 낳아버렸지요. 그야말로 완전히 인류사에서 찾아보기 힘든 평화로운 독립이었지요.


19세기에 독립했지만, 권력은 스페인인, 포르투갈인에서 "끄리오요(중남미에서 태어난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부유층 신분)"로 넘어갔을 뿐,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 남녀들과 빈민의 삶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지요. 이는 20세기 내내 이어지는 포퓰리즘, 독재의 이유가 되기도 해요.


게다가 속지 시절부터 이어진 "원자재 수출, 공산품 수입" 구조가 고착화되어, 독립 후에도 여전히 라틴 아메리카는 영국과 미국, 중국, 러시아의 경제적 식민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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