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나라가 필리핀에 설치한 해상 무역기지 "상관"

송나라가 필리핀에 설치한 무역기지 "상관"은 식민지인가? 무역관인가?

by 바다의 역사



우연히 어떤 미국 방송에서 흥미로운 내용을 접했는데, 바로 송나라 시대에 동남아시아에 대한 절대적인 해양 패권이 강했고 특히 필리핀에는 "상관"이라는 무역소를 설치했는데 현지 필리핀 원주민들의 강한 저항과 반대에도 불구하고 송나라의 무장 세력이 강하게 추진하여 필리핀에 그러한 해상 무역기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미국 방송에서 송나라가 필리핀 일부를 장악, 식민지화했다고 설명했다.


우선, 송나라가 필리핀에 그런 해상 무역관을 설치한 것 자체는 사실이다.


그러면 과연 이 해상 무역관이 식민지적 성격을 띄고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무역기지"였는지, 그리고 현지 필리핀 원주민들의 처절한 저항이 있었는지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1) 송나라 무장 상단(商團)의 필리핀 해안 마을 "강제 점거"와 무역소 설치의 진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무역은 양측이 합의하에 물건을 교환하는 것이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 필리핀(마이국, 비사야 등)에서 이루어진 해상 무역은 성격이 달랐다.


송나라의 무장 상단(商團)들이 이끌던 함대들은 "바다 위에 떠 있는 요새(Floating Fortress)"였다. 특히 남중국에서 동남아시아 해양 무역에 종사하던 광동성(廣東), 복건성(福建)을 위시로 한 대형 상단들 즉, 해상 조직 세력(南海商勢力)들은 단순한 상인 세력이 아니었다. 그들은 장거리 항해 특성상 자체 무장을 보유하고 있었다. 갑판병들을 보유하고 있었고, 항해 중 통행세를 받은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송나라의 무장 상단이 필리핀 해안 마을(Barangay) 앞바다에 닻을 내리는 순간, 그 영역은 사실상 송나라의 해상적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필리핀 원주민들이 저항하지 못한 것은 그들이 바보여서가 아니라, 저항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마을의 파괴 혹은 경제적 고립)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이는 사실상 평화로운 교역이라기 보단, "압도적 무력"에 의한 침묵의 점령이 가장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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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원주민들이 처음 마주한 것은 송나라의 거대한 함대가 주는 공포였다. 그렇기에 필리핀 원주민들은 저항 의지를 상실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송나라 무장 상단이 이끌던 무장 함대 즉, "무역선"의 길이는 최소 30~60m였고, 높이는 약 10m 이상의 거대한 다층 구조 형식이었다. 게다가 수백 명의 사병과 선원이 탑승했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로 "화약"과 "화약 무기"를 발명한 송나라답게, 다량의 "화약 무기(진천뢰)"와 "쇠뇌"로 무장되어 있었다.








송나라의 무장 상단이 운전한 함대가 이렇게 무장 수준이 높았던 이유는 단순히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위협하려는 용도만은 아니었다. 옛부터 동남아시아 해안가에 판을 치던 중국 해적들과 왜구들이 틈만나면 송나라의 무장 상선을 노렸기 때문이며, 당시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한 북방의 유목제국들이 세계를 지배하면서 송나라를 군사적으로 압박하던 상황이었기에 송나라는 전통적인 세계 무역의 네트워크를 북방의 유목제국들이 정복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방(중앙아시아의 몽골과 튀르크)이나 동방(동북아시아와 시베리아)과 서방(유럽과 서아시아, 중동)이 아닌, 남방(동남아시아~인도~중동 아랍과 페르시아)을 통해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할 수밖에 없던 것이고 그렇기에 다른 어떤 시대보다 송나라는 해상 무역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해상 무역 전용 관청인 "시박사(市舶司)"까지 설립했다.


이렇듯 송나라는 해상 무역과 실크로드 구축에 혈안이었다. 당나라, 명나라보다도 훨씬 더 해상 실크로드 구축에 주력했던 대제국이 송나라였다.


문제는 그렇게 송나라에 동남아시아와 인도양 바다에 주력을 하면서 누구보다 먼저, 누구보다 빠르게 해상 실크로드를 구축하게 되니까 날파리가 꼬이듯이 각종 해적 세력들이 판을 치기 시작했고 그 동남아시아에서 활동한 해적 세력들 중 가장 막강한 패권을 가진 해적 세력은 단연코 "중국 한족 해적"과 "왜구"들이었다. 마치 오늘날 대표적인 해상 무역로인 말루카 제도나 소말리아 근처에 해적들이 판을 치듯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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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기에 송나라의 무장 상단들은 자체적인 무장을 해야 했었고, 그걸로 덤벼드는 중국 해적과 왜구들을 격침시켜야 했다. 그런데 송나라가 꼭 이런 "정의로운 해전"만 했던 것은 아니다. 송나라는 자신들이 무역을 한 지역에 어느 정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는데 그 지역들 가장 약한 지역인 필리핀은 말그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송나라의 거대 함선을 처음 본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이는 파도를 가르는 거대한 "괴물" 그 자체였다. 마치 잉카 문명과 아즈텍 문명이 처음 스페인 선박들을 봤을 때의 그 공포를 필리핀 원주민들도 당시 느꼈을 것이다. 물론 필리핀 원주민들이 아주 미개하다고 해서 배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인구수도 제법 많은 데다가 대만 섬 원주민들이 동남아시아 각지로 가면서 필리핀으로도 정착했기 때문이었다. 필리핀의 비사야인 같은 원주민 해적들도 조상이 대만 섬 원주민니까 말이다. 게다가 섬 국가답게 물에서 살아가는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있어 말은 없어도 배는 필수적이었다.


그래서 필리핀의 발랑가이(Balangay)들은 길이 15m 내외의 목선까지는 만드는데 성공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일각에서는 훨씬 더 적었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하지만 이 필리핀의 배는 송나라의 무장 상단이 운용하는 함선과 정면충돌하면 박살이 날 수준이었다.


송나라의 무장 함선이 필리핀의 마을 앞바다를 가득 메우면, 현지 필리핀 원주민 추장(Datu)들은 저항하기보다는 송나라 상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자기들(필리핀 원주민들)의 생존에 유리하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면 송나라의 함선이 필리핀까지 진출해서 자기들의 땅에 제멋대로 "무역관(상관)"을 건설했음에도 별다른 저항의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즉, 송나라가 필리핀에게 행했던 무역소 설치는 "합의"가 아니라 "공포에 의한 묵인"하에 이루어진 셈이다.







2. 계절풍(Monsoon)과 계절적 거주지의 형성


송나라의 무장 상단들이 필리핀 원주민들과 잠깐 물건만 거래하고 바로 간 것은 아니다. 송나라의 함선들의 남중국해(동남아시아 바다)의 항해는 계절풍에 전적으로 의존해야 했다. 북동풍의 경우는 송나라가 추운 겨울에 출발하여 여러 동남아 국가, 지역들을 거쳐 봄에 필리핀에 도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다가 필리핀 열대 섬들(루손섬, 비사야, 민다나오섬 같은 비사야 제도)에 주둔하던 송나라의 무장 상인들은 남서풍이 부는 여름쯤이 되는 계절이 올 때 다시 출항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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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바람이 바뀔 때까지 최소 4개월에서 6개월 동안 송나라의 상인들은 필리핀에 주둔해야한다. 당연하게도 수백 명의 무장한 중국인 사병과 상인들이 함선 내에서만 살 수 없으니, 필리핀의 해안가 좋은 땅을 점거하여 울타리를 치고 창고를 지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송나라가 필리핀에 설치한 "무역소(상관)"의 실체다. 물론 이는 현지인인 필리핀 원주민들 입장에선 열강인 송나라가 막강한 해군력을 앞세워서 필리핀 원주민들의 땅을 강제 점거하고 "바람이 바뀔 때까지 너희 마을 일부를 우리가 쓰겠다"는 통보나 다름없었다. 다만 스페인, 미국, 영국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스페인, 미국, 영국은 필리핀 원주민들에게 숙청을 동반하여 필리핀 여러 섬들을 점거했다는 점이고 송나라는 자신들의 해상 무역에 필요하다는 이유만으로 필리핀의 일부 섬에 강제로 무역소를 설치하였으나, 필리핀 원주민들을 대거 학살하지는 않았다는 차이점만 있을 뿐이다.


게다가 송나라의 무장 상인들은 필리핀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Estuary)나, 배를 대기 좋은 만(Bay)의 가장 노른자위 땅을 요구했고 그곳을 실제 "송나라의 상관(무역소)"으로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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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가 건설한 무역소(상관)는 단순한 무장 사병과 상인 합숙소 및 거래소가 아니었다. 필리핀 현지에서 구한 나무 울타리를 높게 치고, 망루를 높이 세우고, 사병들이 24시간 경계를 섰을 정도다. 즉, 그곳은 필리핀 섬 안에 "치외법권 구역"이자 "해군 기지"이자 "무역기지"가 생긴 셈이다.


3) 무역소의 성격(치외법권, 해군기지화)


게다가 이런 무역소(상관)가 필리핀에 설치되면 그 주변 해안가는 송나라 상단의 통제하에 들어간다. 현지 필리핀 어부들이나 다른 섬의 상인들이 접근하면 송나라 상단의 사병들이 검문하거나 쫓아낸 적도 있었냈다. 필리핀 땅임에도 불구하고, 송나라 무역소가 설치된 구역은 송나라의 법과 질서가 통하는 "일종의 작은 식민지"가 되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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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그렇다고 이게 "진짜 식민지"라는 개념은 아니다. 이 바람이 바뀔 때까지 4~6개월간 이 필리핀에 주둔해야 했기에, 해안가 요지에 임시 거주지와 창고를 건설했던 것이고, 이 과정에서 원주민의 동의를 구했는지, 무력으로 점거했는지는 지역에 따라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즉, 순순히 협력하면 무력 점거가 필요없었겠지만 저항이 다소 있거나 거절할 경우에는 무력 점거도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영구적인 식민 도시 건설이라기보다는, 계절적 필요에 의한 "무장 거류지(Enclave)"의 성격이 강하긴 하다. 그렇기에 정확한 명칭은 "식민지"라기 보다는 무장 거류지라고 봐야한다.


4) 그렇다면 왜 필리핀 원주민들은 송나라인들을 내쫓거나 저항하지 못했나?


당시 필리핀은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미개"하던 지역이었다. 중세시대인 당시까지도 필리핀은 혼자 기원전의 청동기 시대를 살고 있었다. 청동 무기까지는 발전했으나, 그 이후인 "철" 생산은 꿈도 꾸지 못했다. 자체적인 철 생산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농사를 짓기 위한 괭이, 금속 도구가 송나라 상인들의 손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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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동남아시아에서도 가장 벼농사가 잘 되는 필리핀 열대 섬은 필리핀 원주민이 만든 가장 유명한 쌀 테라스인 "바나우에 라이쓰 떼라쓰(Banaue Rice Terraces)"와 "삘리삔 꼬르디예라 산맥의 계단식 논(Rice Terraces of the Philippine Cordilleras)이 있는데 이는 필리핀의 열대 루손섬의 이뿌가오(Ifugao)주에 있는 계단식 논으로 "그나마" 미개하던 필리핀에서 덜 미개하던 "이뿌가오(Ifugao) 원주민"들이 맨손과 기본적인 도구만으로 산비탈을 깎아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공간이다.


송나라의 전략은 "우리에게 협조하고 필리핀 땅을 내어주고 저항하지 않는다면, 너희 부족에게만 우수한 철기와 철 생산 기술, 도자기를 판매하겠다. 만약 저항하면? 너희 적대 부족에게 무기를 팔아 너희를 죽이겠겠다." 이런식으로 딜을 걸었던 것이다. 물론 대놓고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당시 필리핀 원주민 사회에게 행했던 송나라 무장 상단의 행동을 보면 딱 이런 개념이었다.


필리핀은 고대시대부터 그 시기까지도 하나의 통일된 왕국이나 중앙집권적인 정치 체제가 들어선 적이 없었고 수많은 바랑가이(Barangay)라는 요즘으로 따지면 마을 촌장, 마을 이장 같은 사람들로 쪼개져 서로 합치질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송나라의 상인들은 그 점을 파악하여 필리핀 내에서도 특정 유력 추장(Datu)과 결탁했던 것이다.


5) 송나라 무장 상인의 "갑질"로 기록된 조여괄의 제번지


군사적 식민지는 아니었으나, 경제적 종속은 분명 존재했다.


앞서 송나라가 일부 필리핀의 유력 사회에 철기, 철 생산 기술, 도자기를 매우 비싸게 판매한 것은 사실이지만, 송나라가 보유하고 있던 "강철 생산 기술"이나 "강철검 생산 기술" 그리고 "강철검" 그 자체는 필리핀에게 절대로 판매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았다. 중국은 이미 고대시대때 중국 한나라 때부터 강철과 강철검 생산 기술을 완성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이 강철검과 강철 제작 기술만큼은 아무리 비싼 돈을 받고서라도 절대로 판매하거나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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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일단 필리핀에 송나라의 무역소인 "상관"이 설치되고 나면, 중무장한 송나라 상인들의 태도는 더욱 오만해졌다. 마치 만화 원피스의 "천룡인" 계급처럼 말이다. 남송(南宋, 1127~1279) 시대에 활동한 시박사(해상 무역 관리)이자 위대한 탐험가, 관료, 역사학자였던 조여괄(趙汝适, 1170~1231)이 동남아시아와 인도, 아프리카, 중동의 아랍과 페르시아 등등등에 대해 죄다 기록한 "세계 지리지"라 할 수 있는 "제번지(諸蕃志)"에 따르면 송나라 무장 상단들이 필리핀에게 했던 갑질적 행동 양식은 다음과 같다.


송나라 무장 상인들은 현지인들(필리핀 원주민들)에게 상품을 먼저 보여주거나 주고, 빚을 지게한 후에 나중에 필리핀에서만 있는 특산물(진주, 향료 등)로 갚게 하는 방식을 썼다.


여기서 문제(함정)는 송나라 상인들은 먼저 도자기나 비단 값을 알려주지 않고 보여주거나 준 후에는, 그 값을 받을 때는 터무니없이 높게 책정했다는 점이다.


6) 조공 체제를 통한 강압적 편입


특히 필리핀은 송나라의 해상 영향력 하에 강제 편입되기도 했다. 물론 972년, 982년에는 필리핀 민도로 섬으로 추정되는 "마이국(麻逸)"이란 곳에서 송나라에 조공을 바쳤다는 기록은 송나라 황제의 군사적, 외교적, 해상적 권위를 높이는 데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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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황제나 황족, 조정은 필리핀을 "덕화(德化)에 감화되어 스스로 송나라의 영향력에 편입된 미개인"로 기록했습니다. 이는 필리핀을 "스스로 복종을 자처하는 하위 번국(藩國)"으로 공인하고, 그들의 통치권을 인정하되 송나라 해상 질서 아래 강제로 편입시킨 것이다. 이는 독립적인 국가가 아닌 송나라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무역 구역, 경제 구역"으로 간주했음을 의미한다.


다만 이를 두고 “송나라가 필리핀을 식민지화했다”라기 보단, 송나라의 해상 경제 패권의 영향력 하에 필리핀이 편입됐다, 거나 송나라의 해상 무역기지가 필리핀의 일부 섬을 점거했다. 고 봐야할 것이다.



7) 곤륜노(崑崙奴)


고대 중국 당제국 시대부터 이어져 온 "곤륜노(崑崙奴)" 무역은 송나라 때도 완전히 근절되지 않았다. 세계 역사학계는 처음에 이 곤륜노에 대한 기록에서 검은 피부와 곱슬머리 때문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당나라에도 있을 것으로 강력하게 보고 있었다.


특히 혜림(慧琳)의 "일체경음의(一切經音義)"에 따르면 당제국(당나라)의 승려 혜림이 기술한 불교 어휘 사전인 "일체경음의"에는 곤륜노의 외모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가 등장하는데 "그들은 뼈가 드러나고 검기가 옻칠(漆)을 한 것 같다... 머리카락은 곱슬이고(髮卷) 사나우며 추하게 생겼다."라고 권 81에 써있다. 여기서 "발권(髮卷)"이라는 표현은 머리카락이 말려있다, 즉 곱슬머리임을 명시하는 직접적인 기록이다. 이뿐만이 아니다.


당제국의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의 남쪽 이민족들을 다룬 남만전(南蠻傳) 권 197에는 곤륜과 관련된 지역(임읍 등) 사람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사람들은 깊은 눈에 높은 코를 가졌으며, 머리카락은 곱슬이고(髮拳) 몸은 검다(黑身)." (※ 여기서 임읍(林邑)은 현재 베트남 중남부 참파 왕국 지역을 말하며, 당시 곤륜의 범주에 포함되거나 혼용되기도 했다.)


이 역시 "발권(髮拳)"이란 표현이 등장하는데 이 발권은 앞서 말했듯 주먹처럼 말린 머리, 즉 강한 곱슬머리를 의미한다. 검은 피부의 곱슬머리.. 완전히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이 아닌가? 애초에 당제국(당나라) 자체가 당시의 세계 패권국이었고, 국제적인 대제국이었기에 당제국 내에 수많은 중동 아랍인과 서아시아의 페르시아인들이 있었기에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있어도 이상할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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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에 대한 주장은 곧바로 반론이 제기됐으니 바로 곤륜노가 아프리카 흑인 노예가 아니라 필리핀인 같은 동남아시아의 검정색 피부의 인종 노예들이라는 점이다. 남만전(南蠻傳)에 기록된 것이 그 대표적인 예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또 반론이 제기됐는데 당시 남만(南蠻)은 동남아시아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인도나 아프리카 같은 중국의 남쪽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 결과 현재는 중동과 서아시아의 페르시아 상인들과 아랍 상인들을 통해 당나라(당제국)로 유입된 아프리카 출신 흑인 노예들은 물론, 동남아시아의 필리핀 인종 노예들까지 죄다 포함하는 노예가 "곤륜노"라는 것으로 현재 정설로 결론이 내려졌다.


즉, 아프리카 흑인 노예도 포함되어있지만 "곤륜(崑崙)"은 초기에는 동남아시아의 특정 지역(주로 말레이반도와 그 주변 섬 지역들)을 가리키는 지명으로도 사용되었으며, "노(奴)"는 노예나 하인을 뜻하기에 조선시대 시인 신광하(申光夏, 1729-1796)의 시에도 동남아시아 유색 노동자들도 곤륜노로 표현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이다.


당시 당제국(당나라)~송나라의 유력한 귀족, 유력자 군인과 장군들, 부유한 상인들의 저택에서 아프리카 흑인 노예와 필리핀 인종 노예들인 "곤륜노"들은 하인, 머슴, 경호원, 악사(樂士), 무용수 등으로 일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명나라가 "해금정책"을 펼치면서 이 곤륜노의 맥이 완전히 끊긴 것이다.








다만, 송나라의 무장 상인들이 필리핀 외곽 섬들까지 탐험하며 인적이 드문 필리핀 섬에 기습 상륙하여 원주민들을 납치한 후, 이들을 노예로 만들어 중국 광저우나 천주(泉州)의 귀족들에게 팔아넘겼는지 아니면 송나라의 중국 한족 해적들이나 왜구들이 필리핀을 약탈하여 필리핀 원주민들이나 비사야인 원주민들을 곤륜노(노예)로 만들어 송나라에 팔았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경로로 필리핀인, 비사야인 원주민들을 송나라에 노예로 팔았는지는 조금 더 연구가 진행되어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송나라에 필리핀인이나 비사야인 원주민 노예들이 있던 것은 확실해 보이나 송나라까지 팔려온 경로는 아직 더 연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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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225년, 송나라 시박사(해상 무역 관리)였던 조여괄이 쓴 "제번지"의 기록들


이 조여괄의 기록 "제번지"에는 필리핀 섬들의 위치, 항로, 해류, 기후를 상세히 기록했으며, "상선이 다니는 길"까지 명시했고 군사 및 무장 상단이 안전하게 필리핀을 침투하고 활동하기 위한 작전 지도와 같다.


또, 조여괄은 필리핀 원주민이나 비사야 원주민들을 "산과 계곡에 흩어져 살며", "천으로 몸을 가릴 뿐 알몸(나체) 생활을 한다"라고 묘사했으며, 그들은 열대 지방에 사는지 문신 풍속을 하고 있기에 조여괄은 그들(필리핀 원주민들)이 옷도 없이 벌거벗고 알몸 생활하면서 문신을 새기는 것을 기이하게 여겼다. 필리핀 원주민들을 "문명 이전 단계의 미개인(野人)"으로 격하하여, 송나라의 우월한 문화가 이들을 "계몽"이 되지 않은 미개인들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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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그렇다면 송나라의 필리핀 식민지배인가? 아니면 단순한 해상 무역기지 설치인가?


송나라가 필리핀에 "상관(무역소)"을 설치하고 무장 함대를 주둔시킨 것은 사실이나, 이를 근대적 의미의 "식민지"로 규정하는 것은 아직 무리가 있다.

우선, 송나라의 무장 함대가 필리핀에 주둔한 것까지는 사실이나, 송나라 관료가 파견되어 필리핀을 통치하거나 세금을 걷은 기록은 아직 찾지 못했다.

게다가 이는 송나라의 군사 원정이 아닌, 송나라의 광동성과 복건성(푸젠성)과 무장한 민간 상단(호족 세력)의 활동에 가까웠다는 점도 있다.

그렇기에 이 송나라의 필리핀 진출은 "무력과 자본(철, 도자기)을 앞세운 압도적인 해상 경제 패권(Maritime Economic Hegemony)의 확립"이라고 정의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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