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마이야 왕조가 스페인, 포르투갈이 살고 있던 711년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하여 "알 안달루스"를 세우며 스페인, 포르투갈을 800년간 식민 지배한다. 물론 정확히 말하면 "후우마이야 왕조"다. 원래 우마이야 왕조는 아바스 제국이 멸망시킨 뒤, 아바스 제국이 중동의 패권을 잡았기 때문에 이 스페인 지역은 멸망한 우마이야 왕조의 후손들이 아바스 제국의 침입으로부터 도망쳐 세운 "후우마이야 왕조"가 800년간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식민 지배(711~1492)했던 것이다.
1492년 사실상 독립 운동인 국토회복운동(레꽁끼스따)이 성공하면서 이베리아 반도 내 스페인을 오랫동안 식민 지배하던 마지막 이슬람 왕국인 그라나다를 쫓아내는데 성공했다. 스페인 왕국은 자기들을 800년간 식민 수탈한 것에 관해 앙갚음으로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모리스코)들도 1609년 대규모로 추방했다. 그리하야 북아프리카로 쫓겨난 이들은 스페인을 다시 털어먹고자 해적 활동의 길잡이가 되었다. 게다가 대항해시대로 스페인의 경제력은 좋아졌기에 이들에게 싱싱한 먹잇감이었던 스페인을 먹고자 더 열심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스페인에 오랫동안 살아서인지 스페인 해변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어 해적들이 내륙 깊숙이 들어와 스페인인 납치를 자행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16세기 초, 스페인 왕국이 북아프리카 해안 거점(오랑 등)을 탈환하자 위기감을 느낀 북아프리카 토착 세력은 오스만 돌궐에 구원을 요청했다. 이에 오스만 돌궐족의 전설적인 수군 장수 "하이르 앗 딘 바르바로사"가 알제리를 접수하면서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돌궐의 수군 기지이자 대서양, 지중해 노략질의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들은 단순한 수적 떼가 아니라, 나라(오스만 돌궐조 및 북아프리카 토후국)의 허가를 받고 적국(기독교 왕국)을 공격하여 수익을 나누는 일본 왜구 같은 "사략선"의 성격을 띠었다. 해적들은 물 위에서의 나포뿐만 아니라, 스페인 발렌시아, 안달루시아, 포르투갈 알가르브 해변가 마을을 급습 상륙하여 야밤중에 몰래 마을들을 포위하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아무나 납치했다.
그렇게 북아프리카로 끌려간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백인 노예들은 총 4가지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1번째는 조선시대로 치면 격꾼과도 같은 노젓는 노예였다. 이는 가장 비참한 운명으로, 해적선의 노를 젓는 데 투입되었다. 죽을 때까지 배 밑창에서 채찍을 맞으며 노를 저어야 했다.
2번째는 공공 노예로 주로 항만 건설이나 채석장 등 중노동에 투입되었다.
3번째는 단순히 몸값 요구를 하려고 데려온 노예인데 이는 노예 가운데서도 그나마 나은 편(?)이었다. 이 노예들은 바르바리 해적들이 대놓고 부유한 귀족이나 성직자들을 노려서 납치하여 그들을 몸값을 받고 풀어주기 위해 감금한 경우였다. 즉, 곧 이야기할 거의다 가난한 거지나 노숙자, 채불자, 불법자, 신용불량자였던 쿨리와는 달리 스페인인과 포르투갈인 노예들은 작위를 하사받은 귀족층이나 고위층 성직자들도 꽤나 많이 납치되어 노예로 끌려왔다.
마지막 4번째로 기생, 처, 첩들인데 이는 주로 젊은 여성들이나 얼굴이 이쁘장하게 생긴 기생 오래비 같은 소년들이 해당되었는데 이들은 오스만 제국의 하렘이나 고위층의 기생이나 첩으로 팔려갔다.
이렇게 스페인 남부 해안과 포르투갈 해안 마을들은 16세기~19세기 초까지 바르바리 해적의 지속적인 노략질 대상이었다. 북아프리카 해적들은 밤마다 해안가 마을을 급습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스페인인들과 포르투갈인 백인들을 납치하여 노예로 팔아넘겼다. 몸값을 받고 풀어주거나(인질극), 몸값을 낼 능력이 없는 자들은 오스만 돌궐이나 북아프리카의 노예 시장에 팔아넘겼는데, 이렇게 팔린 사람들 중엔 중국이나 러시아, 인도나 일본으로까지 끌려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의 역사학자인 로버트 데이비스(Robert Davis)의 연구(책 Christian Slaves, Muslim Masters (2003))에 의하면, 이렇게 1530~ 1780년까지 북아프리카 무어인들에게 납치되어 노예가 됐던 스페인인 백인 노예들과 포르투갈인 백인 노예들은 기록된 숫자만 최소 약 100만~125만명에 달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수치라고 추산된다. 물론 생각보다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선들의 노략질 범위가 꽤나 광범위해서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외에도 영국, 프랑스 왕국, 남유럽인 이탈리아, 심지어 미국까지 가서 그곳 백인들을 납치해 노예로 만들었다.
물론 이 중 대다수는 스페인인, 포르투갈인, 이탈리아인 노예들이었지만 말이다. 17세기 초 알제(Algiers) 인구의 약 20%가 이런 스페인인 노예였다는 기록도 있다. 조선이 일본 왜구로 골머리를 앓듯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근대 시기인 19세기까지도 이런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에 의해 골머리를 앓았으며 오죽하면 스페인의 남동부 해안은 해적의 공포 때문에 모두 도망쳐서 사람이 살지 않는 공간으로 변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은 이렇게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에게 끊임없이 납치되었고 노략질당했으며 항상 속수무책으로 당해야만 했고 그것도 19세기 근대 시기까지 이어졌으며 무려 125만명이나 노예로 납치되어 끌려갔을까? 스페인, 포르투갈이 북아프리카보다 해군력이 약해서였을까? 이에 관해서는 꽤나 복잡한 이야기가 있다.
우선 북아프리카 수적 토벌은 막대한 돈이 들지만 경제적 이득은 적은 "소모전"이었다. 스페인 왕실은 제한된 해군력을 해적 토벌보다 황금과 은이 쏟아지는 아메리카 호송 선단 보호나 네덜란드 전선에 투입하는 것을 우선시했다.
게다가 스페인 왕국과 이탈리아, 포르투갈 왕국의 해안선은 너무 길어 모든 마을을 방어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는 고려의 한반도와도 매우 비슷한 상황인데 고려 말~ 조선 초의 정규 국가 규모의 해군 수준의 대함대를 조직해 수백~ 수천 척의 대함대로 수만명~수십만명의 병력들로 500~1000번이 넘게 한반도를 공격한 것도 이런 해안선의 길이 때문이었다. 왜구들처럼 이 바르바리 해적들도 "치고 빠지기" 전술을 썼기에 정규군이 도착하면 이미 사라진 뒤였다. 이 역시도 고려 말기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지중해의 주선 "갤리선"은 기술적 한계로 원거리 항해와 겨울철 작전이 어려웠는데 반면 대서양 쪽의 모로코(살레)의 수적들은 범선 조종술을 익혀 더 빠르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게다가 바르바리 수적은 단순한 범죄 조직이 아니라, 고려~조선시대의 일본 왜구들처럼 알제리, 튀니지라는 "준국가"의 정규 수군력이었다. 알제리는 천혜의 요새였기에 스페인 왕국도 까를 5세 시절 알제 토벌(1541)을 시도했으나 카미카제처럼 태풍과 방어군에 의해 실패한 충격이 있었다.
가장 충격적인 사실 중 하나는 같은 기독교 왕국인 프랑스 왕국이 스페인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돌궐조 및 바르바리 수적과 동맹을 맺었다는 점이다. 프랑스 왕국은 뚤롱 항구를 오스만 돌궐 수적에게 겨울 기지로 빌려주기도 했었다. 이로 인해 스페인 왕국은 지중해 내에서 외교적, 안보적으로 얻어맞는 형국이었다.
일이 이렇게 되어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이라는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자, 종교 단체가 나섰다. 가장 대표적인건 "삼위일체 수도회(Trinitarians)"와 "메르세다리오 수도회(Mercedarians)"였는데 이들은 기부금을 모아 북아프리카로 가서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들을 사 왔다. "돈키호테"를 쓴 작가로도 유명한 "미겔 데 세르반테스"도 북아프리카인들에게 납치되어 알제리에 팔려 5년간 노예가 되어 가혹한 생활을 하다가 삼위일체 수도회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풀려났다.
이렇게 일본 왜구처럼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던 수적의 시대는 영국과 미국의 근대화가 확립되면서 끝났다. 이런 북아프리카의 해적들에게 가장 처음 저항한건 미국이었는데, 원래 미국은 "해군"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가 모로코의 해적들에게 계속 자국민들이 납치되어 노예 끌려가자 결국 해군을 창설하여 1801~1805년 바르바리 전쟁으로 노예들을 구출했다. 이 전쟁은 신생국이자 당시로서는 약소국에 불과하던 미국이 노예로 잡혀가는걸 막고 상선들을 보호하고자 배를 파견하여 트리폴리를 토벌했던 사건이었다.
또 근대 시기가 계속되면서 증기선의 탄생과 화기의 발달로 수적선은 더 이상 유럽 해군을 당해낼 수 없게 됐다. 그리고 1830년 해적의 피해로 끊임없이 골머리를 앓았던 프랑스는 수적 행위를 영구히 근절하겠다는 명분으로 프랑스가 알제리를 토벌하였다. 이미 근대화를 해버린 프랑스를 당해낼 수 없던 알제리는 결국 투항했고 이 해적 소굴이 사라지면서 이를 기점으로 북아프리카의 해적 활동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물론 일본 왜구,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단, 바이킹 해적들이 사라진 지금은 남아프리카 소말리아 해적들이나 동남아시아의 말라카 해적들이 판을 치지만 말이다..
서유럽과 남유럽들이 북아프리카의 바르바리 해적단들에게 골머리를 앓았다면, 동유럽과 중부유럽은 몽골계 크림 칸국(Crimean Khanate)이 보낸 기병 군단들에게 끊임없이 납치당해 오스만 제국에 전쟁 포로로 끌려갔다.
크림 칸국은 전 세계에 걸친 식민지를 가지고 있던 세계 최강국 대몽골제국이 분열하면서 등장한 킵차크 칸국의 후예로, 크림반도에 위치하며 오스만 제국의 동맹국으로서 동유럽 슬라브족을 사냥했던 육상의 노예 무역국으로서 강력했던 대제국이었다.
몽골계 크림 칸국 기병대가 백인 노예들을 끌고 가는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특히 동유럽과 중부유럽(현재의 우크라이나, 러시아 남부, 폴란드 등등등)이 몽골계 크림 칸국(Crimean Khanate)군의 주요 먹잇감이었는데 아까도 말했듯 이들은 농사를 짓거나 생산 활동을 하기보다, 동유럽과 중부유럽(슬라브족, 우크라이나, 러시아, 폴란드 지역)을 침략하여 백인들을 납치하는 것을 주요 국가 산업으로 삼았기에 경제는 약탈과 노예 무역에 전적으로 의존했기에 이를 "초원의 수확(Harvest of the Steppe)"이라고 불렀다.
몽골계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대는 매년 봄과 여름, 동유럽과 중부유럽의 슬라브족 거주지(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모스크바 대공국)들을 침공하여 도시들과 성, 요새들을 파괴하고 유럽 백인들을 "가축처럼" 끌고 갔다.
특히 크림반도의 카파는 거대한 노예 시장이었다. 이곳에서 크림 칸국군이 끌고 와 선별된 백인 노예들은 배에 실려 몽골계 크림 칸국의 영원한 동맹국인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로 보내졌다.
역사학자들의 추산에 따르면, 1500년에서 1700년 사이 몽골계 크림 칸국군이 침략해 끌고 간 슬라브계(동유럽) 백인 노예들의 수는 자그마치 최소 20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는 바르바리 해적의 납치 규모를 상회하는 수치다. (출처: Mikhail Kizilov, "Slaves, Money Lenders, and Prisoner Guards")
이렇게 영원무적할 것 같은 몽골계 크림 칸국의 백인 노예 사냥도 역시 근대 시기에 접어들면서 막을 내렸는데, 동유럽에서는 그동안 몽골계 크림 칸국에게 계속 침공당했던 러시아 제국이 표트르 대제를 기점으로 근대화에 성공하면서 점점 성장하여 결국 1783년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해 "대튀르크 전쟁"에서 몽골계 크림 칸국군과 오스만 제국군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크림 칸국을 합병함으로써 몽골계 크림 칸국이 보낸 타타르 군단의 백인 노예 사냥을 종식시켰다.
인류학적으로 대제국이 쇠퇴하거나 붕괴하는 시점에는 필연적으로 치안 공백과 경제적 파탄이 뒤따른다. 역사적으로 고대 이집트나 로마제국이나 비잔티움 왕조가 그러했으며, 스페인이나 포르투갈도 마찬가지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민중이며, 이들은 종종 "계약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외국으로 이주해야 했다.
청나라는 17세기~18세기(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시대)까지 전성기를 누리며 중앙아시아 전역을 정복하고 동남아시아의 베트남을 식민화하고, 티베트와 대만 섬을 정복하여 식민지로 삼았으며, 네팔이나 서남아시아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티베트와 위구르의 식민지 비극들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 청제국은 영국과 패권 경쟁을 하던 러시아 제국과의 국경 분쟁(네르친스크 조약 등)에서도 군사적으로 대등하거나 우위를 점하며 제국주의적 영토를 확장했던 강력한 제국이었다.
하지만 전성기의 마지막 종점이었던 건륭제 시대의 군인인 "화신(和珅)"이 화근이엇다. 그는 철저한 군인으로, 18세기 말 건륭제 시대의 막강한 군인이기도 했다. 물론 건륭제 시대부터 서서히 군부독재화되어 가던 그는 건륭제 사후부터 본격적으로 청나라 국고를 탕진시키고 관료 사회를 썩게 만든 시발점이 되었다. 여기서 엎친데 덮친격으로 청제국의 전쟁광이자 전쟁기계였던 건륭제는 마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슐레이만 대제나 무굴제국의 아우랑제브 칸 대제처럼 평생을 정복전쟁에만 인생을 바쳤던 그야말로 정복에 미쳐있던 황제였는데 그 탓에 그 자금력이 막강하던 청나라도 건륭제가 너무 심하게 정복전쟁을 해대느라 군사비가 진짜 어마어마하게 투입되느라 건륭제 사후에는 청나라 경제력이 파산 직전까지 갈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 화신이라는 군인 출신의 독재자까지 등장해서 청나라 국고를 탕진시키게 되자 청나라는 그야말로 이중고를 겪으며 몰락의 길로 달려가다가 나중에는 여기서1900년대의 서태후의 보수적 정치까지 추가되면서 그야말로 청제국은 오스만 제국과 똑같은 길을 걷게된다. 근대화(양무운동, 변법자강운동)의 실패, 특히 이는 의화단 운동 이후 20세기인 1911년 신해혁명 청나라를 지배하던 군인 지배층인 만주족은 제국 전역에서는 군벌들의 난립이 너무 심해지면서 군벌들의 전쟁시대, 제국 전역의 마적단들의 내전, 반청복명(反淸復明) 같은 명나라 부흥운동의 대규모 반란을 외치는 비밀결사단들(삼합회 등)이 활동하며 치안은 붕괴되는 등 이 모든 것들이 한 번에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그야말로 청나라는 황제와 50만명의 만주족 군인 지배층들로서는 통제 불능의 사회인 대제국으로 치달았다.
19세기 중반~ 20세기 초, 이렇게 청나라의 만주족 군인 지배층들이 제국 전역의 명나라 부흥운동 반란군들이나 마적단들을 진압하느라 제국 전역에 주둔시킨 청나라군 병력들을 집결시키는 바람에 잠시 행정력의 공백이 발생하였고 이렇게 대규모 반란군들을 진압하느라 다른 곳에 시선을 둘 여유가 없는 틈을 타, 최남단의 섬이나 다름 없는 마카오나 홍콩에서는 중국인 브로커(객두)들 돈을 벌기 위해 활개를 치기 시작했다.
당시 근대 시기에 마카오와 홍콩에는 "관관"이라 불리는 수용소가 있었는데, 이곳을 운영하고 사람을 모집하는 실무자는 대부분 중국인 폭력단원들이었다.
그 중국인 모집책들은 시골에서 혼자 살거나 가난하여 차별을 받는 거지나 노숙자들에게 "미국에 가면 금을 캘 수 있다", "큰돈을 벌게 해주겠다"라고 사기를 쳤다. 혹은 일확천금을 노리고 도박판에 들어갔다가 결국 돈을 다 빚진 채불자나 신용불량자에게 만일 신체를 담보로 계약서에 지장을 찍지 않으면 관아에 고발, 신고한다고 하고 찍게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아주 극소수로 드물지만 이 중국인 모집책(브로커)들은 길가에 밤에 인적이 드문 장소에서 자고 있는 노숙자를 몽둥이로 때려 기절시킨 뒤 납치하여 배에 실어버리는 경우도 아주 드물게 간혹있었다. 이를 당시 은어로 "돼지 새끼를 판다"라고 불렀다.
이는 마치 21세기 현대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캄보디아 범죄 조직의 양상"과 매우 흡사하다. 중국인 범죄조직인 첸즈아 보스로 있는 캄보디아 범죄 조직은 캄보디아에 있는 중국인 범죄 조직이지만 초반엔 중국인을 대상으로 했었다는 점에서 말이다.(물론 현재는 중국인이 아닌 미국인, 호주인, 라틴 아메리카인 같은 저멀리 고립된 제3국들을 주로 대상으로 하지만 말이다.)
그 중국인 갱단들에게 자금줄을 대주는 뒷돈은 바로 일본 상인들과 영국 상인들이었는데 그들은 배와 자본을 댔지만, 실제로 현장(마카오와 홍콩) 동족을 속이고, 납치하고, 감금하여 배까지 끌고 간 것은 철저하게 같은 중국인 범죄 조직들이었다. 이는 아무래도 영국 상인들이나 서구 상인들이 마카오나 홍콩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너무 눈에 띄어서 순찰하던 중국 관군들에게 체포당하여 감옥으로 끌려갈 위험성이 강했기 때문에 영국 상인들이나 서구 상인들은 대놓고 마카오나 홍콩에서 그런 짓을 하진 못했고 중국 현지 폭력단원에게 거액의 돈을 지급하여 그런 일을 대신 하게끔 했던 것이다. 이는 근대시대에 제국 전역이 내전과 반란으로 휩싸인 극도의 대혼란기 때 "돈"의 탐욕에 결국 눈까지 멀어 노숙자이긴 하지만 동포를 팔아넘겨 돈을 벌었던 흑역사라고도 볼 수 있다.
어쨌든 그렇게 같은 중국인에게 사기를 당하거나 납치당해 아메리카로 끌려가게된 쿨리들은 "지옥선"이라 불리는 배에 짐짝처럼 실려 태평양을 건넜으며, 항해 중 사망률은 때로 최소 15~45%에 달했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주로 미국 캘리포니아, 쿠바, 페루 등이었으며 그들은 황금을 캐는 부자가 아니라, 철도 건설(미국 대륙횡단철도), 구아노 채취(페루), 사탕수수 농장(쿠바)에서 일을 해야했떤 노동자가 되야했다. 물론 그들은 노예는 아니었기 때문에 계약 기간이 만료되거나 계약을 파기하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이미 그곳에 오게된 사람들은 99% 이상이 거지나 노숙자인 데다가 몇몇은 도박장에서 돈을 잃고 빚진 자들이었다. 즉, 이곳에 오기 전부터 이미 전재산을 잃은 신용불량자나 체불자이거나 본래 집이란 게 없는 거지나 노숙자였던 자들이기에 노동을 그만둬도 딱히 갈 데가 없었다. 게다가 노동을 하면 소량이지만 돈은 받았기 때문에 이를 악물고 그렇게 돈을 모으는 쿨리들도 있었떤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로지 "반드시 돈을 모아야 한다"거나 "빚을 갚아야 한다"거나는 일념 하나로 가혹한 노동을 견뎠으며, 이는 21세기 차이나타운 형성의 기반이 되었다.
1860년대에 이르러서야 청나라 정부는 대규모 반란을 어느 정도 제압하면서 숨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고 제국 전역을 어느 정도 돌아보자 쿨리 무역의 존재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청나라 정부는 마카오 관군들에게 마카오에서 같은 중국인들에게 사기를 치거나 납치했던 중국인 범죄자들을 모조리 소탕하라고 명령을 내리면서 줄어들게 되었고 거기서 더 나아가 조사단을 쿠바, 페루에 파견시켜 그곳에 주둔시키면서 끊임없이 쿠바, 페루를 감시하여 그곳으로 쿨리들이 들어오는 걸 엄격하게 금지시켰다.
이를 통해 공식적으로 1874년 청나라 정부의 명령으로 인해 마카오 관군들이 움직이자 그곳 쿨리 무역이 공식적으로는 금지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수십만 명의 쿨리가 중국인 범죄자들에 의해 해외로 이주하게된 뒤였다. 게다가 곧이어 중화민국이 건설되고(1912), 군벌들의 시대의 도래, 1차~2차 세계대전, 중일전쟁, 국공내전이 연달아 터지면서 중국 정부(북양정부 및 국민정부)는 해외에 있는 쿨리들의 처우 개선 따위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어차피 그들은 중국 대륙에서도 필요가 없던 거지, 노숙자, 불법자, 신용불량자, 체불자들이었기에 중국 정부는 그런 필요도 없는 존재들에게 신경쓰기 싫어서 버려버린 것이다.
쿨리 무역에서는 "같은 중국인이 중국인을 속이거나 납치하는" 내부의 배신이 결정적이었다면, 바르바리 무역과 크림 칸국의 노예 무역에서는 "종교와 인종이 다른 외부 세력(무어인과 몽골 타타르 튀르크인)"에 의한 체계적인 약탈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피해자가 겪은 고통과 가족과의 생이별, 그리고 비참한 최후는 동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