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로 인해 일제 치하로 떨어진 조선의 전라북도 완주군 삼례면 삼례리에서 1919년에 어떤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양칠성(梁七星)"으로 그는 당시의 엄혹한 시대상에 따라 창씨개명을 통해 일본풍 이름인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는 1942년에 입대하여 태평양 전쟁에 투입되어 패망 때까지 인도네시아 자바 섬에 배속된다. 그가 자원입대했는지, 강제로 끌려왔는 지는 불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일본군에 자원입대하는 조선인 청년들이 매우 많았다. 과거에 과거제도를 통해 무관이 되어 군인이 되거나 문관이 되는 것이 유일한 출세길이었던 것처럼, 당시 조선인 청년들에게 있어서 빠르게 출세하는 길이라면 일본 육군에 입대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양칠성은 56.1 대 1이라는 경쟁률을 뚫고 입대한 경우라는데, 이는 일제강점기 치하의 극심한 차별을 면하기 위함이라는 설이 있는데 이는 확실하지 않다. 어찌됐건 현재까지로서는 그가 자원입대한 것인지 강제로 끌려온 것인지를 완전히 알 수는 없지만 확실한 것은 그가 일본군에 입대하여 동남아시아 전선으로 갔다는 것이다.
당시 동남아시아 전역과 오세아니아 남태평양 지역들은 일본의 식민지였다. 일본의 동맹국이던 독일은 나치 정권 하에 유럽 정벌을 꿈꾸며 자신이 먹었던 마리아나 군도, 카롤라인 군도, 팔라우, 마셜 군도 같은 미르코네시아 지역을 모두 1919년 베르사유 조약과 국제연맹 위임통치로 인해 일본에게 넘겨줬고 일본은 이들 땅들을 남양 위임통치로 명명하고 1920년부터 1945년까지 식민통치하기 시작한다.
뿐만아니라, 나치 독일이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하면서 프랑스도 나치 독일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등 난리가 나자 유럽 세력은 더 이상 동남아시아에 신경쓸 여력이 없어졌고 일본은 파죽지세로 동남아시아 전역을 자신들의 식민지로 만들어서 미국과의 전면전을 위한 요새로 만들었다.
그리고 양칠성은 그런 일본의 식민지들 중에 한 곳인 인도네시아의 자바 섬에 포로 관리원으로 일할 군무원으로 부임받게 된다. 그렇게 조선에서 인도네시아를 식민 감시위해 온 포로 감시원들은 자바 섬 각지에 흩어져 1,400명 정도 됐다고 한다. 그러던 중 일본과 미국의 전쟁이 격화됐고 초반에는 군사력이 우세한 일본이 승기를 잡았다. 초반 일본은 오랜 실전 경험과 제국주의 전시 체제로 인해 미국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그리고 태평양 전쟁 초반에 공군력과 해군력에서도 일본은 미국보다 앞서기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어마어마한 인구수와 경제력, 생산력이 마침내 가동되자, 일본군은 죽여도 죽여도 끝없이 몰려오는 미군의 인해전술과 "핵무기" 앞에 마침내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일본제국이 패망하자 마침내 2차대전은 막을 내렸고 지구는 다시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모든 국가들에 주둔하면서 식민통치하던 일본군들은 마침내 철수하기 시작한다. 그때 일본보다 군사력이 훨씬 약했던 네덜란드는 일본이 철수하는 틈을 노려 다시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를 되찾고자 들어왔다. 호랑이가 없는 굴에 여우가 기승을 부리듯, 일본군이 떠나자 이번에는 네덜란드가 다시 인도네시아로 찾아왔다.
그런데 이때 양칠성은 일본군과 함께 본국인 조선이나 일본으로 귀환하지 않고 그대로 인도네시아에 남아있기로 결정했다. 오랫동안 인도네시아의 포로들을 감시하면서 양칠성은 인도네시아인과 결혼을 하여 자식들을 두었기 때문이다.
1945년 8월 14일 일본군들이 대다수 철수하였으나, 양칠성과 다른 몇몇 한국인 동료들은 아오키 마사하루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에 속해서 인도네시아에 계속 주둔했기에 당시 인도네시아를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던 독립군인 "파팍 왕자 부대(Pasukan Pangeran Papak)"의 급습을 받는다. 인도네시아의 자와 섬에 있는 "반둥(Bandung)"의 마잘라야(Majalaya) 지역에서 벌어진 어느 전투를 통해, 이 부대는 가룻(Garut)에서 온 독립군인 "파팍 왕자 부대(Pasukan Pangeran Papak)"을 결국 이기지 못한 것이다.
그렇게 식민지배국이던 일본군이 식민지였던 인도네시아의 파팍 왕자 부대에게 패배하면서 양칠성은 "파팍 왕자 부대(Pasukan Pangeran Papak)"라는 인도네시아 독립군에 들어가게 되면서 네덜란드군과 치열하게 전쟁을 했다. 인도네시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양칠성은 파괴 공작인 사보타주를 굉장히 잘해서 수많은 네덜란드 군인들을 죽이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양칠성은 결국 싸우다 죽었고, 그는 인도네시아에서는 "코마루딘(Komarudi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됐는데 이는 "인도네시아를 비추는 달"이라는 뜻이다.
조선인으로 태어나, 일본군에 입대되어, 네덜란드인 포로들과 인도네시아인 포로들을 감시하는 포로 감시 군무원으로 살다가, 2차대전이 끝난 후에는 인도네시아를 구원하는 구원자로 살았던 대한민국에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이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구원자로 살았던 아이러니한 양면성이 있는 불가사의하던 조선인, 양칠성 그는 과연 어떤 인간이었을까? 그는 과연 친일파였을까, 인도네시아의 구원자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