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국제 정세가 제국주의나 다름없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 마찬가지로 제국주의나 다름없는 중국의 대만 침략 훈련, 이란과 이스라엘 전쟁, 북한군의 러우전쟁 참전, 동북아시아 북한군 vs 한국군의 군사적 대립 심화, 파키스탄과 중국군 vs 인도와 미군의 전쟁 등등등으로 매우 혼란스럽다.
그 와중에 동남아시아의 태국 vs 캄보디아 국경 분쟁 소식이 가끔 들려오고 있지만, 국내에서는 워낙 동북아시아, 중동, 동유럽에 대한 전황들을 훨씬 더 비중 있게 보도하고 있기 때문에 동남아시아에 대해서는 기껏해야 "미얀마 내전" 빼고는 별로 다뤄지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기에 태국 vs 캄보디아 국경 분쟁에 대해 다루는 언론도 거의 없고, 왜 싸우는지도 잘 모른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거의 다루는 사람이 없는 태국 vs 캄보디아 국경 분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태국과 캄보디아는 언제부터 사이가 안 좋았을까?
(A) 고전시대의 태국 vs 캄보디아 전쟁 역사
본래 고대시대 때의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국방력이 강한 국가는 현재의 미얀마, 베트남, 그리고 크메르 제국이었다. 태국의 경우는, 동남아시아에 상당히 뒤늦게 들어온 민족으로 추측된다. 정확히 언제 동남아시아에 유입됐는지는 아직도 논쟁이 많지만 태국인들이 현재의 태국 땅에 들어왔을 때는 이미 미얀마인들이나 크메르인들이 터전을 잡고 살아가고 있었다. 또한 당시의 태국 땅은 미얀마, 베트남, 크메르 제국이 서로 아웅다웅하면서 땅따먹기 하고 있었기에 태국인들은 크게 세를 불리지 못하고 크메르 제국에 복종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13세기 중세시대 때에 전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던 몽골제국(원나라)이 "대리국"까지도 정복하면서 동남아시아 전역의 질서까지도 순식간에 바꿔버렸다.
몽골제국이 대리국을 정복함으로써, 몽골제국 원정군대의 세계 정복으로 인해 대학살을 피해서 동남아시아로 도망친 "타이인(현재의 태국인)"들의 인구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동남아시아에 대거 유입된 태국인들은 결국에 크메르 제국의 서쪽 땅을 점령하고 그곳에 수코타이 제국을 건설하였다. 태국은 그 이후로도 란나 왕국, 란쌍 왕국 같은 국가들을 건설하면서 캄보디아의 땅을 빼앗거나 계속해서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수코타이 제국의 이후에 탄생한 란쌍 왕국의 경우에는 크메르 제국의 북쪽 땅도 먹었다. 그리고 아유타야 왕국 대에는 태국인들의 인구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크메르 제국의 수도 앙코르까지 먹으면서 크메르 제국은 아예 망해버린다.
크메르 제국이 망한 이후로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 단 1번도 흥하지 못한 채 동쪽에서는 끊임없이 베트남의 침입을 받아야 했고, 서쪽에서는 미얀마나 태국에게 얻어맞으며 그야말로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영원히 동네북 신세로 전락해야 했다.
이렇듯 황금기이자 최전성기인 크메르 제국 때는 베트남, 미얀마, 태국과 대등하게 자웅을 겨룰 정도로 경제력이 좋았던 캄보디아였으나 태국에 의해 망한 후로 항상 베트남이나 미얀마, 태국에게 얻어맞는 동네북 신세가 돼야 했기에 캄보디아인들이 크메르 제국을 망하게 한 주범인 태국에게 애초부터 좋은 감정을 가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B) 근대시대 태국, 캄보디아의 역사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식민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당시 세계 최강대국들이 끊임없이 동남아시아를 침략한 것이다.
고대시대 때는 고대 중국 한무제, 당나라 등이 베트남을 침략하여 식민지화했고,
중세시대 때는 세계를 정복했던 대원제국(원나라)의 원정군들이 동남아시아 전역을 침략하여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을 정복하면서 장기 주둔하거나 단기 주둔했다.
그리고 근대시대 때는 포르투갈 왕국이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 해양에 발을 담군 것을 필두로, 스페인 왕국,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들어왔으며, 가장 뒤늦게 19세기 후엽엔 영국, 프랑스 왕국 등도 동남아시아에 발을 들였다.
그리고 오늘의 무대인 태국과 캄보디아의 변경은 프랑스 왕국, 영국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C) 현재 태국, 캄보디아 국경 충돌의 직, 간접적인 발단
19세기 후엽에 가장 뒤늦게 동남아시아에 발을 담군 프랑스 왕국의 나폴레옹 3세는 1857년 베트남 국왕의 프랑스 왕국, 스페인(에스빠냐) 왕국 선교사 처형 사건을 구실로 삼아 프랑스 왕국, 스페인 왕국 연합 함대를 동원하여 1858년 8월 투란(현재의 다낭)에 상륙했으나 아프가니스탄과 더불어 강력한 방어력을 가진 베트남 답게 결국 베트남군은 혼자서 프랑스 왕국, 스페인 왕국 연합 함대들을 모두 박살내고 승리하는 괴력을 보여준다. 그리고 1860년 3월에서 결국 프랑스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 프랑스 왕국은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쏟아붓어 절치부심한 끝에 가까스로 겨우 샤를 리고 드 주누이 제독이 이끄는 함대들이 1859년 2월 17일부터 1861년까지 2년 간 베트남군과 싸운 끝에 사이공 포위전에 성공하면서 베트남 정벌의 초석을 다진다.
그리고 영국도 어마어마한 경제력을 쏟아붓어 말레이시아를 먹고 이렇게 영국은 동쪽으로, 프랑스 왕국은 서쪽으로 가게 되면서 "태국"이라는 지역에서 만나게 될 운명이었다. 하지만 1907년쯤에 태국의 쭐랄롱꼰 왕은 여기서 신비로운 외교술을 발휘하는데, 태국은 당시 자신의 영향권이었던 캄보디아를 프랑스 왕국에게 무료로 넘기는 조건으로 영국으로부터 보호를 받게 되면서 일종의 동남아시아의 "중립국"으로 남게 된다. 어차피 프랑스 왕국, 영국 둘 다 일종의 "완충국" 역할을 할 국가도 필요했기 때문에 태국은 굳이 정벌하지 않고 남겨둔다.
그런데 2차 대전 때 소련군 vs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싸우는 바람에 유럽 전역이 완전히 초토화되면서 영국이나 프랑스 왕국까지도 사실상 망해버렸고, 2차 대전이 종전된 후 프랑스 왕국과 영국이 정벌한 속국은 죄다 독립을 하게 된다. 캄보디아도 예외는 아니라서 1953년까지 캄보디아를 다스린 것을 끝으로 프랑스 왕국은 슬슬 캄보디아에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문제는 프랑스 왕국이 떠나면서부터였다. 프랑스 왕국은 자기의 속국인 캄보디아의 국경선을 대충 그은 상태였고, 특히 태국이 측량 기준으로 생각한 국경선과 프랑스 왕국이 그은 캄보디아의 국경선은 아예 맞질 않았다.
(D)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Preah Vihear Temple)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Preah Vihear Temple)
특히, 가장 문제가 심각한 곳이바로 인도 힌두교의 시바신을 섬기기 위해 건설한 곳인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이었다. 예로부터 동남아시아는 고대 중국 한나라, 당나라의 영향, 무굴제국의 영향, 인도의 영향, 중동 페르시아(이란) 제국, 아랍의 영향,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영향들을 많이 받았는데 태국과 캄보디아는 특히 인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국가라 이런 힌두교 사원들이 굉장히 많았다.
프랑스 왕국이 애매하게 그은 국경선에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이 있었고, 프랑스군이 1953년 도망치자마자, 태국군이 이곳을 즉각 점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캄보디아는 반발을 하였고 그때부터 분쟁이 심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Preah Vihear Temple) 주변 국경선은 장기간 명확히 합의되지 못했다가, 1962년 국제사법재판소(ICJ)는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Preah Vihear Temple)을 포함한 언덕 지역을 캄보디아의 것으로 판결했으나, 태국 측은 변경 측량 완료 전이라며 반발했다. 그리고 이후에도 갈등은 이어졌는데, 특히 2008년 캄보디아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를 추진하자 변경 분쟁이 심화됐다.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쁘레아 비히아르 일대에서 수차례 무력 충돌이 일어나 포격전을 포함해 수십 명이 죽는 사건도 있었다. 2013년 국제사법재판소는 1962년 판결을 재확인하며 태국군에게 해당 지역 철수를 지시했다. 이 과정에서 양국의 문화적 뿌리 깊은 갈등이 표출되었다. 한때 태국의 딱신 씬나왓 총리와 캄보디아의 훈센 총리가 개인적 우정을 나누며 양국 관계는 다소 우호적이었으나, 딱신의 딸인 패통탄 씬나왓과 훈센의 아들인 훈 마넷 집권으로 이어진 현재는 다시 긴장이 고조되었다.
(E) 현재의 태국 vs 캄보디아 변경 분쟁
앞서 얘기했듯, 국제사법재판소는 1962년에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을 캄보디아의 땅으로 판결했으나, 태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졸병들이 이 일대 주둔을 계속했다. 그런 상황에서 2008년 캄보디아가 쁘레아 바히아르 사원을 세계유산으로 등재하자 갈등이 재점화되었고, 2008~2011년 수차례 변경 충돌이 발생했다. 2011년에는 양측 포격 교환까지 이어져 약 40명이 죽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2013년에 또다시 태국이 이 지역 병졸, 경찰들을 철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태국은 이를 무시하고 있는 실정이다.
최근에도 변경에서 충돌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2025년 5월 28일 태국 vs캄보디아 변경의 비지정 지역에서 양측 병졸 간 총격전이 벌어져 캄보디아 병졸 1명이 숨졌다. 이 사건 후 양국은 즉시 병력을 증강하였고, 긴장이 다시 급격히 높아졌다. 이어 태국과 캄보디아 방위장관은 6월 14일 공동경계위원회(JBC) 회담을 갖기로 합의하고, 양국 병력을 2024년에 합의한 위치로 복귀시키기로 했다.
물론 현재는 양국은 많은 합의를 이뤄 24%의 미해결 구간만이 남았는데 충돌이 일어나는 부분이 이 24% 부분이고,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Preah Vihear Temple)이 대표적으로 여기에 들어간다.
한편 태국 정부는 “안보 이유”를 들어 국경의 10개 출입국 검문소 운영 시간을 단축했다. 국경 문제 해결 방안으로 캄보디아는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판결해 줬던 국제사법재판소의 판결을 제안했지만, 태국 정부는 이번에도 국제사법재판소가 자기들에게 불리하게 판결해 줄게 뻔하므로 “국제사법재판소의 방식을 인정할 수 없다”며 양국 협상을 통한 해결을 유지했다. 이처럼 정식 외교 방식을 통한 논의에도 불구하고, 최근 변경 충돌 사건이 불거지면서 양측은 긴장 수위를 낮추기 위해 노력하는 중이었다가 또 1번 사건이 터졌으니 패통탄총리의 전화 사건이다.
(F) 태국 패통탄 총리의 탄핵 위기
2025년에 5월 28일쯤에 쁘레아 비히아르 사원(Preah Vihear Temple)에서 캄보디아군 1명이 또 숨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 사건 이후, 패통탄 총리는 30년간 자기 가문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훈 센 가문과 전화 통화를 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통화 내용이 문제였다. 2025년에 패통탄 총리가 캄보디아 훈센과 나눈 비공개 전화 통화가 유출되어 큰 파장을 일으켰던 것이다. 유출된 대화에서 패통탄 총리는 캄보디아의 실권자 훈 센(전 총리, 현 상원의장)을 “삼촌”이라고 부르며 자기를 낮추고 훈 센을 더 높은 서열인 것처럼 떠받들었고, 변경 분쟁을 논의했다. 이 통화 내용에서 그녀(패통탄)는 자국 군부 수뇌부를 비판하며 “(군 지휘관이) 멋있어 보이고 싶어 했을 뿐”이라 욕하면서, 훈 센에게는 “그들(태국 군부) 때문에 삼촌(훈 센)을 화나게 하고 싶지 않아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게요”고 얘기했다. 즉, 훈 센에게 자국군인 태국 군부 견제를 지원해 달라고 애원하는 뉘앙스로 들릴 발언들이었 게 문제였다.
통화 내용이 공개되자 태국 내 여론은 들끓었다. 태국이 현재 세계에서 군사 쿠데타가 가장 많은 국가이긴 하지만, 그래도 예민한 변경 분쟁 상황에서 자국군을 폄하한 것에 대해 태국인들이 좋게 볼 리가 없었다. 보수 성향 시위대와 야당은 즉각 패통탄 총리가 지나치게 캄보디아에 끌려 다닌다며 격렬히 반발했다. 왕당파 ‘옐로 셔츠’ 출신 시위대는 총리 관저 앞에서 퇴진을 요구했다. 연립 여당 내에서도 보수 성향의 부엠자이타이당 등이 연일 강도 높게 비판하며 탈당을 선언했다. 결국 태국 헌법재판소는 7월 1일 패통탄 총리를 60일간 직무정지 처분하고 윤리위반 여부를 조사하기로 했다. 패통탄 총리는 기자회견을 통해 “음성 유출로 국민에게 불편을 끼쳐 죄송하다”라고 사과했다. AP 통신도 그녀가 “유출된 통화로 화가 난 국민들에게 사과”했다고 전했다.
더욱더 문제 되는 점은 이 통화 내용을 뿌린 게 바로 훈 센이라는 점이 확실해졌다는 것이다. 훈 센은 자신의 지지율을 높이기 위해 통화 내용을 공개했고 "겨우 80명에게만 음성 내용을 공유한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태국과 캄보디아의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