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 후기, 베트남 응우옌 왕조의 기독교 박해로 프랑스 왕국·스페인 왕국의 선교사들이 대거 처형되자 나폴레옹 3세는 이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보복을 결의하였고 1858년 9월, 프랑스 왕국의 "샤를 리고 드 주누이(Charles Rigault de Genouilly)" 제독이 데리고 온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연합함대(선박 14척, 졸병 숫자 약 3,000명)들이 다낭(당시 투란) 연안에 상륙하면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로써 1858년 9월부터 1860년 3월까지 2년간이나 지속된 투란 포위전(다낭 포위전)이 시작되었다.
당시 프랑스 왕국은 압도적인 경제력과 많은 병사 숫자들로 인해 당연한 승리를 기대했으나, 도성인 후에까지 가기에는 베트남군이 예상보다 훨씬 잘 싸웠다.
전투 초기 연합군은 값비싼 선진 화기를 앞세워 선짜군 반도의 주요 요새를 급습했다. 하지만 당시 뜨득 황제는 레딘리 장군과 다오찌 장군 등을 증원하여 다낭 사수를 강화했고, 9월 중순에는 디엔하이 요새가 소실되고 레딘리 장군의 병사들이 철군하는 등 전황은 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는듯 보였다. 그리고 10월에는 응우옌찌프엉 장군이 남방에서 파견되어 총사령관직에 취임한 뒤, 투란(다낭) 반도의 린트리 방어진(約 3km 길이)을 구축하여 프랑스군을 포위, 차단하는 태세를 갖추었다.
1859년 2월 잠시 밀린 프랑스군은 한때 사이공으로 병사들을 이동시켜 요새를 장악했으나, 베트남군에게 패배하면서 철수하고 다낭으로 다시 복귀해야했다. 5월 8일 샤를 제독은 다낭 포위망을 돌파하고자 보병, 해병 약 1,500명을 이끌고 대규모 공세를 감행했으나, 베트남군의 참호 방어선과 매복에 가로막혀 돌파에 실패하면서 연달아 참피했다. 결국 1860년 3월, 이틀간의 교섭 끝에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연합군의 대부분 병력들은 사이공으로 도망쳤다.
투란(다낭) 포위전에서 베트남군의 승리 이유
베트남군(안남 제국군)은 지속 소모 전투와 참호 방어전 위주로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 연합군을 견제했다. 응우옌찌프엉 장군은 “방어를 공격으로 삼는다(取守爲攻)”는 전략 하에 마을과 농경지를 황폐화시키는 속전 속결 전술("텅 빈 들판 전략")을 구사하였다. 실제 연합군이 머물렀던 주변의 마을은 모두 비워져 식량 공급로가 차단되었고, 주민들은 “텅 빈 밭과 집들”로 내몰렸다. 또한 베트남군은 광범위한 지뢰 및 함정식 참호 전술을 구축하여 프랑스병이 접근할 때마다 매복 사격으로 큰 타격을 가했다.
베트남군의 방어선도 광범위하게 설치되었다. 프엉 장군 휘하 군대는 다낭 항구 일대에 약 12km에 이르는 복합 방어진(토요새 및 울타리, 참호망)을 구축했다. 벽과 참호 내부에는 대형 포들과 현대식 소총들이 배치되어 프랑스와 스페인군들을 압도했으며, 야간 매복과 소규모 저격 공격을 통해 적의 소량 정찰병과 보급대를 끊임없이 타격했다.
요약하면, 베트남군은 매복 저격, 요새 사수, 참호전, 보급 차단에 주력하여 프랑스 왕국과 스페인 왕국의 연합함대들에게 계속해서 타격을 가했다. 이 전술은 아군의 인명 피해 없이 장기전을 유리하게 이끌며 프랑스군과 스페인군들을 고립시켰다.
날씨와 질병도 프랑스군과 스페인군의 연합군의 큰 적이었다. 베트남의 열대 지역 특유의 폭염, 비단뱀, 악어, 전염병(콜레라 등)의 창궐로 프랑스 왕국, 스페인 왕국 연합군은 질병으로만 수백 명이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