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열강이 될 "뻔"했던 조선

조선에게 찾아온 기회, 그걸 발로 찬 중종

by 바다의 지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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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까지 스페인, 포르투갈과 대등했던 조선의 군사·기술력



조선은 생각보다 왜곡도 많이 됐지만, 과소평가도 꽤 많이 된 국가다. 아무래도 구한말 때 보여준 고종황제의 무능함과 정적제거에만 혈안이었던 정치가들의 모습을 보고 조선의 전체적인 모습을 그리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의 모든 한국인들이 역사상 한민족 국가들 중 가장 뛰어난 국가 1위, 2위, 3위를 정하면 항상 고구려, 발해, 고려가 순위권에 오르지만 정반대로 가장 싫어하는 국가 1위, 2위를 꼽으면 항상 조선, 신라가 순위권에 오른다. 나 역시 조선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조선은 500년이라는 세계사에서도 굉장히 드물게 오래 존속한 국가고, 그렇기에 초기와 중기, 후기 때의 조선의 모습은 매우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조선 초기 태종 때부터 시작되어 특히 세종, 문종 때에 이르는 기간이야말로 조선의 최전성기이자 황금기로써 군사, 기술, 법과 국가 체계, 과학, 수학, 축성술, 천문학, 기록 등등 모든 분야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초기에만 한정해서 본다면 조선시대의 군사력과 기술력은 당시 명나라보다는 훨씬 약했으나, 그래도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와는 대등한 수준이었다.


대표적으로 측우기(鑄雨器)수표(水標)도 이 시기에 발명되어, 전국의 강우량을 과학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체계도 세워졌다. 세종은 실측 지도인 "신찬팔도지리지"나 정밀 천문기기를 발명케 했으며, 1446년에는 한글의 전신에 해당하는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현재 대한민국이 고대 중국 한자어의 영향력 하에 지배당하지 않도록 해줬다. 실제로 1448년에 편찬한 "총통등록"에는 조선식 화포 제조법과 사용법을 한글과 그림으로 상세히 정리해 놓았다.


특히 고려시대 말기부터 최무선이 주도하여 발명하고 실용화, 보급화된 "화포(銃筒)"는 곧 해전을 지배했으며 세종 때 규격화되었고, 거북선(龜船)은 15세기 초 왜구의 백병전에 대비해 개발한 중장갑 돌격 군함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거기까지였다. 조선은 이런 최첨단의 군사 기술들과 무기들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온전히 계승되지 못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 초기 태종이 발명한 전쟁무기들의 사용법을 몰라서 그 사용법을 알아내느라 여러 서적들을 뒤져가며 고전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였다. 전쟁무기들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지 그 방식과 매뉴얼은 굉장히 체계적으로 잘 기록해 놨으나 문제는 "실전의 부재"였다. 전쟁을 끊임없이 했을 정도로 잦았던 고려시대와는 정반대로, 조선은 평화기가 길었기에 강력한 무기들을 발명했어도 실전에서 써먹을 일이 잘 없었기에 막상 전쟁이 발발하면 사용법을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이런 조선이 중, 후기에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퇴보한 이유는 다름 아닌 "경제력" 때문이다. 이미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한반도는 70% 이상이 산지라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땅이다. 게다가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시대 때까지의 한반도를 비롯한 북반구 세계 전체는 그야말로 소빙하기였기에 매우 추웠다. 이런 약점을 고구려나 발해는 정복활동을 통해 약탈경제라는 것으로 극복했으며, 고려는 중동 페르시아(이란), 아랍 세력들과의 활발한 해상 무역을 통해 극복하는 데 성공했으며 군사력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하지만 문제는 조선은 모든 면에서 고려와는 정반대의 체제를 가지고 있었고, 해상 무역도 하지 않았기에 경제력이 상승할 리가 없었다.


이미 15세기 이후로 지구는 "경제력"의 시대로 접어든다. 경제력이 강해야 군사력이나 기술력도 강해졌다. 따라서 15세기 이후로 모든 문명국, 선진국이란 것들은 경제력 발전에 혈안이 됐다. 경제력이 강해지면 군사력과 기술력은 따라서 발전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유효하다.


그런 조선에게 있어서 건국 이후 단 한 번뿐인 기회가 찾아왔으니, 바로 "연은분리법"의 발명이었다. 이는 단순한 기회가 아니라 15세기 이후로 경제력의 시대가 돼버린 지구에서 조선이 단순히 세계적 열강으로 성장할 수도 있는 엄청난 기회였다.




2. 기축통화 "은"의 시대에 연은분리법 발명



초기까지 조선이 비록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와 군사력, 기술력이 대등한 수준이었다곤 하지만 그렇다고 당시 조선을 세계적 열강이라고 부르진 않는다. 왜일까? 세계적 열강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인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열강이란 단순히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만 높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영향력이나 외교력, 그리고 문명 수준 등 모든 면에서 우월해야 된다. 바꿔 말하면 군사력이나 기술력은 좀 낮더라도 모든 면에서 골고루 발전하여 세계적 영향력을 행사하면 세계적 열강인 것이다.


조선은 1503년 연산군(燕山君) 시기에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이라는 당시 지구상에 가장 획기적인 은광석 정련 기술을 발명했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기술력인지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에 비유하자면 반도체나 Ai 기술력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듯하다.



당시 세계 패권국이었던 명나라의 국가 화폐는 "은"이었고, 따라서 기축통화도 "은"이었다. 오늘날 패권국인 미국의 달러가 기축통화이듯이 말이다. 따라서 일본이든, 네덜란드든, 스페인 왕국이든, 포르투갈 왕국이든 해상 교역을 하기 위해서는 이 "은"이 필요했다.


더 쉽게 설명하면 "은"을 많이 생산해 내는 국가일수록 엄청난 경제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구조이기도 했던 것이다. 후술 할 일본도 이와미 은광산으로 엄청나게 경제 발전을 이뤘으며, 스페인 왕국도 폰토시 은광산을 통해 경제 성장을 이뤘을 정도니 말이다.


이런 세계 패권국 명나라가 구축한 기축통화 "은"의 시대에 발명된 "연은분리법"은 그야말로 조선의 경제력을 단숨에 성장시켜 줄 수 있는 비장의 무기와도 같았다. 연은분리법은 당시로서도 엄청나게 획기적인 은 제련법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은 16세기 초, 조선 연산군 대에 발명된 고전적인 "회취법(灰吹法, cupellation)"의 진화판이다. "단천연은법(端川鍊銀法)"이라고도 했는데 이는 함경남도 단천에서 생산되는 은이 다량 함유된 납광석을 이용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연산군일기에 따르면, 1503년 6월 13일(연산 9년 5월 18일)에 장례원(掌隷院) 종 김검동(金儉同)과 김감불(金甘佛)이라는 두 기술자가 “납 한 근으로 은 두 돈을 불릴 수 있으며, 납은 우리나라에서 나는 것이니, 은을 넉넉히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불리는 법은 무쇠 화로나 냄비 안에 매운 재를 둘러놓고 납을 조각조각 끊어서 그 안에 채운 다음 깨어진 질그릇으로 사방을 덮고, 숯을 위아래로 피워 녹입니다."라고 국왕에게 시연하였고, 연철을 화로에 녹여 은을 골라내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한다.


당시 양반층도 아닌 일반 양인이나 백성이 국왕 앞에서 이런 기술들을 시연한다는 것은 봉건제 사회에서는 엄청난 일이었지만 연은분리법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될 정도인 것을 보면 확실히 당시로서도 이 기술의 중요성은 알긴 알았던 모양이다.


회취법이란, 납이 포함된 "은광석"에서 녹는점의 차이를 이용하여 납만을 산화시켜 은을 골라내는 매우 고도의 기술이다. 아무래도 한반도는 금이나 은 같은 자원이 많이 없기 때문에 이런 기술이 있으면 엄청나게 유용한 셈이다.


이 연은분리법 시연을 본 연산군은 처음에는 함경도 단천(당시 조선 최대의 은광)에서 시험 삼아 연은분리법으로 은을 생산하도록 지시한다. 그리고 이에 더해 당시 공조 판서였던 정미수는 민간의 은광 채굴 조건으로 세금량을 늘리는 "채은납세제(採銀納稅制)"의 시행을 거듭 촉구하여 이를 연산군은 승낙하여 시행되었고, 당시 은 광산에서 채굴을 하면서 돈을 벌었던 광부들이 납부하는 세금 액수는 1명당 1일에 은 1냥이었다.


하지만 1506년 군사 쿠데타인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킨 후 집권한 중종은 연산군에 의해 시작된 사치와 항락을 척결하면서 "금욕주의"를 내세웠는데, 그 과정에서 은광 채굴 금지령을 내리면서 1507년 4월에 연은분리법도 금지한다.


당시 조선도 나름대로의 사정이 있긴 했다. 아무래도 조선은 명나라의 위성국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만약 연은분리법을 활발하게 시행했다면 명나라에게 바치는 조공의 양이 더욱더 많아질 우려도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됐건 그 결과 조선은 이 연은분리법이라는 현재의 Ai 기술력에 필적하는 대단한 "기술"을 발명했음에도 제대로 써먹거나 활용하지 못했고, 화폐경제의 발전도 지연되었다.


결국 연은분리법은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고 은광 개발을 하던 기술자들은 이 기술을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게 됐다. 조선의 기술자들이 전해준 연은분리법은 이와미 은광에서 엄청난 대성공을 하며, 1533년에 이미 일본 전역의 다른 은광들에까지 기술이 빠르게 확산됐다.


1562년에는 모리(毛利) 일족이 은광의 지배권을 가져갔다. 에도 막부 정권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당시 스페인 왕국이 남아메리카의 은광에서 행했던 "수은 아말감 공정(Amalgamation process)"을 빠르게 도입하여 생산량을 더욱 늘리기 위해 시도했으나, 수은 아말감 공정보다 연은분리법이 훨씬 고도의 기술이었기에 일본에는 수은 아말감 공정은 곧 잊혔다.


이렇게 일본의 연은분리법은 "은본위제도"로 성장하는 계기가 된다. 이미 17세기 때가 되면 이와미 은광에서 은 산출량만 연 수십 톤을 돌파했으며, 이는 일본이 세계 3위의 은 생산강국으로 등극하게 해 줬다.


이 방대한 은 공급은 일본이 중국, 서양과 무역, 군비 경쟁을 벌이는 데 강력한 자금원이 되었으며, 결국 먼 훗날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하는 경제적 밑바탕이 되었다. 조선으로서는 굉장히 뼈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자국 기술이 가져올 막대한 부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비극을 겪었으며, 만약 이 연은분리법을 제대로 실행만 됐어도 조선이 세계적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도 있었을 일이었다.


연은분리법을 조선이 실현했다면 조선에도 풍부한 은이 공급되어 화폐 유통이 활성화되고 국가 재정이 엄청나게 강화될 수 있었다. 게다가 조선은 일찍 중기 때부터 직업군인제도를 실행하려고 했지만 고질적인 경제력 부족 때문에 번번이 다시 회귀했다. 그런데 풍부한 경제력만 있으면 직업군인제도로 빠르게 전환이 됐을 것이다. 게다가 은을 화폐로 채택하거나 해외 교역의 지렛대로 삼아 자본을 축적했다면, 일본과 마찬가지로 군사력과 산업 기반 확충이 가능했을 것이다. 즉, 독자적 은광 개발로 막대한 자원을 확보했더라면 조선도 중국, 일본, 유럽과 경쟁할 만한 군사력, 기술력, 경제력을 갖추고, 국가 위상을 크게 높일 수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이에 대해 비판적 반론도 존재한다. "연은분리법"이 당시 조선을 세계적 열강으로 성장시켜 줄 수 있는 아주 획기적인 기술력임에는 틀림없지만, 문제는 조선이 있는 "한반도"라는 최악의 지형적 조건이 발목을 붙잡는다는 것이다.


이 연은분리법은 조선처럼 금이나 은 같은 자원이 적은 국가에서 최대한 많은 은을 생산해 낼 수 있는 획기적인 기술이지만, 그럼에도 조선은 땅에 자원이 없어도 너무 없었다. 한반도 최대의 단천 은광 자체부터 그렇게 은의 양이 많지 않았는데, 연산군 전까지 조선인 광부들이 많이 채굴을 해가는 바람에 단천 은광은 이미 고갈 직전이었고, 만약 연은분리법을 발명했어도 그걸 눈 뜨고 지켜볼 명나라가 아니었기에 조선이 연은분리법을 제대로 시행하여 은을 체계적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산출했다면 명나라가 그 기술을 빼앗아가거나 혹은 조선이 생산해 내는 수많은 은들을 빠르게 전부 다 흡수하였을 가능성이 대단히 높았기에 연은분리법은 시행됐어도 조선이 세계적인 열강으로 성장되기는 힘들었을 가능성도 높다는 반론도 있다. 실제로 임진왜란 때 조선에 주둔한 명나라 원정군인들의 군자금 확보를 위해 명나라가 직접 조선의 은광 개발을 주도했으나 그다지 이득을 많이 못 본 것만 봐도 알 수 있고, 현재도 단천에는 은을 생산하지는 않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부분이라는 것이다.






3. 조선의 경제 구조와 한계



정답부터 말하겠다. 조선은 체계적이고 완벽한 국가임과 동시에 상당히 "답이 없는" 국가였다. 조선의 경제 체계는 농업 중심의 경제 구조로 운영되었다. 여기서 "농업"이 나쁘다는 게 절대 아니다. 산업 혁명 이전의 지구상의 모든 열강들, 선진국, 문명국들은 다 농업 기반으로 성장하였고, 로마제국도 농업으로 운영되었으며, 명나라도 해상 무역으로 대제국을 운영하였으나 농업도 중요한 군사비 확보 수단이었고, 스페인 왕국이나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왕국, 미국도 산업혁명의 근대화 이전에는 죄다 농업으로 운영되었다. 이는 지금도 유효한데, 현재 미국이 제조업이 사실상 없다시피 한데도 패권국의 지위가 유지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기름지고 풍요로운 아메리카 땅의 농업이 밑바탕이 되어 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농업은 인류사에서 가장 중요하며 산업혁명 발전에도 가장 중요한 밑거름 되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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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조선은 왜 이런 농업적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을까? "농업"이 나쁜 게 아니라, 조선이 있는 추운 "한반도"라는 지형 자체가 "농업"에 전혀 안 맞기 때문이다. 물론 세계적으로 추운 지형으로 보자면 중국 대륙이나 러시아 대륙이 조선의 한반도보다 훨씬 더 혹한으로 춥지만 그래도 중국 대륙이나 러시아 대륙은 평지다. 하지만 한반도는 추운 데다 전국토에 산지가 70% 이상이기에 농사를 지을 수 있는 경작지(耕作地)가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에 절대로 농업에 주력해서는 안 되는 지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주기적으로 가뭄도 극심하게 찾아오고 말이다.


세계 10위의 경제력을 가진 지금 대한민국조차도 수출주도형 국가로 성장했음에도 자체적으로 농사를 해서 해외에 수출해서 돈을 벌지는 않는다. 대한민국의 최첨단 기술력들은 러시아, 중국, 미국보다는 훨씬 약하지만, 이미 스페인, 네덜란드, 포르투갈,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 따위는 추월한 지 오래다. 그런 압도적인 경제력과 기술력을 가진 대한민국조차도 한반도가 가진 극한적인 농사 불능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에 대한민국조차도 게임, 무기 산업(방산), 한류 같은 예술 산업들, IT, 반도체, K-POP들로 세계를 주도하면서 막대한 돈을 벌지 한반도에서 농사를 해서 돈을 벌지는 못한다.


이렇기에 조선은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농업을 빠르게 포기했어야 됐다. 하지만 조선은 농업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농사가 안 되는 지형적 조건 탓에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굶어 죽는 경우들이 많았고 조선의 경제력은 후기로 갈수록 약해져만 갔던 것이다.


또한, 백성들이 극심한 가난에 시달린 터라 화폐 경제로 발전되기도 힘든 구조였다. 태종 1년(1401년) 한차례 저화(楮貨, 화폐) 유통 시도를 하고, 세종 시기에 조선통보(銅錢)를 주조하여 보급을 시도했으나, 여전히 주요 화폐 기능으로 완전히 정착하진 못했다. 정부의 화폐 정책이 성공을 거두려면 백성들의 삶의 질이 어느 정도 해소 됐어야 됐는데 조선은 농사에 전혀 맞지 않는 한반도의 지형에서 농업에 주력하느라 경제 성장이 전혀 이뤄질 리가 없었고 그럼에 따라 백성들은 날이 갈수록 굶어 죽기에 바빴고, 화폐를 쓸 여력이 없던 것이다. 그런 탓에 화폐경제 발달이 매우 더뎠다. 실제 동전 유통은 17세기 말 상평통보(常平通寶) 발행 이후 본격화되었다.


중국은 이미 아주 오래전 고대시대 전부터 화폐 경제로 대제국들을 운영했던 것을 보면, 17세기 말에야 뒤늦게 상평통보 발행으로 화폐 경제를 시작했던 조선은 매우 늦은 셈이다. 물론 조선 이전에는 나름대로 화폐 경제 같은 구조들을 활발히 운용하긴 했다. 고조선은 "명도전(검 모양의 청동 동전으로 기원전 중국 연나라가 주도한 기축통화로, 동아시아 전역이 사용했기에 고조선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됨)"을 운용했고, 삼국시대의 가야는 "철"을 화폐처럼 사용하며 나름대로 그 시대상의 화폐 같은 정책들을 펼치면서 고려시대 때까지 화폐 정책들이 날이 갈수록 눈부시게 발전했다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화폐 정책 측면에서 신라나 가야, 고려시대보다 훨씬 퇴보해 버린 것이다.


이러한 화폐 유통의 부진은 상품경제 확장에 걸림돌이 되었다. 중기 때부터 상업, 공업은 일부 발달했으나 여전히 시장 규모가 작고, 국가 재정은 주로 토지수취에 의존했기에 후기 때 탐관오리들이 죽은 이들에게까지 세금을 부여해서 삥 뜯는 사악한 구조가 정착돼버리면서 경제 활동에 전념해야 될 백성들은 점차 해적이나 산적, 도적떼들로 변하면서 더 이상 정상적인 경제 활동으로는 살아갈 수가 없게 되면서 서로가 죽고 죽이고 수탈해야 겨우 살아갈 수 있게 되어 조선은 국가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된다. 이런 시기에 근대시대가 열리면서 청 제국, 러시아 제국, 일본 제국 등이 조선을 두고 패권 경쟁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조선은 풍부한 은화를 스스로 생산하지 못하고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거나 은을 수입해야 되는 구조였다. 결과적으로 고구려와 발해가 정복활동으로 쌓아놓기 시작하고, 고려가 중동 페르시아(이란) 제국과 아랍 세력들과 해상 무역을 하면서 쌓아놓은 막대한 국가 재정은 근세시대에 접어들면서 조선이 쓰기만 하고 다시 채워 넣지 않으면서 한계에 봉착했으며, 군사력 증강이나 기술 개발에 쓸 자금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실제로 19세기 근대시대에 조선 정부는 근대적 군비, 산업 건설비 조달을 위한 비담보 화폐(當五錢)들을 무분별하게 발행했고, 이는 심각한 인플레이션과 경제 혼란을 초래했다.






4. 근대시대 조선의 경제 한계점



이처럼 조선은 땅 자체가 농사도 안 되고 자원도 없는데, 정복활동이나 해상 무역도 전혀 하지 않은 탓에 상품경제가 너무나 뒤처지고 세원(稅源)도 빈약해진 탓에, 근대시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국방 예산과 기술 투자 요구를 제대로 충당할 국가 예산을 확보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초기 때 세종대왕은 세종 15년(1433년)에 "체탐군(體探人)"이라는 북방 첩보부대이자 특수부대를 조직하여 활발히 활용할 정도로 당시 군비는 굉장히 막강했으며, 중기 때에 발발한 임진왜란 때까지도 그럭저럭 군비로 쓸 재정이 남아 있었기에, 1593년 임진왜란 중에 명재상 류성룡의 주장으로 장창보병대와 조총병 위주의 일본군에 맞서기 위해 살수(검병, 검병), 사수(궁병), 포수(조총병)로 이뤄진 삼수병을 훈련하여 조선의 최정예 군영인 오군영 중 하나로 "훈련도감(訓鍊都監)" 같은 최정예 직업군인(전문 상비군)들을 조직했으나, 문제는 임진왜란 후였다. 당시 세계 최강의 기병대였던 팔기군을 앞세운 대청제국(청나라)의 팔기군들이 한반도를 침략한 정묘호란, 병자호란 등으로 조선의 국가 경제가 순식간에 파탄 나면서 한계점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이제 조선은 직업군인제의 지속적인 군비 유지가 어려웠다.


이 시기가 되면 조선은 이제 "모험"을 했어야 됐다. 지금까지의 경제 구조를 완전히 개편하고, 더 이상 한반도 지형에 맞지 않는 농업 기반 경제를 포기하고 고려시대나 아니면 당시 유럽이나 중국처럼 해상 무역에 전념하여 그것을 발판 삼아 빠르게 근대화를 시도했어야 됐다. 중기 때까지 조선은 그래도 국방,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대전제"를 위해서 모든 관료들이 총력을 기울이는 구조를 유지했기에 국가가 계속해서 발전해 가는 듯했으나, 후기 때가 되면 "붕당"이라는 정치 전쟁이 너무 선을 넘으면서 서로 정적제거 죽이기에만 혈안이 되어 이제는 국가, 국방, 경제 발전이라는 "대전제"마저 서서히 잊어버리게 된다.


종합하면, 한반도 지형에 전혀 맞지 않는 농업에 편중된 경제 체제와 현재의 이슬람교 국가인 아프가니스탄, 이란 같은 성을 죄악시하고 탄압 시 하고 억압하는 금욕주의적 신분제, 관료제가 조선 사회를 경직시켜 경제 발전의 발목까지 잡았고, 이는 초기 때까지는 스페인 왕국,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와 동등할 정도로 굉장히 발전했던 조선의 군사력, 기술력을 순식간에 정체시키고 경제력마저 제약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근대시대가 되면서 일부 실학자들은 중국과 서양의 앞선 경제, 과학, 기술 도입을 주장했으나 실현되진 못했다. 당시 금욕주의적이고 보수적이고 엄격한 조선의 사회, 정치 체계는 대외 개방에 적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불행인지 다행인지 흥선대원군 시기에는 프랑스 왕국과의 전쟁인 병인양요에서 조선군이 승리를 거두고, 미군과의 전쟁인 신미양요에서는 조선군이 비록 패배했으나 미국은 목적은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조선은 근대화에 뒤처지는 결과를 맞이했다.


쇄국정책(鎖國政策)을 통해 중국, 일본, 러시아 제국을 비롯한 서구와의 교류를 엄격히 금지했고, 보수 유림들은 외래의 학문, 개화사상을 강력히 배격했다. 거기서 더 나아가 실제로 박제가나 정약용 같은 선각자들 또한 조정에서 배척당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그들의 주장은 정작 개항(1876년) 이후에야 재론될 수 있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근대 기술을 도입하여 근대화를 성공시킨 반면, 조선은 제도적 경직과 개혁 좌절로 기회를 놓쳤다.


결국 19세기 중후반 조선은 청 제국·일본 제국·러시아 제국의 전쟁터가 될 수밖에 없었다. 종합하면, 초기에 조선은 스페인 왕국·포르투갈 왕국·네덜란드 등과 비견될 만큼 뛰어난 군사력, 기술력과 문명 수준을 가지고 있었으나, 잇따른 전쟁 피해 및 패배(대표적 임진왜란, 병자호란)·보수적 사회구조·한반도 지형과 맞지 않는 농업 경제·화폐경제의 퇴보와 후기 때 뒤늦은 재발전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산업혁명·경제혁신이라는 시대적 흐름에 대응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조선은 근대 이후 시대적 추세에서 점차 뒤처지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연은분리법이 실현되었더라면 조선은 "열강"으로의 진입이라는 부국강병의 전환점을 맞을 수 있었을 가능성은 어느 정도 있다. 풍부한 은과 원활한 화폐 유통은 경제력 발전으로 이어져 군비 확대와 산업 기술 개발의 기초를 제공했을 것이고, 이는 러시아 같은 세계열강이나 일본과의 경쟁에서 보다 유리한 위치를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 조선의 은광은 이미 조선인 광부들의 마구잡이 채굴로 인해 고갈 직전이었다는 반론도 있긴 하다. 또, 연은분리법의 포기, 폐쇄적 경제체제, 각종 전쟁 패배 및 피해들로 의한 재정 악화·자원 파괴(실제로 조선시대 때까지 한반도는 지금 대한민국보다도 훨씬 더 추웠기에 추운 겨울을 버티기 위해 땔감 조달 및 판매 목적으로 마구잡이로 벌목하였고, 그로 인해 후기 때가 되면 한반도는 저온 건조 기후가 될 만큼 전역이 민둥산이 될 정도로 자연 파괴가 극심했다) 등이 겹치면서 조선은 근대화에 철저히 실패했고, 이로 인해 결국 세계열강인 러시아 제국이나 청 제국, 일본 제국에 비해 훨씬 더 뒤처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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