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왕국의 식민지인 네덜란드의 역사

대항해시대의 네덜란드는 스페인 왕국의 식민지였다.

by 바다의 지정학




A. 합스부르크 왕실의 네덜란드 상속과 지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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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합스부르크 왕실 하면 음란, 음탕하고 난잡하게 근친결혼들을 많이 해서 "주걱턱"이라는 기형아들을 많이 출산했던 그저 그런 집안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네덜란드의 역사에서는 꽤나 비중이 있다.


15~16세기 근세 후엽쯤이자 근대 초엽쯤, 합스부르크 왕실의 혼인 정책으로 네덜란드 17개 주는 부르고뉴 촌락으로 편입되었고, 막시밀리안 1세가 부르고뉴 공작 부부인 마리와 결혼하면서 "합스부르크 집안""네덜란드"를 상속받게 된다. 이렇듯 당시 16세기~17세기 근대 초엽이나 근세 후엽의 남유럽, 서유럽 사회는 "남녀결혼"으로 이뤄진 사회였다. 손자 까를 5세는 겐뜨에서 탄생하여 16세기쯤인 1506년쯤 부르고뉴 공국(네덜란드를 포함하여)을 승계받은 뒤 1516년쯤 스페인 왕국까지 상속받고 1519년쯤 신성로마의 임금님이 되어 남유럽, 남미 지역을 다스리게 된다.


까를 5세는 16세기 중엽인 1549년쯤에 "쁘라그마띠끄 선언(Pragmatic Sanction)"을 하여 네덜란드 17개 주를 하나의 불가분 고을로 선언하였다. 1555~56년 까를이 왕을 그만두면서 합스부르크 집안은 오스트리아과 스페인으로 나뉘었다. 네덜란드는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넘어가 스페인 왕국과 합스부르크 집안의 직, 간접 다스림을 받게 되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신성로마의 조공국, 속지면서도 스페인 왕실에 묶인 속지(개인협동)로 편입되었다.


스페인은 네덜란드를 중요한 경제적 자원으로 봤지만, 서로 떨어진 곳을 효율적으로 다스리기는 어려웠다. 펠리페 2세는 뒤를 이어 1556년쯤부터 네덜란드의 중앙집권적 정책과 가톨릭 통합 정책을 주장했다. 그는 조세와 종교적 탄압으로 내정 개혁을 시도했으나, 이는 네덜란드의 부유한 농업, 상업 지역과 전통 특권 신분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경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네덜란드에 무거운 조세를 부여했으며, 기독교(칼뱅파) 박해를 위한 종교재판소(Inquisition) 축조와 주교구 분리 등으로 종교적 긴장도 발생하였다. 이처럼 점차 가난해짐과 동시에 종교적으로 통합을 위해 노력까지 하면서 네덜란드 사회에 혼란을 초래해 스페인에 대해 불만을 키웠다.





B. 펠리페 2세 조정에서 갈등 발생


1556년쯤부터 펠리페 2세가 옹립된 뒤 네덜란드 지방관으로는 누이 "마르가릿따"를, 조카 "마르가릿떼"를 부임하며 개혁을 주장했다. 그러나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태어난 스페인 사람이어서 그런지 네덜란드어를 할 줄 몰라 의사소통에 큰 차질을 빚어 네덜란드 원주민들의 불만이 컸다. 또, 펠리페 2세는 지방 부자와 시민의 권리를 축소하고, 과도하게 조세를 늘리고 종교적 탄압을 계속하였다. 이에 네덜란드의 돈 많은 부자와 중산층은 스페인 왕국은 더 이상 필요 없다며 나가라고 얘기하며 조세 감면도 요구했으나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65년쯤부터는 낮은 신분의 귀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펠리페 2세에게 탄원서를 제출(“괴젠의 탄원”)했지만, 관료들은 이들을 “거지(Beggar)”라 조롱하고 비웃을 뿐 탄원서를 받지 않았다. "오랑예공 빌럼 1세(윌리엄 베일런트)"는 부유층 연맹 지원을 약속했으나 에그몬트, 호른 백작 등 주류 신분은 호응을 해주지 않았다. 이런 가운데 1566년쯤에 습하고 무더운 네덜란드의 여름, 칼뱅주의 교인들이 성상 파괴 운동(Beeldenstorm)을 벌여 가톨릭 교회에서 민폐짓을 행했다. 지금껏 종교개혁에 우호적이던 일부 네덜란드 농민들은 펠리페 2세의 일관된 기독교 탄압과 조세 정책을 이유로 점차 "농민봉기"가 확산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급습을 당한 스페인 측은 깜짝 놀라 졸병들을 데리고 반격했다. 1567년 알바 공작(펠리페 2세의 내금위장)을 보내자 그는 "피의 재판소(Council of Troubles)"을 설치하여 봉기 관련자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이 재판소가 내린 사형 판결이 워낙 많아 "피의 재판소"로 불렸다. 에그몬트와 호른 백작(주로 가톨릭계)이 1568년쯤에 브뤼셀에서 사형을 받았고, 수천 명의 농민봉기 관련자가 사형되었다. 그런데 마스허를렌 싸움이나 성인 사형 같은 알바 공작의 이런 숙청 행위는 오히려 네덜란드 내의 지식인, 부자들의 반발에 불씨를 놓았다. 이 과정에서 기독교인은 물론 일부 가톨릭 교인들까지 반스페인 정서를 낳게 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C. 네덜란드 봉기의 탄생과 과정



1568년, 네덜란드 봉기의 주동자이자 네덜란드 독립의 아버지로 불리는 "빌럼 1세(오라녜 공작)"가 더 이상은 못 참고 스페인과 싸우게 되었다. 그는 처음엔 산지에서 하일리게레 싸움에서 승리하였으나, 곧 스페인 왕국의 토벌병들이 대량 증원되면서 밀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72년쯤에 프랑스 왕국과 영국의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도움을 받은 선박(바다의 방랑자, Geuzen)이 북네덜란드의 여러 항구를 점유하며 봉기는 점차 네덜란드 쪽으로 유리하게 흘러갔다. 1573년 9월쯤에는 스페인 왕국의 토벌병들이 알끄마르(Alkmaar) 공략에 완전히 패배하면서 수병들이 저지선을 뚫지 못하고, 스페인 왕국이 처참하게 대패를 하게 된다.


끈질긴 알바 공작은 다시금 1573년 레이던을 옥죄였으나 맛있는 음식들이 풍부한 레이던 도시에서는 이런 수법이 통하지 않았다. 이에 마치 고대시대 때의 고구려군이 당시 세계 최대의 군대 동원 능력을 가진 수나라의 원정군대들의 침략에서 구원했던 전술 전쟁 "살수대첩"처럼 근세시대의 네덜란드군은 1574년 9월 제방을 터뜨려 바닷물을 들여보내 레이던을 지켰고 스페인군을 바닷물에 익사시켰다. 10월 2~3일에는 마치 가미가제처럼 거센 폭풍우가 찾아오자 바닷물이 불어나 스페인군은 포위를 해제하고 철수했고, 반란군은 굶주린 시민들에게 생선을 전달하며 구원을 완수했다. 이 승리는 네덜란드인들에게 큰 사기진작이 되었다.


계속되는 싸움에서 스페인군은 연전연패했고, 네덜란드군은 연전연승하면서 1574년 알바 공작은 사임했고, 레께센스 지방관이 교체되었으나 싸움은 격렬했다. 설상가상으로 1575년 스페인 왕국은 경제력이 하락하면서 국가재정까지 고갈되면서 마치 구한말 임오군란 때 조선처럼 병사들에게 급료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고, 결국 병사들이 스페인을 탈출하거나 아예 스페인 본토에 봉기를 일으키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1576년 11월쯤에 네덜란드의 안뜨워쁘에서 벌어진 "스페인 노략(Spanish Fury) 사건"에서 스페인 병졸들은 마을을 노략질했고, 이는 스페인에 대한 모든 네덜란드 사람들의 혐오감을 폭발시켰다. 급기야 북쪽과 남쪽 지방이 종교를 넘어 일시 협동까지 맺고 1576년쯤에 스페인을 무너뜨리기로 한 "간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이 간트 협약에서는 가톨릭과 칼뱅파의 차이를 따지지 않고 손을 잡아 스페인 병졸들을 무너뜨리기로 합의했으며, 다만 형식상으론 펠리페 2세에게 면은 세워주되 실질적으로 스페인 봉기를 해서 스페인을 무너뜨리는 조치였다.









D. 1579년쯤 아라스 협동과 위트레흣뜨 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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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목은 한동안 이어졌다. 1579년 1월쯤에, 발르마 공작이 데리고 있는 스페인 편 가톨릭 세력이 남쪽 우성 지방(발롱, 왈롱 등)에서 아라스 협동이 만들어졌다. 이로써 종교 관용에 기초한 네덜란드 17주의 협동은 붕괴되었다. 이에 맞서 1579년 1월 23일쯤에 북쪽 기독교 주들은 위뜨레흣뜨 협동을 세웠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스페인 국왕 지배 하의 가톨릭 남부(현재 벨기에, 룩셈부르크)와 봉기군이 장악한 프로테스탄트 북부(유니테드 프로빈스)로 사실상 분리되었다.


1581년 7월쯤, 네덜란드 북쪽의 총대합회는 "독립 선언(‘배신 선언문’ Plakkaat van Verlatinghe)"을 채택했다. 이 선언에서 네덜란드는 더 이상 펠리페 2세에게 임금님으로 여기지 않을 것과 스페인 임금의 지배를 거부함을 정식적으로 밝히며 사실상 공화국 수립을 밝혔다. 펠리페 2세는 이듬해 1584년쯤 빌렘 암살을 조장했으나, 네덜란드 봉기는 꺾이지 않고 계속되었다.


그 후, 네델란드 봉기군은 "바다의 방랑자(Geuzen)"라는 사략선과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스페인 함대를 공격했으며, 스페인 왕국은 발르마 공작 알레산드로를 통해 남쪽 회복을 하고자 했다. 1585년 발르마 공작은 당시 유럽의 유명 항구도시인 안뜨워쁘를 장악하여, 많은 상공인과 백성들이 북쪽으로 이주했다. 이는 북쪽 네덜란드 경제의 전환점이 되었다.




E.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1648년 독립


이후 네덜란드 공화국은 위뜨레흣뜨 협동으로 프랑스 왕국, 영국 여왕과 손을 잡고 해양 경제력을 부유케 했다. 1588년에 이름과 달리 역사적으로 자주 패배했던 스페인의 무적함대는 이번에도 또 패배하면서 스페인의 해상 제압력이 심각하게 약화된 틈을 타 네덜란드 상인들은 해외로 진출하여 최초의 주식회사인 "동인도회사(VOC)"를 설립하는 등 해상 교역과 경제를 급속히 발달시켰다. 한편 스페인 왕국은 30년 전쟁에 휘말리며 국력이 급속도로 소모되면서 결국 순식간에 흥했던 스페인은 다시 순식간에 망해버려서 근세시대, 근대시대 내내 가장 존재감 없는 "환자" 취급을 받으며, 미국에게 순식간에 얻어맞아 패배하면서 그나마 있던 속국(파나마, 남미, 필리핀)도 빼앗기는 오합지졸로 전락한다.


어쨌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스페인 왕국은 패배하면서 네덜란드 공화국을 토해냈으며, 네덜란드는 스스로 자기들의 독립을 인정했으며, 네덜란드(유니테드 프로빈스)는 경제적 주권을 확보했다. 예를 들어, 베스트팔렌 조약은 “네덜란드 연합공화국(United Provinces)”을 독립공화국으로 승인되었다. 이로써 네덜란드는 정식으로 스페인의 종주권에서 벗어났고, 17세기 이후 오합지졸로 전락한 스페인 왕국을 짓밟고 부유한 경제 왕국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네덜란드의 80년 간 봉기는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완성이 된 것이다. 이 조약에서 네덜란드는 명실상부한 독립 왕국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이후 수십 년간 부유한 경제 왕국으로 급부상했다. 남쪽 네덜란드(현 벨기에 지역)는 오합지졸로 추락한 스페인(이후 오스트리아) 지배하에 남았지만, 스페인과 전쟁해서 승리한 북쪽 네덜란드는 남유럽, 서유럽의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스페인 왕국의 네덜란드 식민 지배는 음탕하고 난잡한 근친결혼으로 유명했던 합스부르크 왕실의 상속과 펠리페 2세의 억압 정책으로 탄생되었으나, 과도한 조세와 종교통합 시도에 대해 네덜란드 사람들의 봉기가 80년에 걸친 봉기가 됐다. 결과적으로 1648년 스페인 왕국이 네덜란드에게 패배함으로써, 네덜란드는 비로소 완전히 식민지에서 독립과 자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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