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의 자체 대양 함대가 멕시코까지 진출하다.

일본 전국시대때 건조한 자체 함대가 멕시코까지 진출하다 "게이초 사절단"

by 바다의 역사




조선은 자국의 영해권을 방어하느라 허덕대고 있을때..


일본은 자체적으로 발명한 대양 함선이 멀리 멕시코의 아카풀코항까지 진출했던 사실을 아실까요?


이에 대해 자세히 알려드리겠습니다.


당시 일본은 끊임없는 대전쟁 기간인 전국시대를 거치며 군사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있었고 이 과정에서 명나라의 선진적인 군사 기술과 서양의 조총과 화약 그리고 유럽식 조선술이 유입되었습니다. 다테 마사무네 장군이 주도한 센다이 번의 원양 함대 건조와 대양 진출은 스페인 왕국과의 직접적인 무역로를 개척하여 센다이 번의 경제적 부흥을 도모하고자 했던 목적에서 출발합니다.


당시 일본 전국시대 해군의 주력함은 아타케부네라 불리는 대형 안택선이었습니다. 이 함대는 첨저선으로 대양 함대였기에 멀리까지 대양 원정이 가능했습니다. 이는 명나라의 정화의 대함대로 유명한 송나라, 명나라의 함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듯 고대~중세, 근세 중국, 일본, 유럽의 함대들은 죄다 멀리까지 해양 원정이 가능한 "첨저선" 형태였는데 오로지 조선만이 자국 영해 방어에만 급급하고 해양 원정이 불가능한 "평저선" 형태였습니다.


조선은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국방, 안보, 자국 방어에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평저선으로 함대의 구조 자체가 고착화돼었을 것이다는 시각이 정설입니다.


어쨌든 해상의 성곽과 같은 역할을 했지만 점차 원양 항해에 적합하도록 첨저선 형태의 선체 구조가 발전된 일본은 문헌에 따르면 다테 마사무네 장군의 주도 하에 건조한 이 대양 함선은 일본의 전통적인 조선 기술과 항해술이 결합된 결과물이었으며 이는 일본이 어떻게 멕시코 즉 누에바 에스파냐까지 진출할 수 있는 해운력과 항해력을 가질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계기가 됩니다.









일본이 뛰어난 해군력과 조선 기술력을 가질 수 있었던 역사는 지리적 특성과 시대적 환경이 맞물린 결과입니다. 섬나라라는 특성상 고대부터 해상 무역과 어업이 발달했으며 전국시대를 거치며 다이묘들 간의 해군 경쟁이 치열해졌습니다. 특히 일본은 선박의 하단이 뾰족한 첨저선 구조를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함대의 속도를 높이고 파도의 저항을 최소화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조선시대의 함대로 유명한 판옥선이나 거북선인 평저선은 연안 방어나 조수 간만의 차가 큰 곳에서 유리하기에 쉽게 전복되거나 격침, 침몰되지 않다는 장점이 있어서 적 함대에게 돌격하면 오히려 적 함대가 격침이 될 정도로 견고하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가지고 "돌격"을 자주했던 겁니다. 하지만 단점으로는 이런 판옥선과 거북선은 자국 방어에는 최고이지만 바깥으로 나가기에는 좋지 않다는 점입니다. 조선시대의 군함인 판옥선과 거북선은 바닥이 평평해서 매우 안정적이지만 빠르게 파도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질 못했거든요.

이와는 반대로 명나라, 일본, 스페인이나 포르투갈 같은 유럽의 전통적인 함대 구조인 "첨저선"은 대양의 거친 파도를 헤치고 먼 바다로 나아가는 원양 항해에 매우 적합한 구조입니다. 비록 거북선이나 판옥선 같은 평저선이 돌격해오면 불리했지만 멀리까지 해양 원정을 하기에는 가장 최적의 함대 구조였습니다.


그렇기에 조선은 동남아까지 나가지도 못한 반면에.. 명나라는 정화의 함대로 아프리카 케냐까지 진출하면서 세계 패권을 가졌고, 일본 왜구는 동남아시아 곳곳에 사실상 해적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수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에 군사 개입하였으며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남아메리카 같은 곳에 정착해서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던 게 가능했던 겁니다.


물론 한민족의 가장 암흑기가 조선 중~후반이어서 그렇지 가장 영광의 시대였던 고대 신라~중세 고려시대(물론 세계 1위의 군사력을 가졌던 대원제국이 고려를 100년간 식민 지배 하기전까지..) 때는 한민족은 세계 무대에서 뛰어다니며 오히려 유럽보다 고려가 더 세계의 중심에 가까우면서 그야말로 국제적인 국가였던 시대였지만 이후 500년간의 조선시대가 다 망쳐버렸습니다.


여하튼 이러한 기술적 토대 위에 1540년대부터 명나라 상인들이 네덜란드나 포르투갈 상인들과 선교사들을 이끌고 일본에 당도하면서 명나라의 선진적인 군사 기술과 나침반, 화약, 유럽의 항해술 실전 노하우 등이 전수되었습니다. 스페인 왕국의 갈레온 선박 도면과 항해용 나침반 그리고 천문 항해술이 일본의 목수들과 해군 장교들에게 전해지면서 일본은 자체적으로 대양을 횡단할 수 있는 범선을 건조할 수 있는 역량까지 갖추게 되었습니다. 물론 일본은 고대 시대부터 왜구 같은 무장 해적 군단들이 이미 동남아시아까지 밥먹듯이 들락날락거렸기에 해전 실전 노하우들과 해양 역량은 충분했기에 명나라와 유럽의 선진 해양 기술들이 왔을때 충분히 그 기술들을 자신의 것으로 승화시키는 게 가능했던 겁니다.



image (2).jpg 일본 1613년 자체 조선술로 건조한 대양 함대로 멕시코까지 진출한 게이초 사절단









이 시기 일본의 군사력과 국력이 어마어마하게 세계적으로 강력했던 이유는 수백 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단련된 정예 직업 군인들과 전술, 그리고 야포와 조총이라는 신무기들의 대량 생산 그리고 이를 뒷받침하는 은광 개발을 통한 막대한 경제력이 존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프리카라던가 다른 국가들도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총이 들어간 적이 있는데 왜 그들은 막강한 군사강국이 되지 못하고 일본만 군사강국이 됐을까?


우선 여기서 간과하면 안될 점이.. 일본은 그 전부터도 충분히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사강국이었다는 점입니다. 게다가 단순히 조총만 있다고 군사강국이 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일본은 이미 선진적인 금속 제련 기술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었기에 명나라와 스페인의 선진 기술이 도착했을 때 그것을 더 발전시킬 공장과 기술을 자체 보유하고 있었던 겁니다. 아프리카의 경우는 그냥 총만 받고 그게 끝이었지만 일본은 명나라와 스페인으로부터 총과 대포를 받았을 때 그걸 "대량 생산"과 "자체 발전"을 통해 스페인과 대등하거나 혹은 스페인을 이길 군대를 양성해냈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이런 점들 덕분에 일본은 대항해시대 내내 역사적으로 단 1차례도 명나라나 스페인의 식민지가 되지 않고 오히려 명나라와 스페인과 대등하게 맞먹고 무역을 할 수 있는 세계적인 강국으로 계속 군림할 수 있던 겁니다.










임진왜란 이전 시대의 해양 진출과 관련하여 일본의 무사들과 무장 상인단들은 이미 필리핀 마닐라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전역에 진출하여 사실상 일본 해적(왜구)의 해적 식민지, 해적 소굴로 삼은 지 오래였습니다. 그렇기에 필리핀으로 진출해서 해적 소굴을 건설한 왜구들은 그곳에서 스페인 세력과 교류하고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필리핀 식민지 개척 이후 마닐라 갤리온 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일본인들은 일찍부터 멕시코로 향하는 스페인 함선의 존재와 태평양 항로에 대해 알고 있던 겁니다.


이런 바탕 속에서 임진왜란 전~후로 일본 센다이 번의 영주는 스페인 왕국과의 해상 무역을 더욱 확장해서 스페인으로부터 경제적 이득을 챙기려고 했고 1613년 다테 마사무네 장군의 명령에 따라 하세쿠라 츠네나가를 주축으로 하는 게이초 사신단이 일본의 센다이 번이 자체적으로 건조한 대양선을 타고 태평양을 횡단하여 멕시코의 아카풀코 항구에 도착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이 대항해는 일본에서 출발하여 북태평양의 해류를 타고 멕시코로 향하는 극도로 험난한 항해였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수부들의 뛰어난 해양 지식과 명나라의 선진적인 해군 기술과 스페인 항해사들의 협력이 어우러져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센다이 번은 이 항해를 통해 스페인 국왕 및 로마 교황과의 동맹을 맺고 막대한 부를 창출하려 했으며 이는 당시 일본 지방 영주(다이묘)가 가졌던 세계적인 시야와 국력을 방증하는 사례입니다.









덴쇼 소년 사절단은 1582년 즉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12년전에 오토모 소린, 오무라 스미타다, 아리마 하루노부 등 규슈 영지의 지방 영주(다이묘)들이 로마를 탐험하기 위해 로마 교황에게 파견한 4명의 일본인 소년들입니다. 이들이 로마까지 진출하여 세계 일주에 가까운 항해를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명나라로부터 전수받은 선진적인 해군 기술과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의 거대한 해상 네트워크를 철저하게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덴쇼 소년 사절단은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하여 명나라의 마카오 항구와 인도 최남단의 고아 그리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하는 루트를 거쳤습니다.


이들은 스페인 왕국의 국왕 뻴리뻬 2세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3세를 만나며 스페인과 로마의 정보들을 빠르게 가져왔습니다. 물론 기술만 가지고 항해가 성공할 순 없었고 자금도 필요했는데 자금줄의 배경에는 예수회의 막대한 자금 지원도 있었습니다. 이는 당시 센다이 번과 유럽의 예수회가 동맹을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덴쇼 소년들 스스로도 라틴어와 서양 학문을 빠르게 습득하는 우수한 언어 습득과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탐험은 단순한 종교적 사절을 넘어 당시 일본이 서양 세계로 어떻게 직접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게다가 이들은 유럽의 활판 인쇄기와 서양 악기 등 다양한 문물을 일본에 들여오며 문화적 교류의 정점을 찍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이러한 원대한 해양 탐험과 세계화의 노력은 에도 막부 정권이 공식적으로 들어서고 기독교 금지령과 쇄국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급격한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스페인 왕국 및 포르투갈 왕국과의 무역이 단절되면서 다테 마사무네 장군이 꿈꾸었던 스페인 왕국과의 직접 해상 무역이나 덴쇼 소년 사절단이 개척해 놓은 유럽과의 무역 교류 루트는 그렇게 끝나게 됩니다. 그 이후 에도 막부는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을 버려버리고, 오직 네덜란드 왕국과 대청제국과의 제한적인 해상 무역만을 허용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에 축적된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와 조선 기술의 기초는 훗날 19세기 중반 흑선 내항 이후 일본이 메이지 유신을 통해 서양의 근대적 해군력을 빠르게 스펀지처럼 흡수하고 단기간에 강력한 해양 국가로 다시금 부상할 수 있는 잠재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최근의 역사학계 근황과 연구 동향을 살펴보면 다테 마사무네의 게이초 사절단이나 덴쇼 소년 사절단의 기록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는 등 글로벌 관점에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아타케부네와 첨저선 기술의 우월함이 가져온 군사적 파급력을 살펴보면 당시 일본 목수들은 철을 다루는 제련 기술이 뛰어나 선박의 주요 부위를 쇠못과 철판으로 보강하는 방식에 능숙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이는 해상 전쟁 시 적군의 대포나 화승총격, 불화살로부터 전함을 보호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조선 기술의 측면에서 볼 때 소나무와 삼나무 등 풍부한 목재 자원 또한 거대한 함대를 단기간에 건조할 수 있는 물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항해술의 측면에서는 별의 위치를 보고 방향을 잡는 천문 항해술과 해류의 흐름을 읽는 전통적인 지식이 송나라의 나침반과 결합되면서 북태평양의 거친 파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배양되었습니다. 멕시코 아카풀코로 향하는 북태평양 항로인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동쪽으로 나아가는 루트는 고도의 항해 지식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며 이를 성공시켰다는 것 자체가 당시 일본의 해양 기술력이 세계 최고 수준에 근접해 있었음을 증명합니다. 스페인 입국 비자를 받은 63명의 일본인들이 쿠바 하바나를 거쳐 스페인까지 향했다는 사실은 당시의 외교력과 해운력이 얼마나 촘촘하게 맞물려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현대에 이르러 이런 센다이 번의 대항해 도전과 덴쇼 소년 사절단의 탐험은 텔레비전 다큐멘터리나 학술 논문 그리고 여러 역사 서적을 통해 끊임없이 재현되고 있습니다. 일본 현지에서는 이 덴쇼 소년 사절단의 복원선을 재현해 전시하며 당시의 조선 기술과 해양 개척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원래부터 강했지만 일본 전국시대부터 에도 막부 초기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더욱더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일본의 해군력, 해양력은 단순히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치열한 전쟁들 속에서 경쟁과 승리를 위해 외부 세계의 기술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자체적인 기술로 소화해낸 치밀한 노력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과장이나 추측의 영역이 아닌 로마 바티칸 문서고에 보관된 당시 교황 알현 기록과 멕시코 현지에 남아있는 일본 사절단의 체류 기록 등 공식적이고 객관적인 사료들을 통해 명백히 입증되고 있습니다.





일본의 해양 개척이 남긴 문화적 유산과 사회적 변화를 살펴보면 당시의 대규모 항해 프로젝트는 일본 사회 전반에 엄청난 파급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멕시코와 로마로 향하는 거대한 함대를 건조하기 위해서는 수천 명의 벌목꾼과 목수 그리고 밧줄을 꼬는 장인들과 강철을 제련하는 대장장이들이 필요했습니다. 이는 센다이 번과 규슈 일대의 지역 경제를 폭발적으로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양한 직업군인이 협력하여 거대한 산업 생태계를 구축하는 결과를 도출시켰습니다. 특히 대항해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항구 도시들은 명나라 상인들이나 스페인 상인들 같은 외국 상인들과 일본 무사 군인들이 저마다 자신들의 역할을 하며 국제적인 다문화 대도시로 발전했습니다.


나가사키와 오사카 그리고 센다이의 항구들은 서양의 직물과 향신료 그리고 유리 공예품들이 일본의 은과 도자기 그리고 비단과 교환되는 거대한 해상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이 발전 과정에서 서양의 미술 양식이 일본 전통의 병풍 그림에 스며들어 남만 미술이라는 독특한 예술 장르가 탄생하기도 했습니다. 덴쇼 소년 사절단이 로마에서 돌아오며 가져온 지도와 지구본은 일본 지식인들에게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과 5대양 6대주의 정확한 지리적 지식을 심어주었습니다.




게이초 사절단이 멕시코를 거쳐 스페인과 로마에 당도했을 때 그들이 보여준 외교적 역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스페인 국왕 펠리페 3세 앞에서도 다테 마사무네의 친서를 전달하며 무역 협정을 요구했습니다. 로마 교황 바오로 5세를 만날 때에는 화려한 일본 청년용 비단 의복과 쌍검을 찬 군인의 복장으로 바티칸 궁전에 입성하여 수많은 로마 시민들과 성직자들의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교황은 이들의 카리스마를 찬양하며 로마 시민권이라는 영예로운 자격을 바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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