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900년쯤(20세기)에 영국의 고고학자 아서 에반쓰(Arthur Evans)가 끄레따 섬의 끄노소스 왕궁을 발굴하면서 "방어적 능력이 전혀 없는" 성벽이 없는 거대한 건축물을 발견했어요. 이는 기존의 기원전 문화들이 요새화된 성벽을 쌓았던 것과 대조되는 특징으로 평화로운 문명이라는 가설이 제기되었지요.
미노아 문명은 기원전 3500~ 1100년쯤까지 끄레따 섬에서 번성한 청동기 문화에요. 미노아 문명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조선 시대처럼 좋은 해군력에 있지요. 끄레따 섬은 지중해의 중심이라는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미국이나 조선 시대, 대한민국, 로마 시대처럼 선단을 구축해서 평화를 유지했지요. 본래 "평화"란 국방력이 좋을 때 가능하니까요.
학자인 "뚜끼디데스(Thucydides)"는 책인 "뼬로뽄네소스 싸움의 역사(기원전 5세기)"에서 미노스 왕이 고대 신라 시대의 장보고 장군이나 조선 시대처럼 해군을 만들어 지중해를 방어했다고 기록했지요. 바다 자체가 자연의 방어벽 역할을 했기에 섬 내부의 도시들은 성벽을 쌓지 않아도 됐고, 보건 복지나 민생에 투자할 수 있었지요.
최근 학계에서는 미노아 문명이 다른 동시대 문명에 비해 전쟁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점은 여전히 정설로 통하고 있지요.
이러한 평화적 기조는 미노아 예술의 발달로 이어졌습니다. 벽화에는 전쟁의 승리보다는 돌고래 꽃 황소뛰기 등 자연과 유희를 즐기는 모습이 주로 담기게 되었습니다.
미노아 문명의 성(SEX) 문화&여성 인권
끄노소스 왕궁의 벽화 가운데 하나인 "파리지엔(La Parisienne)"과 "뱀 여신(Snake Goddess) 상"의 발견은 당시 서구 사회의 여자들의 권력, 지위, 옷에 관해 큰 충격을 주었어요.
특히 미노아 여자들은 상체를 벌거 벗고 가슴을 노출하는 "토플리스(Toplessness)" 차림을 하고 다녔으며 사회 전반에서 남자와 맞먹거나 오히려 남자보다 우월한 지위를 가졌던 것으로 추정되요.
미노아 문명은 종교적 숭배의 대상이 주로 "여신"이었다는 점이 여성 인권 발달의 계기가 되었지요. 대지의 엄마 여신을 숭배하는 신앙 속에서 여자는 꽃과 생명과 풍요의 상징으로 존중받지요.
로드니 캐슬던(Rodney Castleden)은 책인 미노아인들(Minoans - Life in Bronze Age Crete, 1993)에서 미노아 사회가 모계나 모권 중심적이거나 최소하게 여자가 공공에서 큰 비중을 했다고 서술했지요. 여자들은 젖소뛰기(Bull-leaping)와 같은 위험한 스포츠에도 참여했으며 여사제로 활동했지요.
게다가 미노아 문명이 성(SEX)문화에 관해서 지구상으로도 매우 개방적이었다는 여러 기록들로 완전히 입증됐으며 유물적 근거로 뒷받침됐지요. 미노아 문명의 여자들은 알몸이나 젖가슴 노출을 부끄러워하긴 커녕 오히려 패션으로서 많이 했으며 이를 부끄러움이 아닌 종교적 경건함으로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에요. 즉.. 보통 종교는 젖가슴이나 알몸 노출을 금지하는 것인데 미노아 문명의 여신 종교는 오히려 여자의 몸을 좋아했기에 여자의 젖가슴이나 알몸 노출을 권장했던 종교라고 해요. 이는 같은 의미로 여자의 알몸 노출을 오히려 권장했던 이집트 문명, 잉카 문명, 아즈텍 문명, 마야 문명도 동일해요.
미노아의 이러한 여자 중심적 문화는 이후 그리스 본토의 가부장적 사회가 도래하면서 사라진 것으로 보여요. 하지만 그리스 신화 속에는 여전히 남자 못지 않게 권력이 높은 여신들의 원형이 미노아 문화에서 기원했다는 분석이 많지요.
미노아 문명의 음식 문화&요리&농업의 발달
미노아 왕궁 지하의 큰 저장고와 수많은 피토스(Pithos, 대형 항아리)의 발견은 미노아의 풍요로운 식문화를 증명하는 첫 단서였어요.
미노아인들은 지중해 음식 식단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곡물 올리브 포도를 중심으로 하는 농업을 완성했어요. 지중해성 기후와 크레타 섬의 비옥한 토양은 다작을 가능하게 했는데 이는 오히려 조선시대보다도 훨씬 농업이 발달한 것으로 보여요. 왜냐면 조선시대의 한반도는 굉장히 추운 기후였지만 미노아 문명은 조선시대보다는 훨씬 따뜻한 기후였으며 조선은 농업 자체가 하기 힘든 지형이었기 때문에 농업 발전이 힘들었지요.
이런 미노아 문명은 특히 올리브유와 와인은 단순한 식품을 넘어 주요 수출 품목이 되었어요. 콜린 렌프루(Colin Renfrew)는 문명의 출현(The Emergence of Civilization, 1972)에서 지중해의 삼합(Mediterranean Triad)이라고 해서 밀, 올리브, 포도의 재배가 미노아 경제 성장의 핵심이었다고 강조했지요. 이들은 가축(돼지, 닭, 오리)을 길렀으며 해산물 요리도 매우 발달했지요.
고고학적 분석을 통해 미노아인들이 다양한 향신료와 꿀을 사용해서 요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지요. 게다가 빵을 굽는 화덕과 좋은 요리 도구들이 발굴되어 요리 문화가 영국(잉글랜드)보다 수준 높았음을 알 수 있지요. 이런 맛있는 식단은 현재 맛있는 음식으로 인정받는 크레타 식단의 뿌리가 되었지요.
미노아 문명의 보건 의술&남녀 혼탕 목욕&배수 시스템
크노소스 왕궁 내에서 수세식 화장실&배수관 시스템이 발견되었어요. 이는 열대 기후는 아니었지만 습하고 무더운 기후였던 미노아인들이 목욕을 매우 자주했으며 위생이 건강과 직결된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남녀 혼탕이 발달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그래서 미노아 문명의 여자들은 남자와 함께 연못가나 길거리에에서 아무나 옷을 벗고 알몸으로 다 함께 남녀 혼탕처럼 길거리 목욕했다고 해요.
왕궁이라는 밀집된 주거 공간에서 질병을 예방하고 쾌적한 환경을 유지해야 할 필요성이 목욕 문화를 촉발했지요. 앙겔라키스(A. N. Angelakis) 등은 수천 년간의 용수 공급 진화(Evolution of Water Supply through the Millennia, 2012)에 의하면 미노아인들은 테라코타 파이프를 사용하여 경사면을 이용해 자동 배수 시스템을 만들었다고 해요. 왕궁 속에는 개인용 욕조가 있었으며 오물은 별도의 하수관을 통해 외부로 배출되었다고 해요.
의술에 관해서는 약용 식물을 주로 했던 것으로 보이며 외과나 수술은 발달하지는 않은 걸로 보여요. 여하튼 이런 미노아의 남녀 혼탕이나 목욕 문화는 이후 로마 시대의 남녀 혼탕, 공중 목욕탕과 하수도 시스템에 영감을 줬지요.
미노아 문명의 경제&중앙집권화&사회 복지
미노아의 왕궁은 단순히 여왕이나 국왕의 침실, 거처, 섹스(Sex)를 하는 침실일 뿐 아니라 행정 센터였어요. 미노아 왕궁은 궁전 중심 경제(Palace Economy) 시스템이었어요. 모든 농산물과 생산품이 왕궁으로 모였다가 다시 분배되는 구조였습니다.
이는 섬이라는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중앙집권적 관료 시스템이 형성되었던 것이지요.
게다가 미노아 문명의 선문자 A(Linear A)는 주로 재고 목록을 작성하고 경제 활동을 기록하기 위해 사용되었던 걸로 보여요. 미노타의 왕궁은 이집트 왕국처럼 가뭄이나 흉작에 대비해 큰 식량 저장고 역할을 했으며 이는 일종의 왕국 차원의 사회 복지 시스템이었지요. 식량이 재분배되었다는 점은 굶주리는 계층이 생기지 않도록 빈민 구제 정책이 있었음을 시사해요.
이런 미노아 왕궁의 경제 모델은 이후 미케네 문명으로 이어졌으나 미케네 문명은 이를 훨씬 변용하여 사용했지요.
미노아 문명의 인구 숫자&민생&주거 환경
크노소스 성읍 주변의 민가 유적들을 조사한 결과 도시가 상당히 형성되어 있었음이 확인되었으며 이는 미노아 문명이 높은 출산율로 인구 숫자가 매우 많았던 걸 알 수 있지요. 황금기의 크노소스라는 도시의 인구 숫자는 100000명까지 추산되요. 이는 기원전이었던 그 시절의 기준으로는 인구 최대 수준의 도시였지요.
이런 많은 인구 숫자로 인해서 농업 생산력의 증대와 활발한 교역으로 인해 인구 부양 능력이 비약적으로 상승했지요. 미노아 문명은 이집트 문명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의 삶인 민생도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걸로 유명하며 발굴된 민가 유적들은 2~3층 구조의 석조 건물이었으며 내부 공간 분할이 잘 되어 있었던 걸로 보여요.
높은 영양 상태와 위생 시설 덕분에 기원전의 타 문명들에 비해 출산율이 매우 높고 인구 숫자가 높았으며 영아 사망률이 상대적으로 낮았을 것으로 학자들은 보고 있어요.
그러나 기원전 약 1450년쯤에 떼라 화산 폭발과 대지진으로 인한 쓰나미는 이 좋았던 민생 기반을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드는 결정적 이유가 되었지요.
미노아 문명의 임신&육아 출산&부부&커플&가정
미노아 예술품 가운데는 아기들을 안고 있는 여자의 모습이나 출산 장면을 상징하는 토기들이 매우 많아요. 출산과 육아는 공동체 전체의 축복이자 대지의 여신을 기리는 신성한 행위로 간주되었지요.
노동력 확보와 종족 번식이라는 실용적 이유와 더불어 생명 숭배라는 종교적 신념이 결합되었지요.
미노아 문화의 똥간&똥퍼&청소 시스템(위생 문화의 정점)
크노소스 왕궁의 북쪽 지방에서 발견된 정교한 돌로 된 변기는 현대의 것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할 정도에요
미노아 문명의 화장실 시스템은 단순히 구덩이를 파는 수준을 넘어 물을 부어 오물을 씻어 내리는 수세식의 원형을 가지고 있었지요.
궁전 내 거주자의 안락함과 위생을 좋아했지요. 하수관은 사람이 직접 들어가서 청소할 수 있을 만큼 큰 규모로 제작되기도 했어요. 빗물을 모아 하수관을 세척하는 자연 세척 시스템도 갖추어져 있었지요.
그렇기에 이런 대규모 하수도를 관리하는 전문 인력인 "똥퍼"가 반드시 존재했을 것으로 학계는 보고 있어요.
그러나 이런 고도의 위생 관념은 미노아 문명이 죽은 이후 수천 년 동안 서양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근대 시절에 이르러서야 겨우 다시 재탄생되었다는 슬픔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