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토벌
조선시대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토벌 과정
조선 초기 세종 시대에 단행된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토벌은 대한민국 근세사에서 대외 관계와 국방 정책의 정수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을 "기해동정"이라고도 부르며 당시의 군사적 정세, 정치적 역학 관계 그리고 전후 처리 과정을 통해 조선이 견지했던 대일 정책의 방향을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기해동정"은 1419년 세종 즉위 1년에 세종대왕이 즉위하자마자 조선 정부가 왜구의 본부 아지트인 대마도를 토벌하기 위해 감행한 군사 행동을 의미합니다. 당시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서 수많은 전쟁에서 밀려난 패잔병들, 몰락한 지방 영주들이 집결한 데다가 농경지가 부족하여 식량 자급이 불가능했기에 죄다 해적으로 돌변하였던 말그대로 오로지 해적질만을 하기 위해 모인 "해적 소굴"로 그 규모나 강세는 북유럽 바이킹이나 소말리아 해적들을 훨씬 더 능가했습니다. 왜구들의 주요 공략 대상은 한반도 해안과 동남아시아 전역까지 뻗쳤는데 조선은 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 태종의 주도 하에 대마도 토벌을 계획했습니다.
즉.. 대마도 토벌은 세종 즉위부터 시작된 군사 작전이지만 사실상 이 전쟁을 처음부터 끝까지 총 설계하고 계획한 주동자는 태종이었습니다. 대마도 토벌이 결정된 직접적인 계기는 1419년 5월에 발생한 왜구의 비인현 공격 사건입니다. 당시 왜구는 충청도 비인현의 도비곶에 침투하여 조선의 전함들을 침몰시키고 군인들를 살해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들은 이어 해주 지역까지 북상해 약탈을 계속했습니다.
이 사건은 당시 상황에서 매우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졌으며 그야말로 국가 비상사태였습니다. 당시 조선은 태종이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군사권은 여전히 상왕인 태종이 쥐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태종은 조선 초엽까지 계속 이어진 왜구의 공격을 근절하지 못하면 국방의 안보를 보장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에 태종은 단순히 국방에 치중하는 것이 아니라 적군의 본거지를 직접적으로 정밀 타격하는 말그대로 오늘날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이 할 법한 "공세적 방어 전략"을 계획, 수립하게 됩니다.
즉 토벌 계획의 수립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째 왜구의 약탈 행위를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함이고. 2째는 대마도 도주가 사망하고 어린 소년이 뒤를 잇자 대마도 내부 군벌들 간의 세력 전쟁이 심화된 틈을 타 군사적 압박을 가하기 위함입니다. 3째 일본 왜구들이 동남아시아로 진출할 때 조선 해안을 경유지로 삼는 것을 차단하여 조선의 국방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대마도 토벌을 위해 삼도도체찰사 이종무 장군을 해군 장교로 임명하고 대규모 함대를 조직했습니다. 다음은 대마도 토벌의 구체적인 시간적 전개입니다.
1419년 6월 9일 태종은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한 수군들에게 출전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함대는 총 227척의 전함과 1만 7285명의 수군(해군)으로 구성되었으며 조선 전역에서 징수한 65일 분의 군량미를 적재했습니다.
1419년 6월 19일 이종무 장군이 이끄는 본대가 거제도 주원방포를 출발했습니다.
1419년 6월 20일 조선 함대는 대마도 아소만에 도달했습니다. 이종무 장군은 먼저 항복을 권고하는 글을 대마도측에 보냈으나 답신이 없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조선군은 왜구 함대 129척을 빼앗아 쓸모 있는 20척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침몰시켰으며 가옥 1939호를 소탕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왜구 114명을 사살하고 21명을 생포했습니다. 또한 왜구에게 잡혀 있던 전쟁 포로 131명을 구출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1419년 6월 26일 조선군은 섬 깊숙이 진격하던 중 누카다케(훈내곶)에서 매복하고 있던 왜구 보병들의 기습을 받았습니다. 좌군절제사 박실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험난한 지형에서 고전하며 수군 100여 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우군절제사 이희 장군이 반격에 나서 왜구 보병대를 물리치며 전열을 정비했습니다.
1419년 6월 29일 대마도주가 항복의 뜻을 전하며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습니다. 당시 장마철이 다가오고 있었고 북태평양 기단의 태풍의 위험이 있었기에 이종무 장군은 참모진들과 논의 끝에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1419년 7월 3일 조선 함대는 거제도로 무사히 회군하며 대마도 토벌 일정을 마무리했습니다.
그렇다면 이 대마도 토벌은 성공적인 작전이었는가? 이 전쟁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해서는 다각적인 분석이 필요합니다. 군사적 측면에서만 보면 "완벽한 승리"라고 보기 어려운 면이 있습니다. "누카다케 전투"에서의 아군 피해가 컸었고 왜구의 주력 보병 세력들을 완전히 진멸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 대마도 토벌의 목적은 단순히 전쟁에서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왜구"의 한반도 침략을 막기 위한 목적이 강했던 군사적 징벌 작전이었기 때문에 만약 승리하더라도 왜구 함대들이 계속해서 한반도를 침략하면 도로아미타불인 겁니다.
하지만 전략적 측면, 외교적 측면에서는 명백한 성공으로 평가됩니다. 1째로는 왜구에게 조선의 군사적 위력을 각인시켜 이후 수십 년간 대규모 왜구의 공격이 근절되는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2째로는 대마도를 조선의 영향권 아래 두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째로는 당시 세계 패권국의 지위를 가지고 있던 명나라나 국제 질서는 조선을 단순히 명나라의 식민지로만 여겼는데, 이 대마도 토벌로 인해 조선의 자주적 국방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물론 그렇다고 조선이 명나라의 식민지적 영향력 하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따라서 단기적인 해전 결과보다는 장기적인 국방 안보 확립이라는 측면에서는 성공적인 토벌 작전으로 분류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이종무 장군을 비롯한 군 장교들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습니다. 이종무 장군은 개선 직후 막대한 환대를 받았으나 곧이어 누카다케 전투에서의 패전 책임과 군령 위반 혐의로 조정의 공격을 받았습니다. 대간들은 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처벌받아야 된다고 주장했고 결국 이종무 장군은 유배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복권시켰으며 이후 찬성사의 관직까지 올렸습니다.
대마도 토벌 이후 조선과 대마도의 정세는 급격히 변화했습니다. 대마도주는 조선에 귀순할 의사를 밝히며 대마도를 조선의 한 행정 구역으로 편입시켜 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대마도 토벌로 인해 식량 보급로가 끊길 것을 우려한 대마도의 타개책(국면)이었습니다.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된 속주로 간주하고 대마도주에게 조선의 관직을 수여하는 등 회유책을 병행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을 대마도를 마치 고대 로마 제국이 자신들의 속주를 관리하듯 식민지처럼 잠시나마 두게 됩니다.
그렇다면 왜 조선은 이 대마도 영토를 영구히 조선령에 편입시키지 않았을까? 조선이 대마도를 무력으로 점령하여 직접 통치하지 않은 이유는 매우 현실적이고 복합적입니다.
1째로는 지리적, 경제적 가치의 미비입니다. 당시 대마도는 척박한 산지로 이루어져 농사를 아예 지을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조선 본토조차도 농사가 거의 불가능했는데 대마도는 그걸 능가할 정도로 완전히 전국토가 100% 농사가 불가능합니다. 이 탓에 대마도가 해적 소굴이 된 것이기도 하니까요. 조선은 농업 발전 지향형 국가였기에 경작이 불가능한 땅을 관리하기 위해 막대한 국방비와 행정력을 투입하는 것을 비효율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만약 조선이 송나라나 근대의 영국, 오늘날 미국처럼 어마어마하게 부유한 자금력을 가지고 있었으면 약간의 손해가 나더라도 대마도를 식민지로 두는 게 가능했겠지만 아쉽게도 조선은 "돈 없는 거지 국가"였으니까 조금이라도 단 1푼이라도 돈을 검소하게 아껴야 됐습니다.
2째로는 관리의 어려움입니다. 섬이라는 지형적 특성상 중앙 정부의 통제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시적인 해군력 유지와 보급로 확보가 필수적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경제력으로는 본토 방어 외에 대마도라는 원격지에 상주군을 배치하는 게 가능할 정도로 국고가 부유한 편이 아니었습니다. 즉 또 "돈 문제"입니다.
3째로는 외교적 명분입니다. 조선은 대마도를 완전히 점령시키기보다 조선의 영향력 속에 편입시켜 즉 직접 통치보다는 간접 지배를 통해 왜구 발생을 억제하는 실리적인 노선을 택한 것입니다. 조선은 대마도주를 통해 일본 본토 세력을 견제하고 무역의 통제권을 쥐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보았습니다.
오늘날 역사학계는 이종무 장군의 대마도 토벌을 조선의 주권 수호 의지가 투영된 강력한 대외 정책으로 평가합니다. 이 토벌 작전 이후 1443년 계해약조가 체결되면서 조선은 대마도와의 무역 규모를 제한하고 왜구의 활동을 제도적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는 한반도 남부 해안의 국방 안보를 가져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현재 대마도에는 이종무 장군의 토벌과 관련된 유적이나 기록들이 남아 있으나 일본 측 시각에서는 이를 침략으로 규정하여 기록을 축소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정사를 통해 확인되는 사실은 이 토벌이 왜구의 약탈적 공격에 대한 정당한 국방권 행사였음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